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나타나셨던 모세나 엘리야는
모두 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은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것임을 시사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나 수난에 관한 첫 번째 예고와 두 번째 예고 사이에 언급됨으로써,
수난이야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수난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받으리라는 것을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넌지시 드러냅니다.
그리고 모세는 ’율법’을 하느님으로부터 전수받은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런 모세가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의 언행이 율법에 비추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언행은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했던
예언의 전통에 서있음을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죠.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모압 평원에서 죽음으로써 죽은 자들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불마차를 타고 승천함으로써 마지막 날까지 살아 있을 사람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합니다(1데살 4,15-17).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산이와 죽은이를 모두 아우르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분이서 나누셨던 대화는
아무래도 예수님이 앞으로 겪으실 수난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땅에다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져
수많은 학자들이 이런 저런 제안을 많이 했지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불가타 성서를 만든 예로니모 성인은 예수께서
이 여자를 고발한 사람들의 죄상을 땅에 쓰셨다고 상상력을 펼쳐보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행동이 "야훼를 저버리고 어느 누가 땅에 쓴 글씨처럼
지워지지 않겠습니까?"는 예레미야서 17장 13절의 내용을 떠올려, 간음한 여인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똑같은 형편임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는 그 이상의 내용은 전해 주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사가 역시 예수께서 땅에다 ’무엇인가’를 썼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내용을 모르는 듯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취함으로써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고발하는 말을 일체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당대 유다인 율법학자들도 자신에게 묻는 미묘한 물음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하고 싶을 때에는 땅에다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 행동으로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의사를 드러내셨던 것이죠.
자세한 내용은 <나오너라>(최안나, 요한복음 해설서, 성서와함께)
284-5쪽을 참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