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해설 (naver에서 검색)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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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 작성일2010-11-15 | 조회수418 | 추천수0 | 신고 |
세상과 인간의 창조(1,1-2,4a)
Ⅰ. 이야기의 배경 옛날부터 사람들은 우주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그에 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시해 왔다. 철학적인 사고를 전개하여 결론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학적인 논증과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들어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창조가 여러 신들 간의 투쟁의 산물이라는 다신론적 신화도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창조 이야기는 어떠한 철학적 사고의 결론이나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닐 뿐 아니라 다신론적인 요소도 전혀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출애굽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역사 속에서 체험한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느님의 창조 업적을 찬양하는 찬미가요, 그분에 대한 신앙고백문이다. 이스라엘의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1,1-3,24) 뿐만 아니라 시편(8; 19; 104; 136; 148), 욥기(38장), 잠언(8,22-31), 이사야(40,22.26)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중 창세기에 가장 체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창세기 첫머리에 기술되어 있는 창조 이야기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서로 다른 창조 이야기가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두 가지 창조 이야기의 주제는 같지만 배경과 문체, 서술방식, 기록자 등은 서로 다르다. 문헌 가설에 의하면, 앞의 이야기(1,1-2,4a)는 제관계 문헌에 속하고 뒤의 것(2,4b-3,24)은 야휘스트 문헌에 해당한다. 왜 창세기에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을까? 또 제관계 저자들은 이미 야휘스트의 창조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기록해야 했을까?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제관계 저자들이 처했던 시대 상황을 살펴본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대군은 유다 왕국을 철저하게 파멸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환난 중에 죽었다. 살아 남은 유다의 지도자들과 함께 노동력이 있다고 간주된 유다의 백성들은 거의 다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바빌론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에게는 나라도, 성전도, 그들 고유의 제도마저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절망과 고통만이 남아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시련 앞에서 야훼 하느님의 존재와 의(義)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들의 야훼 신앙은 바빌론의 권력과 종교 및 문화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예레 44,15-19; 에제 20,32). 그와 같은 상황 아래 유배민 공동체의 지도자로 인정된 계층은 제관들이었다. 그들은 우선 조상 전래의 율법과 규정, 전례 등 민족 유산을 올바르게 보존해야 했다. 동시에 그들은 그 암울한 현실에서 자포자기해 가는 유다 백성들에게 새로운 미래에의 희망을 심어 주어야 할 사명의식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 전래의 전승 자료들을 폭넓게 수집하고 재해석하면서, 천지창조로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의 거룩한 역사를 철저한 신학적 반성을 통해 다시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록 과정에서 제관계 저자들은 그들의 관심대상이었던 법전, 계약, 족보, 연대, 사제직 등의 내용들을 중시하였고, 특히 바빌론 유배 이후에 계약의 백성임을 상징하게 된 할례와 안식일을 더욱 강조하였다. 한편 그들은 에집트에서 그들의 조상들을 구해 주신 야훼 하느님이 바빌론에서도 그들을 구해 주시리라는 강한 믿음을 표현하였다. 제관계 저자들은 구원이 비단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민족에게 해당된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게 되면서, 전 인류의 하느님, 모든 이의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구원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은 창조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Ⅱ. 창조 신앙(1,1) 제관계 저자가 쓴 창조 이야기는 우주 창조의 과정이나 방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우주만물이 왜 생겨났으며 어떻게 해야만 세상이 본연의 질서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를 밝히려는 데 있다. 제관계 저자들은 자신들의 유배생활 체험과 이민족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당시의 세계가 본연의 질서에서 크게 벗어나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참다운 신앙과 삶의 자세를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창조 신앙을 통하여 제시하려 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곧 창세기 1장 1절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창조의 서곡이다. 창조 이야기, 나아가 성경 전체의 표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구절은 가장 간결하면서도 가장 장엄하게 기술되어 있다. 제관계 문헌 특유의 서사적 문장인 1절은 다음과 같은 중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1. 한 처음 이 말은 히브리어로 브레쉬트라 표현하는데, 모든 것에 앞서 있는 절대적인 시작을 말한다. 한 처음보다 앞선 상태는 있을 수 없다. 영원하신 하느님이 곧 처음이자 마침이시기 때문이다(묵시 22,12). 여기에서 제관계 저자의 의도는 단지 하늘과 땅의 시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함을 선포하고자 한다. 즉 우주만물은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하느님께 속해 있고 그분께만 의존해야 한다는 신앙고백이다.
