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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착한 사마리아사람 이야기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이재훈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23 조회수1,262 추천수0 신고

안녕하세요?

 

아래 내용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 구원에 이르는 고통 - 중에서 관련 부분 입니다.

참고하시기를..

 

VII. 착한 사마리아 사람


    28. 역시 고통의 복음에 유기적으로 속해있는 것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90)라는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발가벗기고 두들겨 맞아 반쯤 죽어 누워있는 사람을 본 그 길의 세 행인 중에서,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그 피해자의 진짜 “이웃”임이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웃”이란 또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사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면서도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한 사람은 제관이었고 또 한 사람은 레위였는데도, 둘 다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 가버렸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어주고는……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해주었다.”91) 그리고 여관을 떠날 때에는 자상하게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 고통 중의 인간을 여관 주인에게 돌보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비용은 얼마가 들든지 자기가 다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고통의 복음에 속합니다. 그것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적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곁에 “멈추어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곁에 멈추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멈추어섬이란 호기심의 발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익한 행동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내적인 마음가짐의 개방과 같은 것이며, 그 나름의 어떤 감정 표현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한 개인 누구나에게 적중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잘 알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 자비심을 강조하고 계시다면, 이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태도 일체에서 이 자비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중의 인간에 대한 자비심의 증거가 되는 이 마음의 민감성을 길러야 합니다. 때로는 이 자비심이라는 것이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연대성을 단순히 또는 원칙적으로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비유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저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멈추어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동정심과 자비심이 상처 입은 그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행동의 자극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결국,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고통 속에서 도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입니다. 어떤 성질의 고통이든 간에 될 수 있는 대로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거기에 자기 온 마음을 쏟아 넣으며 물질적인 수단도 아끼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자신을, 바로 “나”를 준다고, 이 “나”를 타인에게 열어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교적 인간론의 관건이 되는 요점의 하나에 접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92)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바로 그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29. 복음의 비유에 따라 우리는 능히 말할 수 있거니와, 우리네 인간 세계에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고통은 또한 인간 안에 있는 사랑을 방출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는 몰아적인 선물을 내어주기 위하여 존재하기도 합니다.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이를테면 다른 세계를, 곧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 덕분에 인간은 마음과 행동을 자극하는 몰아적인 사랑을 얻게 됩니다. 하나의 “이웃”인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도 무관심하게 지나쳐 가버릴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연대성이라는 명분상 그럴 수는 없을 뿐더러, 하물며 이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야 더욱 그럴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멈추어서야”하며 “동정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비유는 그 자체로 깊은 그리스도교적 진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인간적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일상의 언어에서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일반적으로 일컬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 활동은 조직화된 제도적 형태들을 취해 왔으며, 전문적으로 세분화된 하나의 사업 분야를 이루어왔습니다. 의사나 간호원이나 그 밖의 비슷한 전문 직업상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복음적”인 내용을 생각할 때,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하나의 직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세세대대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봉사활동을 수행해온 제도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와서는 훨씬 더 발전되고 전문화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점점 더 관대하고 더 세심하게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며 점점 더 훌륭한 기술로써 그 고통을 다스리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수용 능력도 전문 지식도 점점 더 커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점을 두고 볼 때 우리는 능히 말할 수 있거니와,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정신문화와 보편적 인간 문명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지식과 능력에 의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갖가지 봉사를 제공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와 치하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중의 이웃에게 대한 자기 나름의 봉사를 몰아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원호활동에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기네 직업 밖에서 자기네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이 일에 바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자발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활동, 즉 자선활동은 사회사업이라고 부를 수 있거니와, 이것이 뚜렷이 복음적인 동기에서 수행될 때에는, 특히 교회나 그 밖에 그리스도교 단체와 연결되어있을 경우에는 또한 하나의 사도직 수행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자발적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은 적절한 환경에서 또는 이 목적을 위하여 창설된 “기구”를 통하여 수행됩니다. 기구를 통한 활동은, 특히 그것이 협동과 기술적 수단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비교적 대규모의 과업을 내포하고 있을 경우에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활동도, 특히 인간 고통의 종류에 따라서는 개인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그 고통을 덜어줄 수밖에 없는 경우에 그런 일을 위하여 더 잘 준비되어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런 일이 수행된다면, 이 또한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일입니다. 끝으로, 가정을 돕는 일은 같은 가족끼리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과 가정들 상호간의 협력을 모두 다 포함합니다.

