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박해시대의 동정부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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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재범 | 작성일2008-09-01 | 조회수984 | 추천수1 | 신고 |
우리 나라 박해시대의 기록에 보면 몇 쌍의 동정부부를 확인하게 된다. 동정부부는 혼인한 뒤에도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고 동정성을 지키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반 상식과 매우 다른 삶을 살았지만, 박해시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삶의 형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동정부부의 존재는 19세기 당시 한국교회의 독특한 영성과, 수도원이 없었던 박해시대의 상황이 낳은 특이한 삶의 양식이었다.
동정부부가 출현하게 된 배경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양식 가운데 독신의 금욕생활을 특히 중시하였다. 이 점은 당시 신자들이 널리 읽던 한글 교리서 등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성경직해광익」에 나오는 삼왕래조(주님 공현 대축일) 후 제2주일 복음묵상에서는 교회의 회중들을 세 가지 품격으로 나누어 평가하고 있다.
곧, 상품으로는 동정을 지키는 사람들을, 중품으로는 과부나 홀아비가 된 다음 다시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하품으로는 지아비와 지어미가 함께 사는 혼인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상품은 금이요, 중품은 은이며, 하품은 구리라고 비유하여 말했다. 이처럼 신자들을 그 삶의 방식에 따라 분명한 서열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등급이 정해진 까닭은 가족 문제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일에만 투신할 수 있는 삶을 동신(童身) 내지는 독신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세계교회사의 전통을 보면 금욕생활을 높게 평가하는 관행이 존속해 온다. 일부 이단사상에서는 혼인제도 자체를 거부하거나 혼인의 가치를 낮추어 평가했다. 예컨대, 서기 2세기경 타티아누스(Tatianus) 일파나 13세기 전후 알비(Albi)파 이단에서도 그리스도교적 금욕의 이상형으로 혼인 금지를 내세우다가 단죄되었다.
한편,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 교회에서는 얀세니즘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엄격한 신앙의 실천을 위한 금욕생활을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던 정적주의 이단에서도 혼인생활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유럽 교회의 일부 비뚤어진 영성이 박해시대 한문교리서나 일부 선교사를 통해서 전래되었다. 여기에서 박해시대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금욕생활을 완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인식하고 동정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영성적 분위기에서 동정부부가 탄생하였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박해시대 우리 나라에서는 공식적인 수도생활의 실천이 불가능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수도생활을 지망하던 일부 신자들은 일종의 ‘위장 혼인’을 통해 동정부부로 지내며 수도자의 삶을 살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동정부부는 19세기 한국교회의 교회사적 특성에 따라 출현한 삶의 한 형태였다.
동정부부의 사례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동정부부로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를 들 수 있다. 유중철은 유항검의 맏아들이다. 이들은 동정으로 살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문모 신부는 혼인이라는 외관 속에 이 두 마음을 결합시켜 그들 서로의 뜻대로 남매처럼 살도록 주선하였다. 이순이가 남긴 한글 편지를 보면 동정부부로 살면서 10여 차례 동정부부 파기의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 뒤 4년 동안 부부가 아닌 남매처럼 지내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동정부부에 관한 또 다른 사례는 유방제 신부의 편지에서 발견된다. 유 신부는 1834년에 입국한 뒤 ‘글라라’라는 신자를 만났다. 글라라는 혼인할 때부터 남편과 함께 평생 동정을 지키기로 약조하고 이를 실천해 오다가, 그의 ‘남편’은 신유박해 때에 주문모 신부와 함께 순교했다. 이 사례에서 교회 창설 초기부터 동정부부들에 관한 사례가 여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도 동정부부이다. 권일신의 딸 권 데레사는 1804년 친척들의 권유로 조숙에게 시집을 갔다. 혼인 첫날밤 권 데레사는 조숙에게 동정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알렸고, 원래 신자였던 조숙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동정부부로 15년 간을 함께 지냈고, 이 부부는 1819년 서울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 15년 동안 그들은 매일 순교해 왔을 것이다.
한편, 박해시대 교회사에서는 혼인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금욕생활로 전환했던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유방제 신부는 ‘민(閔)가’라는 사람이 노년에 아내와 함께 하느님을 알아 정덕을 지키기로 결심하여 고신극기를 실천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황석두도 그의 아내와 별거하면서 절제생활을 하기로 동의했던 사람이다. 이들 이외에 홀아비나 과부가 다시 혼인을 아니하고 금욕생활을 실천한 사례들도 찾아볼 수 있다.
남은 말
우리 교회사에 등장하는 동정부부들은 선교사의 격려를 받으며 자신들이 정한 방법에 따라 동정부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통하여 금과 같은 상품의 신자생활을 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정부부의 관행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결코 이해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또한 이는 서유럽 교회 안에서도 존재할 수 없었던 특이한 삶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를 실천했던 신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터득한 이념적 공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완덕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실험은 주문모 신부가 선교하던 18세기 후반기에 집중적으로 전개되며, 높게 평가받기도 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1857년 사목서한에서 수정(守貞)을 하고자 하는 부부도 사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동정부부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보면, 동정부부의 풍조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 점차 소멸되어 간 듯하다. 이는 주문모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인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
박해시대 신자들의 동정부부 생활은 수도자의 영성에 대한 모방일 수 있다. 당시는 신자들의 영성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일반 신자들은 일등이나 이등의 신분이 아닌 삼등급의 신분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에서는 사회 안에 살면서 누룩처럼 사회를 복음화시켜 나가야 하는 평신도들만의 고유한 영성을 말하고 있다. 이 평신도 영성의 중요성이 성직자나 수도자 영성과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수도생활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수도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원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박해시대 동정부부의 ‘비정상적’ 삶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수행하려 했던 그들의 과감한 결의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깨우침을 재촉하는 죽비가 되어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다.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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