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침묵 마지막 일곱째 봉인을 열면서 어좌에 계신 분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는 읽어야 할 글로서 제 역할을 마감한다. 이젠 침묵의 시간을 맞닥뜨린다. 반 시간의 침묵은 지금껏 펼쳐진 모든 장면들을 조용히 움츠리게 한다. 마치 폭풍 전야와 같다. 새로운 무엇이 등장할 것 같은 설레임과 혹여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반 시간의 침묵을 긴장 속으로 밀어넣는다.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린 후, 묵시록의 이야기는 어린양에게 집중되어 흘러갔다. 현실의 고통과 죽음, 그 뒤에 펼쳐지는 우주의 혼돈과 외침, 그리고 급기야 나타난 십사만 사천의 무리. 이 모든 장면들은 어린양의 피로 상징되는 구원을 향해 쉼없이 내달렸다. 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쪽 손에 들린 그 책은 적확히 어린양 예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반 시간의 침묵은 또다시 어좌에 앉으신 이가 머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하늘은 끝끝내 다다른 완성의 공간이 아니다. 하늘은 침묵과 더불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야만 하는 시작의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침묵’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스바 1,7; 즈카 2,17; 시편 76,9 참조) 불행히도 묵시 8장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날의 현상은 매우 폭력적이다. 땅이 타버리고 바다가 피로 물들고 별들이 떨어지고…. 무엇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절단나고 피범벅되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요한 묵시록의 심판은 파멸 그 자체로 인식되었고 수많은 예술 작품 속에서도 묵시록이란 말마디는 세상 끝날의 무서운 재앙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스운 건, 그런 섬뜩한 심판을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판을 스펙터클하게 그려 놓을수록 심판으로부터 어떻게든 멀어지려 하는 게 사람들의 심정이기도 하니까. 심판을 폭력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대부분의 해석 앞에 우리는 묵시 8,2-5까지의 천상 전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천상의 전례가 심판이 시작되기 전 펼쳐지고 있다. 묵시 6장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세상의 희로애락의 시작이 하얀 말, 그러니까 천상의 영광과 기쁨의 상징체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묵시 8장의 시작과 겹쳐져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급히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심판은 천상의 영광과 기쁨, 혹은 구원과 어떤 식으로라도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 심판은 천상에서 완성된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구원의 자리에서 징벌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은 파괴와 멸망으로서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초대 혹은 구원에로의 채찍질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여 멸망시키기 위해 당신 아들 예수를 보내시지 않았다.(요한 3,17) 요한 묵시록의 징벌은 구원에로의 길잡이며 구원을 향한 외침과 같다. 왜 그런가? 처음 네 개의 나팔은 우주의 혼돈을 불러 온다. 땅과 바다와 강물,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의 혼돈이다. 이 혼돈은 징벌이나 심판의 무자비함을 상징하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창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유인즉, ‘삼분의 일’로 혼돈의 영향력은 제한되고 혼돈은 탈출기의 재앙과 흡사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박이 떨어지는 건 탈출 9,24-25와 닮았고, 물이 피가 되는 건 탈출 7,20-21과 닮았다. 천체의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건 탈출 10,21-23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쓴물이 된다는 건 탈출 15,23-25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탈출기의 재앙들은 파라오의 완고함에 대한 해방과 자유를 지향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광야에로 나아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탈출기의 재앙들은 필요했다. 세상에 징벌을 내리고자 요한 묵시록의 나팔은 울려 퍼지는 게 아니다. 나팔은 천상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고 구원의 자리인 천상에서 이 지상의 완고함과 폐쇄성을 향해 구원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지상의 ‘삼분의 일’에 대한 징벌은 이 땅이 하늘의 구원에로 향해야 한다는 확고한 표징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탈출기의 재앙을 다시 소환하는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제 삶의 자리가 어디든, 그 자리의 본디 의미와 가치를 하늘로부터 되새기는 게 재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 세상의 바쁜 삶 속에서 제 모습을 잃어버린 이들의 “인정투쟁”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재앙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힘든 건, 제 노력의 부족이나 능력의 상대적 부재 때문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사회적 관계 안에서 짓눌린 억압 때문이 아닐까.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는 인정투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정투쟁으로 전개되는 사회투쟁은 단순히 자기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과는 다르다. 인정투쟁의 촉발 요인이 자기 존엄에 대한 부정이기에, 인정투쟁은 제로섬 게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무시를 통해 부정당했던 자기 존중을 되찾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정투쟁은 단순히 심리학적인 공격적 행동도,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행동도 아니라, 약화된 자기 존중을 회복하여 자기를 치유하는 동시에 무시라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회를 치유하는 도덕적 행동이다. 이 치유의 과정이 인정투쟁의 도덕적 역할이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19, 210-211) 제 욕심을 찾아 나서고, 스스로 바라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디 제 모습과 제 가치를 되새겨 보는 것이 인정투쟁이어야 한다. 모두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회에서 경쟁은 오히려 자기 상실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도무지 견뎌 낼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주어졌을 때, 오히려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질문 앞에 쓰러질 때, 그때 나는 비로소 나를 인정하는 빈자리를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 묵시 8장에서 시작하는 심판의 재앙들을 이해하는 데 ‘인정투쟁’의 거룩한 전투와 고통에 대해 묵상해 보는 건 필요한 일이다. 저 옛날 파라오의 억압 아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히브리 민족의 고통이 광야를 향하는, 하느님을 향하는 발걸음으로 이어지는 ‘인정 투쟁’, 거기서 거룩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요한 묵시록을 무시무시한 심판의 책으로 이해하기에 딱 좋은 것이 재앙들의 묘사이지만, 심판보다는 애틋한 하느님의 초대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디 나를 찾으라는 초대, 힘들고 무너지더라도 그건 끝이 아니라 제 모습을 회복하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초대, 그 초대를 아프고 눈물겹게 받아들일 때, 요한 묵시록의 재앙이 왜 천상의 나팔 소리에서 시작한 것인지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더 시끄럽고 더 불타고 더 어두워지더라도 요한 묵시록을 읽고 새기고 실천하는 신앙인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간절히 기다리며 조용한 침묵 속에 제 모습을 차근차근 회복해 나갈 것이다. 우리에겐 ‘반 시간’이 주어져 있다. [월간 빛, 2024년 11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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