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시다 (1)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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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선 | 작성일2006-12-15 | 조회수857 | 추천수0 | 신고 |
성모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시다 (1) | 마리아신학 2004.10.18 18:54 대건(daegun78) http://cafe.naver.com/cakorea/38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소위 성서대로만을 외치는 ’바이블 크리스찬’들에게서 나타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의구심과 모독하는 언행이야말로 가톨릭 신앙에 대한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는 일 외에는 다름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해 오고 있었으나 ’천주교 묻고 답하기’란의 많은 질문들 가운데 물론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제기된 것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개신교인들로부터 공격당하는 주된 이슈인 성모 공경과 성서에 성모에 대한 공경의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실제로 동정이었는가 하는 질문들이라는 점 그리고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프로테스탄트인 사람들에게는 꽤나 신선하고 새로운 의문점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2천년의 가톨릭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 의해 정리되고 일단락 지어진 구태스러운 질문이요 지적일 따름인 것을 미리 말해둡니다. 지금에 와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신지식 같아 보이는 성모에 대한 편견과 의심들이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판가름 난 문제라는 것을 아래의 글이 밝혀줄 것입니다. 마리아의 혼인과 평생 동정 성모의 잉태가 성령에 의한 것임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녀가 평생 동정이었다는 것도 초대 교회부터 연면히 내려오는 정통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신앙이 한국 천주교회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누구나 한두 번씩은 주위에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왜 성모상을 모시고 있느냐? 너희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성모 마리아인 것이 아니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왜 그리 자주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하느냐?"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당황해하는 천주교 신자가 의외로 많은 것 또한 현실이고 어떤 경우에는 신자들 스스로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종교라고 오해받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서 주위의 그런 잘못된 인식을 오히려 인정하는 것처럼 비취지는 것 또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성모 공경과 성모 마리아의 동정에 대한 저들의 근거 없는 비방과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확고한 신앙을 위해서도 성모 마리아의 동정이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그리고 용감하게 성서만을 외치는 ’바이블 크리스찬’의 주장이 과연 보편타당한 논리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모의 성령에 의한 잉태와 평생 동정은 전거(典據)에 비추어 보면,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110년경 로마에서 순교)가 마리아는 참어머니임을 강조함과 동시에(에페 7, 2) 강경하게 그 동정도 주장한 것(에페 18, 2; 스미르나인에게 보낸 서한 서두 - 동(同) 서간에서 가톨릭교회(Ecclesia Catholica)라는 명문 최초 사용)에서 시작하여 유스티누스(165년경 순교), 성 이레네오(202년경 서거), 오리게네스(255년 서거)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 초대 교부들의 한결같은 증언 일치를 깬 유일한 소리는 유명한 테르툴리아누스의 재혼 반대(De monogamia) 중 Virum passam 이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저술한 213년경 전부터 몬타누스 이단에 몸을 던지고 있었으므로 공적으로 정통 교회에서 떠난 그 말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에 말한 교부들이 마리아와 요셉의 혼인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동정을 지키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오누이처럼 하느님의 아들 양육에 힘썼다는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불가사의한 혼인의 이유로서 천주교 요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남편 없는 임신녀에게 돌을 던져 죽이도록 명하였습니다. 요셉 없는 마리아의 입장은 극히 위태로운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부인의 독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대 민족 사회에서는 마리아 혼자 힘으로 예수를 기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든 이유 외에 마리아가 단지 동정인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내였다는 것은 현대와 같이 가족 제도가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성모신앙의 도덕적 의의를 한층 더 깊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톨릭교회는 이 시대의 위기와 요구에 비추어 보아 매년 주의 공현(公現) 후 제 1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정하고 전 세계 교회가 축제를 가지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요셉과 예수로 이루어진 성가정 속에 모든 사람이 그 경우에 따라 사표(師表)를 발견하고, 도덕적 질서가 어지러워진 시대에 인류의 근본의의를 확보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아버지나 어머니나 남편이나 아내나 처녀나 청년도 나자렛의 단란함에서 그 생활 모범을 구하고 그러함으로써 이 불가사의한 성가정을 지상에 출현케 하신 하느님의 원대한 섭리의 한 새로운 의의가 여기서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관련되어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제기되곤 하는 또 다른 의문은 요셉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마리아의 지위 확립은 동시에 요셉의 위치도 정확히 정하는 것이 됩니다. 요셉이 마리아의 남편이면서 예수의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 그의 지위를 끌어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성 요셉을 성모의 정배(淨配) 그리고 예수의 양부로 하여 하느님의 모친과 하느님의 아들에 대하여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지닌 비할 데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여 특수한 관계입니다. 나자렛에서 성가정의 보호자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으로 뽑힌 모든 시대의 신자로부터 성립된 세계의 가정, 즉 성교회의 수호자로서 또한 모든 동정자의 수호성인으로서 시대가 갈수록 의인(義人) 요셉의 지위는 가톨릭교회의 신심 생활에서 점점 높아져 왔습니다. 몇몇 교부들이 복음서에 이르바 "예수의 형제 자매"라는 말을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모순시키지 않기 위하여 위(僞) 복음서의 논설을 채용하여 요셉의 전처의 자식이라고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무리하게 맞추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성 예로니모(희랍어 성서 70인역을 바탕으로 현재 가톨릭교회의 성서를 편찬 정리한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이며 언어학자. 420년 서거)의 시대에도 요셉의 평생 동정은 교회 일반에 인정된 신앙이었음은 이 유명한 성서학자가 이 신앙을 부정한 같은 시대의 학자 헬비디우스(Helvidius)의 설에 대하여 "위(僞) 복음서의 망상(De irramentum apocripharum Comment. in Matth., XII)" 이라고 혹평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도 명백합니다. 