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 묵상글 참조[연중 제5주간 목요일/마르 7,24-30]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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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2-09 | 조회수537 | 추천수0 | 신고 |
■ 믿음만큼이나 은총이 / 연중 제5주간 목요일(마르 7,24-30)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북쪽과 경계가 맞닿은 지역인 티로에 가셨는데, 그곳 주민은 혼합 민족으로 주로 이방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때에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에 와서 엎드렸다. 그녀는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이교도로,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시길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녀를 배불리 먹여야지, 그들 빵을 강아지들께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이르셨다. 그러자 그녀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의 강아지들도 그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이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딸에게서 나갔다.” 그녀가 집에 가니, 아이는 침상에 있었고, 마귀는 떠나가고 없었다.
동물 중에 우리와 가까운 게 개일 게다. 애완견을 키우는 가정에서는 개를 마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가족의 일원이라고 여긴다. 그러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지만, 사람에게 개 취급을 하거나 개로 비유하면 굉장히 큰 실례가 되는 욕이다. 유다인들은 식사가 끝나면 빵 부스러기로 손을 비벼 닦는 습관이 있었다. 그때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가끔 식탁 아래의 강아지 차지였다나. ‘자녀들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아!’ 마귀 들린 딸을 구해 주십사는 이 여인의 호소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을 개로 비유하시다니! 어쩜 이건 예수님답지 않은 것 같다. 상대에겐 뼈아픈 말일 수 있는 느낌이기에. 시리아 페니키아 지방은 갈릴래아에 인접한 지중해의 해안 지대에 있다. 옛날에는 가나안 지방이라고도 불렸단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그들을 개라고 부를 정도로 멸시하였다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에게 강아지 취급을 하듯 말씀을 하신다.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신 분께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는 그녀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사실 이방인을 강아지로 표현한 것 자체가 유다인들의 오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의도는 여인이 지닌 믿음을 드러나게 하시려는 뜻도. 이에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을 감동시킨다. 그녀의 그 믿음은 재치가 아닌, 평소 답변으로 즉석에서 나왔다. 이교도를 믿는 여인이 이방인 남자인 예수님을 소문으로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믿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로잡은 건 여인의 믿음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말투에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확인했을 수도. ‘제발 제 딸만 구해 주세요. 개가 아니라 쥐라고 부른들 상관없어요!’ 모성애는 위대하다. 믿음은 어떤 처지이든 간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의 확증이다. 믿음으로 굳세어지면, 그 어떤 상처와 모욕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게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노렸던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처럼 믿음이 확고한 이는 이 세상 것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단다. 믿음이 깊은 이는 세상에서 받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받기에.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단체에 가입했지만, 오히려 상처를 받는다면 이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두고두고 묵상해야만 하리라. 분명한 것은 그만둔다고 해서, 이미 받은 그 상처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을 테니까. 때로는 마음을 다잡아 그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가야만 한다. 기분 나쁜 소리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크든 작든 상처 따위는 도처에 늘려있다. 성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번잡한 세상에서 뜻하지 않는 상처라도, 신앙과 연관되었다면야 기도와 묵상으로 참아야만 한다. 그러다보면 티로의 그 이교도 여인마냥, 성령으로 주어질 보답마냥 은총을 받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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