2. 하느님(엘로힘) 성서는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책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창세기 1장 1절에서 알려주는 대로 참으로 하느님이 계신다는 진리에 근원을 둔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30번 이상 반복되어 나오고 있는 것은 우주만물과 모든 생명의 기초가 하느님이시라는 신앙의 표현이다. ‘하느님’이란 낱말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고 한다. 엘로힘은 흔히 ‘신’을 가리키는 고대 셈어 ‘엘(El)’의 복수형이다. 성서에서 엘로힘은 복수로도 쓰이나(출애 12,12; 18,11; 20,3 참조), ‘우두머리 신’을 가리키는 단수의 의미로(판관 11,24; 2열왕 1,2) 많이 쓰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2000번 이상- 성서의 엘로힘은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가리키는 복수형 단수명사로 사용되었다. 제관계 저자는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모세에 이르러 비로소 계시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세 이전의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들은 창조 이야기에서 엘로힘이라는 이름을 통해 능력의 하느님이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우주만물과 인간과 ‘나’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내 존재의 기원과 목적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똑바로 알 수 있게 된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무신론, 과학만능, 쾌락추구, 물질주의 등에 둘러싸여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지 않고 살아간다. 또 비인간화와 억압, 소외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본연의 의미와 질서를 깨우쳐 주는 말씀, 절대능력자 하느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지어내시고 보존하신다는 선언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3. 하늘과 땅 여기서는 구체적 의미의 하늘과 땅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다. 서로 대립되는 낱말로 전체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예는 여러 민족 문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예: 중국의 천지․음양, 에집트의 상부․하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말미암아 있다는 말은 만물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작을 가졌다는 뜻이다.
4. 지으셨다 창조라는 말의 어원에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아무런 재료도 없이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창조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바라(bāra'')’는 새롭고도 예외적이며 놀라운 창조를 뜻한다(출애 34,10; 예레 31,22; 시편 51,10 참조). 성서에 47번이나 나오는 동사 ‘바라’의 주어는 언제나 하느님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활동에 한하여서만 사용되는 이 동사는 하느님의 창조 업적 중에서 특히 생명체가 생겨날 때 쓰이며, 인간 창조 때에는 세 번이나 반복된다(1,27). 이 세상 모든 것은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느님,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자신의 뜻으로 만들어 내신 것이다. 또한 창조에 의해서 생겨난 시간과 공간도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바로 이 시공(時空)을 통해서 역사가 시작되고 축복이 이어진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일컬으심과 이름 지어 부르심으로 완성된다. 땅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창조주의 말씀 한 마디로 넉넉했고, 하느님께서 이름 지어 부름으로써 각 창조물의 목표와 용도가 지정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혼돈의 물(1,2)을 가르고 하늘의 천체들과 땅 위의 초목 등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였다(1,3-31). 각 창조물에 맞갖은 이름을 주는 것은 다른 창조물들과 구별짓고 분리시키는 과정이며 모든 실재하는 것들이 계속 이어짐을 의미한다.
Ⅲ. 창조 과정(1,2-25)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과정은 칠 일이라는 정해진 시간의 틀에 따라 설명되고 있다. 또 이 설명은 제관계 저자들이 알고 있었던 고대의 원시적인 우주관이나 팔레스티나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던 창조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늘을 하느님의 궁전으로 보고, 지하를 악신들의 거처로 표현하는 등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제관계 저자가 당시의 신화적인 양식과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신화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음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1. 한 처음의 혼돈 상태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를 묘사하는 2절의 표현은 바빌론 창조 신화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바빌론의 창조 신화인 에누아 엘리쉬에서 신들의 우두머리인 마르둑은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태고의 홍수와 암흑에 싸여 있는 혼돈의 신 티아맛을 물리쳐야만 했다. 