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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심판과 공심판은 별개인가?---심상태 요한 신부님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28 조회수619 추천수0
 
 
사심판과 공심판은 별개인가?
 
심상태 요한(한국 그리스도 사상 연구소 소장, 신부)
 
 
“저는 지난 부활절에 몇몇 아는 사람들로부터 사심판과 공심판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아는 게 별로 없어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교리적으로 사람은 죽어서 한 번 심판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듣기로는 죽음 후에 개인적으로 심판[사심판]을 받은 사람이 세상 종말 때 또 심판[공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심판과 공심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미켈란젤로의 걸작 ‘최후의 심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오른손을 높이 쳐든 예수님의 준엄한 모습에서 우리는 신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한번쯤은 돌아보게 됩니다. 죽음이 누구나 겪는 필연의 것이라면 여기에 따르는 심판 역시 피 할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인간 죽음에 따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심판
 
사심판(私審判)과 공심판(公審判)은 개인과 전체 인류의 궁극적 구원이나 비구원을 결정하는 하느님의 선고를 뜻하는데, 이를 이해함에 있어 커다란 시각 변화가 1960년대 이래 교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종말에 재림하여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리라는 공심판 교리는 사도 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비롯한 초기 교회의 신경들 안에서 한결같이 고백되어 왔으며,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나 제2차 리옹 공의회(1274년)에서 반포된 신앙 고백문 안에서도 명시적으로 진술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 후에 피안(彼岸)에서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심판에 관한 교리는 4세기 이래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심판에 관한 명시적 결정이 교도권에 의해 내려진 바는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 아니면 필요한 정화 단계를 거친 뒤에 ‘죽은 이들의 부활’(세상 종말) 이전에 보상이나 형벌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13~15세기의 교회 결정에 사심판에 관한 교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교황 베네딕도 1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1336년). 한편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사심판에 관한 교도권적 결정을 내리려는 계획이 입안되기는 하였으나 공식적 확정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서에는 아모스서 이래 ‘하느님의 날’이 오면 불신자들과 범죄인들이 하느님의 심판에 처해지리라는 심판 표상이 형성되어 있습니다(아모 3,2; 5,18-20; 이사 2,6-21; 13,6; 17.5-6; 63,1-6; 에제 22,18-22; 34,17-22). 신약 성서에서도 구약 성서의 심판 표상에 입각하여 죽은 모든 사람들의 부활 기대와 함께 하느님의 선고, 의인들과 악인들의 분리 상념을 포함하는 심판 표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마태 5,29-30; 22,11-14; 25,31-46; 루가 16,22; 23,43; 요한 3,18-19; 5,22-27; 1요한 3,14; 묵시 14,14-20; 로마 1,18-32; 에페 2,3; 2고린 5,10; 갈라 6,7-8; 히브 4,13; 9,27; 10,31).
 
여기서 심판에 대한 상념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독생 성자로서 심판 권한을 행사한다는 확신과 아울러 인간과 인간적 행동이 최후 심판의 척도가 된다고 확신하는 특징을 드러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심판자인 분이 굶주리고 목마르며, 낯설고 헐벗은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 그리고 수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성서적 심판 표상에 입각하여 형성된 전통적 종말 교리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주지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원죄의 형별로서의 죽음을 맞게 되면 하느님의 은총을 수락하거나 배척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죽음 속에서 불멸하는 인간 영혼이 사멸하는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즉시 심판자이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룩한 행업에 따라 사심판을 받는다.
 
지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의인들의 영혼은 구원되어 즉시 천당(天堂)에서 하느님을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되고, 반면 대죄(大罪) 속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은 즉시 지옥에 형벌로서 던져지는 심판을 받아서 지복직관의 결핍을 뜻하는 고통, 즉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데에 따르는 실고(失苦)와 함께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으로서의 각고(覺苦)를 영원히 당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와는 달리 가톨릭 교회는 소죄(小罪) 중에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은 완전히 정화되어 천당에 입장할 수 있을 때까지 즉시 연옥(練獄)에서 실고와 각고를 겪으며, 지상의 살아 있는 신자들의 미사나 기도 또는 선행 등을 통하여 도움을 받게 된다고 믿는다.
 
