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입니다.
성서와함께가 주로 답하고는 있지만,
여러분의 참여를 환영하며, 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허규 님이 잘 지적해 주셨듯이,
유대인들은 아직도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지 못합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날은 일 년에 딱 하루, 대속죄일뿐이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혼자서요.
허규 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발음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은 두려운 분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여기에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 때문이라는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하느님을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지요.
이는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한 번 소리내어 말해 보십시오.
"하느님!"
내 입으로 발해진 하느님,
내가 체험한 하느님일 뿐입니다.
그런데 입 밖으로 하느님을 소리내는 순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그 소리에 하느님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 우리는 그분을 체험하지만,
우리의 체험에 갇히지 않으시는 분,
우리의 고백에도 갇히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많은 경우, 우리의 체험과 고백이
그분을 가두곤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갇히는 꼴이지요.
유대인들은 이런 인간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체험에 갇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회도 하느님을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성령의 궁전이지만,
한편, 우리 자신과 교회와 성서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칼 라너가 그랬나요?
"인간은 신의 암호"라고요.
이를 다른 말로,
'인간(교회, 성서)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신상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이라고 하는 그 크신 분을
인간이 다 담을 수 없다는 경외심의 표현이
하느님을 인간의 입에 담을 수 없다는 신앙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라는 말 대신
하늘나라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마태오가 늘 하늘나라라고만 하지는 않았어요.
하느님(의) 나라(6,33; 12,28; 19,24; 21,31.43),
아버지의 나라(6,10; 13,43; 26,29),
나라(4,8; 13,19; 19,38 등)라고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