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9보충] 청소년 문화 속의 악마주의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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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충렬 | 작성일1999-05-15 | 조회수4,087 | 추천수0 | 신고 |
음악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TV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악마주의’내지 ‘사탄주의’가 젊은이들 사이에 새로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사탄은 대중매체를 이용해 폭력과 살인, 성적 방종과 퇴폐, 무속과 점성술 등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유행으로 그칠 것이라 하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세기말적인 불안을 배경으로 한 심리적 공황의 표출 현상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사탄주의’, 일명 ‘악마주의’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서상으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고 설명되고 있는지를 보며 우리의 이해를 넓혀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과 인간의 적,반대자 성서에서 악마 또는 사탄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로 활동하면서 그 영향력을 다른 존재에게 끼치거나 또는 다른 존재를 유혹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의 적, 반대자, 중상자, 비방자 라는 뜻을 지닌다. 구약성서 작가들은 악령이나 천사들의 존재와 활동을 긍정하면서도 이들의 실체 및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랜동안 다소 막연한 개념을 가졌다. 사용된 표현들은 평범하고도 상투적인 당시의 민담을 이용하여 야음의 여귀신(이사34, 14), 털이 복술복술한 들귀신(이사13, 21:34, 13)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조주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즉 마귀를 향하여 시선을 돌리고 사람을 잡아 바치기까지 했을 때(시편106, 37) 성서작가들은 그들을 꾸짖는다. 그리고 마귀들이 하느님에 대항하여 모독적인 반란을 일으켰다는 등의 이야기로 그런 사건을 설명한다(이사14, 13-14:에제8, 2). 구약성서 첫 장에서부터 악마는 뱀으로 형상화되어 등장하는데 그의 첫 출현이 인류의 원수로 묘사된다. 뱀은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하며, 거대한 유혹자이며 인간의 행복을 시기하는 세력으로, 살인자이며 거짓말장이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지혜서는 그의 본성에 합당한 이름을 지어 ‘악마’라고 했다.
사탄을 추방하는 예수님 인간의 구원, 즉 인간의 행복을 궁극목표로 삼는 예수의 생애와 활동 또한 많은 부분 몸소 사탄과 대결하고 사탄을 쫓아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병을 사탄으로 대했고, 완쾌를 베품으로 사탄을 격파한다.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치유된 사람, 게라사의 사람, 벙어리 악령에 들린 자, 막달라 마리아 등의 사람들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가 예수에 의해서 해방된 이들이다. 이렇게 예수는 세상의 주인인양 행세하던 악의 세력을 멸망시킨다. 예수 앞에서 마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군중은 그 권위 때문에 놀란다. 제자들을 파견할 때 마귀를 쫓아낼 권한을 주신다. 그런데 제자들을 기다리는 악마는 예수가 맞섰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예컨데 마술과 온갖 미신과 점귀신, 마귀를 숭배하고 사람들을 그들의 제단으로 초대하는 우상숭배, 그릇된 지혜, 항상 사람을 속이고 현혹시키는 온갖 악마적 교서, 그리고 괴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협잡꾼 등이 제자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성서에서는 ‘악마’, ‘사탄’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자, 하느님에게 대항하는 자,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하는 자, 유혹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 인간의 행복을 시기하는 자, 생명을 파괴하고 성장을 방해하는 자로 보고 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악마의 모습 사도들로부터 계승된 교회는 매 순간 깨어 있으면서 그 백성들 가운데로 파고드는 악마와 맞서 대응하는 노력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악마에 대하여 ‘인간을 작게 만들고 인간의 완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정의하며(사목헌장 13), 하느님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절대적으로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사탄이 시대와 사람의 의식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새로운 양상을 띠고 활동한다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전 속도에 비해 정신적 빈곤을 체험하는 현대에는 이러한 악마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다고 보여진다. 오랜기간 동안 역사를 지배해 온 이성주의 또는 합리주의적 서구사상에 싫증을 느낀 젊은이들에게 뭔가 신비롭고도 기존의 윤리·사회 체계를 넘어설 것 같은 자유분방한 그러나 허구로 가득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타락으로 유혹하는 뉴에이지 운동 같은 것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드러내놓고 악마의 교리를 전파한다는 이른바 ‘사탄교회’같은 것이 실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 등을 통해서 여과없이 우리의 안방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에 몰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사탄음악이라 불리는 ‘데스메탈’ 음악을 좋아하고 폭력영화 등을 즐기는 이유는 파괴적인 음악이나 장면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기 때문이라 한다. 깨고 부수는 듯한 음악소리와 함께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서 단순히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지난날 사탄주의가 등장 할 때마다 악마가 기성체계에 저항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채용되었듯이 파괴적인 체험에서 대리만족을 얻고 그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는 의식, 기성체계이든 그 어떤 것이든 부수고 깨고 싶은 무언의 저항의식 내지는 반항의식의 이면에는 참다운 자기성장을 방해하는 악마적 파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대중매체를 통하여 번지며 청소년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오늘날 악마의 세력은 새로운 형태이긴하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생명을 파괴하고 성장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성서시대나 그 어느 때와 다르지 않다.
악마를 물리치는 ‘빠라끌레또스’ 악마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한 말씀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격파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으며, 계속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성령의 능력뿐이다. 성령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니다. 불리한 입장에 놓인 자를 돕는 ‘변호인,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남을 위해 나타난 자’라는 뜻으로 성령을 ‘빠라끌레또스’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길 원하는 우리 모두는 악마의 유혹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위한 ‘빠라끌레또스’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관용과 용서, 희망을 회복시켜주는 노력이야말로 악마를 쫓는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 될 것이다.
<살레시오 가족지, 1998년 1월(28호), 청소년 문화 속의 악마주의에서 따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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