    교회와 사회에 존재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사업의 모든 형태와 갖가지 환경을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뭏든 우리는 이들이 숫자적으로 매우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또 이들 덕분에 인간적 연대성이라는 가치나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이라는 가치와 같은 기본적인 정신 가치들이 사회생활과 인간 상호관계의 뼈대를 이루어 타인에 대한 온갖 형태의 증오, 폭력, 잔혹, 멸시 또는 “무감각”과 대결해서, 다시 말해서 자기 이웃과 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대결해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함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에 있어서 올바른 자세를 가진다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대목에 이르게 됩니다. 가정과 학교와 그 밖의 교육기관들은 적어도 인도적인 이유에서만이라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모습이 한 상징이 되어있는 그런, 이웃과 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일깨워주고 가꾸어주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도 같은 일을 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교회야말로 더욱더 깊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비유에서 또 복음 전체에서 제시하신 동기들을 최대한으로 교회 자신의 동기로 삼아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또 복음 전체가 말해주고 있는 웅변이란 특히 이것입니다. 즉, 모든 개인 각자가 고통 속에서 사랑을 증거하도록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도들은 매우 중요하며 필요 불가결합니다. 그러나 어느 제도라도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 문제일 때에 제도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 인간의 자비심, 인간의 사랑 또는 인간의 자발성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적 고통이 문제일 때에도 그러할 뿐더러, 갖가지 정신적 고통이 문제일 때에도 또 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영혼일 때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30.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고통의 복음에 속해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과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줄곧 이 복음과 더불어 손잡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고통의 구원적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가 “결코 수동성이라는 자세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거꾸로가 진실입니다. 복음은 고통 앞에서 수동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이 분야에서야말로 특별히 능동적이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93)라는 예언자의 말씀대로 당신 사명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습니다. 넘치게 풍요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사명의 이 구원 계획을 수행하시었습니다. 즉,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94) 그래서 당신이 하시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 특히 인간의 고통 앞에서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리스도 자신의 행동과 깊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 비유는 그 본질적인 내용을 통하여 저 최후 심판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흔들어놓는 이 말씀을 마태오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95) 이 모든 일을 자기들이 언제 당신께 해드렸더냐고 묻는 의인들에게 사람의 아들께서는 대답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96) 달리 행동한 사람들에게는 이와 반대되는 선고가 내려질 것입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97)


    인간적인 민감성과 자비심과 도움을 만나게 되었거나 또는 그렇게 되지 못한 고통의 여러 가지 형태들을 물론 더 부연해서 열거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든, 최후 심판에 관한 그리스도 말씀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이 조금도 애매한 데가 없이 명시해주고 있거니와 개인 누구에게나 그가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 이웃의 고통을 보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멈추어 서서” 그 고통에 대하여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계획이거니와, 이 설계에 있어서 고통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은 사랑을 방출하기 위함이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일들을 탄생시키기 위함이며 인간의 문명 전체를 “사랑의 문명”으로 변형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완전히 성취되며 그 결정적인 차원에 이르게 됩니다. 최후 심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극명한 복음 안에서 이것을 능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사랑의 활동들에 관한, 인간 고통과 결부된 행동들에 관한 이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고통의 밑바탕에서 똑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가 그것을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각개인 안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 그 사람이십니다.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고통 중의 인간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도움이 주어질 때 이 도움을 받고 있는 그 사람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적 고통이 일단 결정적으로 모든 인간 고통을 향하여 열리어있는 이상,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 고통 중의 인간 안에 현존하여계십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이 일단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98) 사람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는 마치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써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도록”99) 부르심을 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일거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고통에 의하여 좋은 일을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 양면에서 그분은 고통의 의미를 완전히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90. 루가 10,29.

91. 루가 10,33-34.

92.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24항.

93. 루가 4,18-19; 이사 61,1-2 참조.

94. 사도 10,38.

95. 마태 25,34-36.

96. 마태 25,40.

97. 마태 25,45.

98. 1베드 4,13.

99. 골로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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