이 다신론적 신화에서는 신들 간의 갈등과 모순 상황이 인간 세계에서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반하여 제관계 저자는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느님이 창조하시기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2절에서의 ‘땅’은 1절에서와 같이 ‘하늘’에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깊은 물’과 병행하여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한 혼돈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서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이나 황야를 가리키나, 달리 허무, 무의미, 무가치함을 뜻하기도 하고(1사무 12,21; 이사 40,17; 41,23) 또는 사막이나 광야의 삭막함, 메마름, 비정함, 길이 없음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쓰인다(신명 32,10; 욥기 6,18; 12,24; 시편 107,40 참조). 히브리어로 ‘깊은 물(tehom: 원시 바다)’이라는 단어는 바빌론 신화에 나오는 혼돈의 신 티아맛의 반영이라고도 보나, 성서에서는 큰 물, 심연, 바다 등이 신화화된 적이 없다. 따라서 깊은 물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나일강 등 큰 강이 넘쳤을 때의 모습에서 연유된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서에서 ‘큰 물’은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때로는 축복을 가져다 주며(창세 49,25; 신명 8,7; 33,15; 에제 31,4 참조), 때로는 위협적이고(출애 15,8), 바닥이 드러날 만큼 마르기도 하며(이사 51,10),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한 몫 끼기도 한다(시편 42,8; 148,7). 2절의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 자연적인 어둠이 아니라,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물의 존재에 위협을 주는 어둠이다. 이 어둠은 혼돈의 특징으로 인간 실존이나 인간 관계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알지 못함, 불안, 은밀히 감춰진 것, 나쁜 것을 뜻한다. 혼돈과 어둠은 창조 이전에 한 때 있었던 현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창조물의 배후에는 항상 꼴을 갖추지 못한 깊은 물과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창조물의 전 존재를 늘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가진 원천적인 경험이며, 지금도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상황이다(예: 밤, 어둠, 죽음 등을 두려워함). 하느님은 깊은 물과 어둠 가운데에서 우주만물을 질서있게 창조하시어 그 혼돈의 상태를 물리치셨다. 그리고 창조물들이 또 다시 혼돈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돌보아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창조물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혼돈의 깊은 물과 어둠에 짓눌려 있을 때, 하느님만이 새로운 창조의 힘으로 구원의 빛을 던져 주실 수 있다. 물 위를 휘돌고 있는 하느님의 ‘기운(ruah)’은 본래 ‘바람’을 가르키며, 때로는 숨, 또는 영으로 풀이된다. 이 기운을 창조적 성령에 대한 암시(시편 104,30 참조)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2절의 ‘기운’은 실제로 창조를 이루는 영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보여진다. 창조 과정에 있어서 ‘하느님의 기운’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2. 빛의 창조 1절이 창조 이야기 전체의 요약이며 도입부라면 2절은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의 상태, 3절은 창조 과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혼돈의 특성은 어둠이다. 우주로부터 혼돈이 사라지려면 먼저 어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빛은 개별적인 창조 작업을 이루어 나가기 전의 준비 작업으로 창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은 생명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먼저 빛을 창조하시어 어둠을 없애신다. 빛이 창조되자 낮과 밤이 구별되고 시간이 생겨난다. 생명과 삶은 시간 안에서 생겨나 시간(역사) 속에서 빛과 어둠이 엇갈리는 사건을 체험한다. 생명이 생명으로 존속하려면 빛 속에 머물러야 한다. 곧 빛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있을 때 어둠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3절의 빛은 14-19절에 등장하는 발광체들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고대 동방인들은 빛을 해와는 다른 독립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보관된 섬세한 물질이라고 생각하였다(욥기 38,19-20 참조). 그래서 빛과 천체의 창조가 따로 이루어진 것이다. 빛은 어둠 속에서 생기지 않았다. 빛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겨났다(3절)는 표현은 말씀에 의한 창조임을 더욱 강조한다. 저자는 다른 것들의 창조에 관해서는 3절과 달리 ‘그대로 되었다’(1,1.9.11.15.20.24), ‘지어 내셨다’(1,21.27), ‘만드셨다’(1,25)로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이 직접 일하시는 야휘스트 창조 이야기(2,4b-25)와는 달리 다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는 제관계 문헌의 표현은 상당히 발전된 사상을 보여 준다. 고대 동방에 있어서 말은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 간주되었다(창세 29,20-27; 민수 5,12-31; 판관 17,1-2; 2사무 12,1-18 참조). 특히 야훼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창조를 이루고 여러 사건들을 움직이는 힘이었다(이사 40,26; 48,13; 55,11; 시편 33,6.9; 147,15-18). 이 힘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말씀을 발하시는 하느님의 의지에서 나온다. 역동적인 능력을 가진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로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낸다.”(히브 4,12) 하느님과 창조물의 관계를 정립시키는 이 말씀이 인간에게 올 때, 예언자로 불림을 받게 되고 치유와 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첫 열매인 빛을 창조하시고 곧 이를 좋게 보신다(4절). 