제목 | Re:로마서 5장 6절~7절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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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11-08 | 조회수3,917 | 추천수0 | 신고 |
아랫글은 로마서 해설( 5,5-11)중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보시고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살롬.
~~생략~~~ (열왕기상19:14, 18)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읍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읍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읍니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엘리야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됐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예언자들 850명을, 단칼에 도륙했습니다. 해보니까 자기가 기특한 거예요. ‘하느님, 내 열심히 특심이었습니다.’라고 자기를 평가하죠. ‘이런 사람 세상에 있어요? 나 하나 남았어요. 이런 열심, 이런 특심 있는 사람 세상에 있어요? 나 하나 남았어요.’ 누가 한 말이에요, 이거?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 걸어가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그랬다 그러죠? 쿨 하죠, 그건요? (하하하하) 그 말이에요. ‘하늘과 땅! 그 어디에 나 같은 이가 있느냐?’ 왜? 불교는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 이거예요. 내가 짱이야!’란 뜻이에요. 내가 신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고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하나 남았다는 거예요. 나처럼 열심 있는 사람 나와 보라 그래요. 하느님이 내가 남긴 자가 ‘얘야, 칠천이 있단다. 가서 칠천 명 세어 보라는 게 아니라, 칠! 창조의 숫자예요. 묵시의 숫자! 하느님이 창조하여 완료해 놓은, 묵시록에 나오는 그 천년, 천일, 완전 수. 하느님의 교회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거지, 내가 남긴 자가 일을 하는 거지. 네 열심과 특심으로 일한 게 아니다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랬더니 금방 뭐라 그래요. ‘그럼, 죽이세요. 그럴 거면 뭐하러 날 시켰어요?’ 요게 인간이라니깐요, ‘차라리 날 죽이라고.’ 이렇게 역사와 인생은 하느님의 능력과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증명하고, 확증하기 위해 창조가 된 거고,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 우리가 하느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거예요. (로마서 5:6-10) 6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전체의 내용이 이래요. 예수의 사랑, 하느님의 은혜, 자비만을 자랑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확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우리의 실체를, ‘죄인 중에 죄인, 경건치 않은 자, 여전히 연약한 자, 원수 된 자, 아직 죄인 된 자!’ 요렇게 우리가 우리를 자각하고 있어야 돼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걸, 이 인생 속에서 반드시, 진심으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돼요. 고걸 고백하게 하는 게, 인생이며 그걸 환난(患難)이라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불 가운데 건졌더니, 죄인으로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즈가리야서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걸 바꿔주는 거예요. 이게 혼인잔치고,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창조의 메카니즘이에요. 이런 나! 도저히 존재일 수 없는 나!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불가능한 뱀인 나! 경건하지도 않고 여전히 죄인이고, 연약하고, 원수이고, 이게 혼돈과 공허이고 흑암이에요. 그런데 하느님이 은혜를 부어서, 나를 하느님의 아들로 창조해내신 거, 고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와 영광을 확증하는 게 역사잖아요? 요게 창조의 메카니즘이에요. 창세기에서 보세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가 일어나는 거예요. 얘네들은 뭐 하나 한 게 없어요. 특히 인간! 여섯째 날, 얘들을 뭘 사용하려고 했으면, 첫째 날 만들어서 계속 일을 시켰겠죠? 그런데 여섯째 날 만들어서, 눈을 뜨니까 안식일이에요. 요걸 구원이라 그런단 말예요. 그러니 묵시 속에서 그렇게 창조가 되는 것이, 이게 창조다. 이게 역사 속에서, 동시에, 다른 차원으로, 요렇게 지금 꿈처럼 설명이 되는 거예요. 영원이 있고, 역사가 있고, 영원이 또다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게 창조야, 이렇게 창조되는 거야! 요거를 우리가 꿈속에서, 육신을 입고, 그대로 같은 자리에서 경험하는 거예요. 같은 동선으로. 그러니까 여러분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는 거예요. 자, 묵시 속에서 하느님의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이 계시를 받아, 묵시, 계시 같은 말입니다. 그걸 역사 속에 내려와서 경험을 하는 거예요. 요 사람이! 요기서 하느님이 확 밀었어요. 이걸 말씀을 통하여 알아요. 이 세계가 있다는 걸. 그런데 이 역사를 살아가면서, 이 역사가 힘의 원리로 움직이죠? 마귀의 원리예요. 결국 사망으로 흘러가요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마귀와 뱀과 인간들의 결국! 이게 흐름이라고요 역사의 흐름, 결국 여기에서 끝나는 거죠. 이게 멸망의 자리고, 요기에서 떨어지면 사망이에요. 떨어지면! 그런데 여기에서 이 전체를 본 사람이, 경치 구경을 하다가 뚝 떨어졌어요. 여기에서 이리로 내려가면서 이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둘까요? ‘살려주세요, 나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요.’ 이걸 말씀으로 보는 자가 성도라고요. 나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데, 내가 지금 계속 흘러가고 있어요. 자기는 안다니까요. 자기가 어떻게 뱀처럼 사는지 자기는 안다니까요. 그게 지금 이리로 흘러내려가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 안 되는데,’ 흘러내려가면서,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여기에서 다시 올라가 보려고 애쓰죠. 왜? 이 지점이 묵시, 완료의 지점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지향성이라는 게 생긴다고요. 흘러내려가면서 이리로 떨어지면 죽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열심이 생겨요. 반드시! 노력은 하는데, 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에페소서 2장 1절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 풍속을 쫓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을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 그러죠? 죽은 자들은, 죽은 물고기는 항상 물을 따라 흘러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그 몸을 입고 왔다니까요.