성 요셉의 평생 동정은 오늘날에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신조는 아니나 존경하여야 할 일반 신앙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서만을 외치는 용감한 프로테스탄트는 말합니다. 로마 교회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에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서 요셉까지도 평생 동정으로 치켜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전(聖傳)과 일체의 관계를 끊은 사람들이 한 말로는 일단 수긍이 가지만 가톨릭교회는 요셉의 평생 동정에 관해서도 다른 모든 신앙에서처럼 아무런 새로운 교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올바른 성전(聖傳)을 충실히 지켜 그 풍부한 내용을 설명하여 가고 있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성 예로니모의 헬비디우스에 대한 반박론은 서기 383년경의 일이므로 설령 치켜올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늦어도 4세기 전반의 사건이라고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20세기의 사건인 것처럼 떠드는 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의 떳떳하지 못한 역사적 무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세기의 이단자 헬비디우스가 요셉의 동정을 부정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원래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요셉의 동정도 부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인 것입니다. 이들 문제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생에 앞서 이미 1,000여 년 전에 모두 다 논의되어 버렸던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대부분에게는 신지식인 것입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여 복음서에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마태 1, 24-25) 지냈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주의 형제 자매"라는 명문을 도대체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고 힐난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고대 성서학의 제 1인자 예로니모의 adversus Helvidium (헬비디우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문)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시대에 뒤떨어짐"은 반드시 가톨릭 쪽에만 해당되는 형용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이 모든 성인 중에서도 가장 덕망 높은 분으로서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높은 지위 때문에, 그 외에도 보통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특전이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마리아가 모든 하와의 자식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원죄의 더럽혀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장차 그 태중에 잉태되실 구세주의 예견된 공덕(功德)으로 신자가 세례에 의하여 받는 은전을 그녀는 그 존재하는 첫 순간에 받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세례는 원죄를 사함에 끝나고 그 해(害)인 마음의 나쁜 경향이나 결함은 고쳐지지 않으나 이 "티 없는 잉태"에 의하여 마리아는 이러한 불행에서 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선조(先祖)처럼 자기 죄에 의하여 비할 데 없는 은총을 상실함이 없이 평생 죄 없고 더럽힘 없이 은총이 충만한 상태로 머무르셨습니다. 그 생애의 각 순간은 이 은총에 의하여 성화되고 그 조력에 의하여 보다 더 높은 완덕을 향한 연속적 비약이었으므로 모든 성인중에서 최고 성덕에까지 이르심을 가톨릭교회는 믿는 것입니다. 교회는 더욱이 성모가 육체의 부패를 봄이 없이 죽은 후 부활하여 승천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몽소승천 교리는 2000년간 가톨릭교회 내의 일반 신앙으로 즉 성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었으며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교회의 기본 신조로서 정식으로 선언하기 전부터 이 기적을 기념하는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일은 전 세계 신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축일이었음은 과거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처럼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힘과 은총에 의한 것이므로 특히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신앙도 또한 오랜 성전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의 논리상 필연적으로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죽음은 원죄의 결과에서 온 것이며 원죄 없으신 성모가 그리스도처럼 부활 승천하신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관한 가톨릭교회 신앙의 전부는 물론 명백히 신약 성서 중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서 일변도의 크리스찬이 이것을 소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도권에 의하여 보증된 성전(聖傳)과 절연(絶緣)하였기 때문으로 그 생각의 출발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聖傳)을 부정하는 문구는 성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서는 도리어 성전(聖傳)을 예상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음은 성서를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서는 성전(聖傳)의 극히 일부가 어느 시대에 성서라는 것을 통해 글로 나타난 것입니다. 성서에 쓰인 것이 성전의 전부가 아닌 것은 교리 대계(大系)가 아닌 성서의 성질상 알고도 남는 일로서, 걸핏하면 성서대로를 외치는 ’바이블 크리스찬’도 그들의 실행으로 이것을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요일을 안식일로 하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틀림없이 토요일이었던 안식일이 왜 일요일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구약성서 어디를 뒤져봐도 일요일을 안식일로 삼아 지내라는 명문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모에 대한 신심의 확고한 근거는 이미 복음 중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의 탄생 예고의 승낙에 의하여 구세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모이며,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세례자 요한이 어머니 태중에서 뛰어 놀았음도 그녀의 인사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성탄 후 아기를 성전에 바친 것도 그녀의 팔이었으며,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의 첫 기적은 그녀의 부탁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기쁨에 찬 자애로운 어머니를 고통 받는 강한 어머니로서 십자가 아래에서 발견합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최초의 교회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사도 1, 14)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모는 오늘도 그 사랑하는 아들이 세우신 참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저서 ’가톨릭 신앙’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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