이러한 하느님의 인정이나 판단은 빛의 겉모양새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기능과 능력이 창조의 목적에 일치되고 적합함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보고 기뻐하신다는 것은 창조가 이미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또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동사에는 ‘발견하다, 좋다고 판단하다’는 어감도 함께 곁들여져 있다.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 ‘나눈다’는 말은 고대 우주론에서 ‘창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행위를 뜻한다. 제관계 저자가 쓴 이 표현은 아주 고대의 전승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둠도 하느님께 창조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둠은 빛과 동등하게 창조되지 않았고, 더구나 ‘좋다’는 긍정적 판단도 받지 못했다. 이제 어둠은 혼돈의 어둠이 아니라 빛과 구별되는 창조된 어둠으로서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어둠이 하느님의 창조물인가의 여부를 묻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빛과 어둠을 인식하고 그 둘을 가르는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빛은 생명과 관련되며(욥기 3,16.20; 시편 36,10; 49,20; 56,14; 이사 60,1-3) 어둠보다 우월하다. 빛이 구원과 생명의 표지(요한 8,22; 9,5; 12,46 참조)라면 어둠은 죽음과 멸망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우리네 삶의 역사에서 어둠이 빛과, 생명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때가 많지만, 결국 하느님의 말씀은 혼돈의 어둠을 지배한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요한 1,5). 그러나 아무리 빛이 좋음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빛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의 창조물이기에 빛을 신으로 간주하거나, 빛을 하느님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빛이 빛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요한 1,5 비교). 제관계 저자는 빛과 어둠이 나눠짐으로써 낮과 밤이라는 주기적인 흐름이 생겨났고, 이로써 시간과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5절). 이것은 바로 세상과 인간이 존속되기 위한 질서가 확립되었음을 뜻한다. 이 질서 아래서만 창조의 시작과 마침, 창조물의 존속, 자연과 인류의 역사가 가능하다. 창조의 첫 과정은 이름 지어 부르심으로 완성된다(5절).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 붙일 대상의 본질과 역할을 규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주권행사를 의미한다. 또 이름 짓는 이는 그 대상에 대하여 지배권을 갖게 된다(2열왕 23,34; 34,17 참조). 하느님께서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밤이라 이름 지어 부르셨다. 따라서 어둠도 시간적 제약을 받게 되고 하느님의 지배에 속하게 되었다. “밤, 낮 하루가 지났다”는 표현은 유다인들이 우리와 달리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로 계산하던 풍습을 반영한 것이다(레위 23,2 참조). 제관계 창조 이야기에서 되풀이되는 이 표현은 창조 행위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이기에 역사와 연결되는 것임을 뜻한다.
3. 창공의 형성 빛과 어둠이 갈라진 후에도 혼돈은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땅을 뒤덮고 있는 물을 분리시켜야 했다. 이 일이 이튿날과 사흗날에 이루어지는 창조 내용이다. 제관계 저자는 그가 전해 받은 우주관에 따라서 천체와 하늘의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고대 동방인들은 하늘이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1층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대기권이고, 2층은 해와 달과 별들이 매달려 있는 천체권이며, 3층은 창공 윗물 위에 있는 하느님의 거처라고 생각했다. 땅은 견고한 받침대 위에 서 있는데, 무엇인가가 땅을 받치고 있는 버팀대를 흔들어 대면 지진이 일어난다고 상상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지하 세계인 ‘스올(sheol)’로 내려간다고 믿었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창공은 ‘발로 딛다, 다지다, 짓밟다, 때려서 늘리다, 넓히다’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 ‘단단한 것, 평평한 마당, 광장’ 또는 ‘망치로 두드려 고정시켜 놓은 것’(욥기 37,18 참조)을 뜻한다. 둥근 구리판 같은 창공은 하느님이 하늘에 씌운 하나의 칸막이로서 땅에 남아 있는 혼돈의 물(원시 바다)과 창공 위에 있는 혼돈의 물(윗물)이 합쳐지지 못하도록 갈라 놓는 역할을 하며, 가끔 창공에 달려있는 창문을 열면 창공 위에 있는 물이 비로 내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창세 7,11; 8,2 참조). 이제 창공은 창조주로부터 하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8절). 이와 같이 하늘 자체도 신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창조주께서 세우신 칸막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 칸막이는 창공 위에 있는 혼돈의 물을 막아줌으로써 땅위에 있는 창조물이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지켜줄 뿐 아니라 아무런 신적인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홍수의 무서움을 아는 큰 강 유역의 주민들은 이 칸막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물을 다스리는 것은 그들의 삶에 있어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는데, 바로 하느님이 물의 질서를 잡아주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서술로써 저자는 천체나 하늘의 신격화를 배제하고 탈신화화(脫神話化)를 꾀하고 있다. 이튿날의 창조에서 “보시니…좋았다”라는 구절이 빠져 있는 이유는 혼돈의 물이 사흗날에 가서야 완전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 일부 생략했으니 전체적인 것은 naver에서 마저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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