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서 1m 올라가면, 30cm 떨어지고, 30cm 올라가면 2m 떨어지고, 이런 경험들을 계속해요. 그러면서 마음은 계속해서, ‘아닌데, 하느님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되는데’ 이 지점을 바라본다고요. 그런데 몸이 계속 이리로 흘러내려가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한 상태에서 올라가며, 떨어졌다가,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하는 것을 성도의 신실(信實)함이라 그러고, 하느님의 은혜와 아무 상관없이, ‘야! 인간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이렇게 퇴락, 쇠락해만 갈 수 있니?’ 해서 ‘올라가자’ 자정(自淨)운동을 하는 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그런데 성도만 여기에서,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네요. 내가 뱀 맞네요.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되는 거 맞네요.’ 요 자리에서 고백한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떨어지면 죽으니까. ‘하느님 내 손 잡아 주세요!’ 할 때, 십자가가 내려오는 거예요. 세상은? 그까짓 거. 조금 30cm 1m, 올라가고, 여기 법정, 여기 간디. 여기 있는 거예요. 결국 여기예요. 그런데 뭘 대단히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그러다가, 이 정도면 됐잖아! 왜 내가 뱀이에요? 그러다가 뚝 떨어지는 거예요. 요걸 지옥이라 그래요. 여러분, 여기에서 이렇게 거슬러서, 역사를 거슬러, 우리 인간의 자존심을 챙기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유토피아를 만들겠다. 요걸 불교(佛敎)라 그래요. 여러분 혹시 그거 아세요.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존경할만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이치를 자재(自在)롭게 보고, 모든 소리를 지혜(智慧)롭게 들어, 훌륭한 성자(聖者), 보살(菩薩)이 되어, 널리 중생(衆生)을 이롭게 하고, 다른 이들도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 이것을 한문으로 하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에요. 그게. 보살이라는 게 원래 성자를 의미하는 거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불교는 부처가 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그거 자체가 미래에 되고 싶은 ‘나’인 거예요. 그래서 ‘관세음보살’하면, 이 세상에서 훌륭하고 성숙한, 깨달음을 얻은 보살이 되어서,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유익을 끼쳐, 내가 다음 생(生), 혹은 브라만으로 합일이 되어, 해탈하겠다는 게, 불교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건강한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뭘 가르치느냐 하면, 고 지점에서 그냥 스톱인 거예요. 훌륭한 사람이 되자. 인간다운 사람이 되자. 성도다운 삶을 살자. 그리하여 세상에게 영향력도 미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정도라는 것을 보여주자는 거예요. 세상은, 예수를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 믿는 자를 어떻게 알아 봐요? 무슨 영향을 미치느냐고요? 어떤 영향을 미칠 거냐고요? 세상이 예수를 모르는데, 예수 믿는 자의 삶은 예수의 삶이라면서요? 그런데 예수의 삶을 세상이 어떻게 보고 영향을 받는다는 거요? 도대체가. 그러니까 강론대에서는 계속,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마하바라밀다’ 마하는 절대자, 반야는 지혜. 깨달음을 얻어 신이 되어 바라밀다, 극락으로 넘어 가자. 그거 아닙니까?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다. 그러면 여기서는 또 사제가 그래요. 성불하세요. 이거잖아요. 아뇨? 똑같잖아요? 자 보세요.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어디서 그려져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뱀의 이야기, 여자의 이야기예요. ‘선악과 따먹고 네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네가 하느님처럼 되어라.’ 이게 ‘관세음보살’이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의기도문을 외워도, 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도신경을 외워도, 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제 귀에는 그렇게 들려요. 복음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외우는 주님의기도문, 사도신경이 주문이지 뭡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예수교가 다른 종교와 똑같은 지점을 향해서 고작 인간의 성숙, 변화, 세상을 정화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이게 목적이 되니까,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의 목사가, 동국대 불교대학에 가서 뭐라 그랬어요. ‘어차피 불교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목적지는 같은 거니까, 우리는 형제다. 그래서 기립박수를 쳤어요. 중들이 일어나서요. 제가 그 원문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는 어차피 목적지가 같으므로 나는 은퇴하면, 종교통합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랬어요. 종교가 어떻게 통합이 되냐고요? (우리 프란치스토 교황께서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세계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그랬습니다. 2020년에요) 세상, 천하 만민에게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얻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이 시대의 종교들은 아니라는 거예요? ‘관세음보살, 마하반야바라밀다’로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 종교가 모여서, 원불교, 천주교, 기독교, 감리교, 불교, 다 모여서, 성가대를 만들어요. 한 번은 힌두교인이 설교하고, 한 번은 불교 중이 설법을 하고, 한 번은 사제가 나와 강론하고 한 번은 목사가 설교하고, 그런데 똑같아. 성숙하여 깨끗이 잘 살아 좋은 세상 만들자! 그러니까 성탄절에, 절에 현수막이 걸리죠. ‘예수님 오심을 축하합니다.’ 왜 그 사람들이 축하해야 돼요? 예수님 오심을. (하하하) 사월 초파일날 교회가 왜 ‘부처님 오심을 감축하나이다.’를 써야 되느냐고요? 연등도 달아줘요. 교회가요. 뭐하는 짓이냐고요.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리스도교 외에 모든 종교가 자력종교이지만, 예수교만은 타력종교예요. 예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 우린 존재일 수조차 없는 거예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를 본받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그러니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멸망합니다. 묵시록 꼭 보세요. 다음에 시간이 허락하면 다니엘서, 요한묵시록 해설을 올려 보이겠습니다. 부족하지만 한가지라도 건지시기를 희망합니다. 평신도주일 행복하세요~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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