마침내 세상 종말에 이르러 우주적 이변이 발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천상 세계로부터 현실 세계 안으로 재림하게 되면서 공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하여 분리되었던 영혼과 육신이 재결합된 처지에서 아직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심판자 그리스도로부터 공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어 의인들은 영복(永福)을 누리고 악인들은 영벌(永罰)을 당하게 되면서 인류 세계는 목표에 도달하여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2. 1960년대 이래 심판에 관한 성서 진술들은 종말에 발생할 실재에 대한 객관적 정보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비유’(比喩)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통찰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해서 진술되고 있는 ‘실상’을 표상적이고 비유적인 ‘외형’으로부터 구별하려는 노력이 일고 있습니다. 오늘날 종말 사건에 관한 성서 진술들은 객관적 처소와 관련시켜 ‘장소적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役事)와 관련시켜 ‘인격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신적 생명을 단절하여 구원에 이르는 관계를 파멸하였기 때문에 소외된 현실 세계 속에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 속에서 하느님과 결정적인 만남을 하게 되며, 진리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해후를 통해서 인간은 자선의 나약성, 무능성, 부당성과 죄악성을 깊이 직시합니다. 하느님의 이 지고의 거룩함과 지순한 사랑에 직면하여 자신의 비속함과 사랑의 결핍을 철저하게 의식하게 될 때, 이 만남은 인간에게는 심판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심판은 바로 진리 자체, 진리가 공공연하게 드려나는 것”(J. 라칭거 추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판은 ‘삶의 파노라마와 비슷하게 규정되고 있습니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전모를, 즉 행위, 궐함, 사랑과 증오, 진리와 허위의 실상을 삶의 현실처럼 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였으며, 또 누구가 되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대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심판하는 분은 하느님이라기보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의 인간 자신인 것입니다.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에 비추어 자신의 진면목을 대변하게 될 때, 자선이 어떠한지를 보고 스스로 심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죄의 용서를 받아 믿고 희망하며 사는 신앙인이라도 하느님의 거룩함과 사랑 앞에서 ‘저는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절규해야 하는 존재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으로서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일회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래서 공심판은 사심판과 분리되어 별도로 발생하는 일회적 심판이 아니라 사심판의 실상이 만천하에 공공연히 드러나는 사건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공심판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진행되는 역사의 종말과정이 완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표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된 세계 종말의 완성이 ‘아직’ 실현되지 않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실현될 수 없으나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다가오는 목표임을 나타내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적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모르는) “이 과정의 완성이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시작이고 지탱하는 근거이며, 의미 중심이자 절정, 그리고 만인이 그에게 도착하는 가운데 ‘재림하게 되는’ 부활하신 분의 실재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한에서(만인이 궁극적으로 구원되거나 상실되는 중에 완성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부릅니다”(K. 라너).
 
이러한 관심 속에서 사심판과 공심판이 시공적으로 분리된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니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의 사건임이 드러납니다. 공심판은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역사 과정을 따라서 발생하고, 죽음 속에서 도달하게 되는 개인의 완성은 우주적 역사 과정의 한 종말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발생하는 부활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전인(全人)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선사받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설재인 은총이 부활 속에서 이미 죽음의 극복을 씨앗과 같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은총 속에서 사망하는 의인에게는 이미 죽음 속에서 육신의 부활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 속에서 인간이 은총의 힘으로 현양되면, 인간의 육신도 현양되어 육신 부활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육신 부활이 이루어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도 같은 운명의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필립 1,23; 2고린 5,1-5).
 
그리고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된 인간의 육신 자체가 바로 세계 자체이기 때문에 부활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의 인격체와 세계가 부분적으로나마 완성 상태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후 심판의 날에 발생하는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상호 유대를 맺는 가운데 충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옥과 연옥은 어떤 곳인가
 
‘장소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지옥과 연옥은 하느님이 죄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지하 세계에 따로 준비한 가공할 형별 장소가 아닙니다. 지옥은 어느 특정 장소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자행되는 범죄 행위 안에 내재하는 처지의 궁극화를 의미합니다. 지옥은 자유로운 인격적 결단에 의해 영위되는 인간 삶의 내재적 결과로서 범죄와 함께 현세에서 이미 발생하여 죽음과 함께 고착되는 가공할 실재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지옥과 관련된 성서 내용은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 정보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행동 추구의 동기와 척도로 취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 이기주의의 노예가 된 생활 자세에 대한 경고이자 회개를 촉구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지옥의 실상을 표상하기 위하여 현실적 체험을 원용할 수 있습니다. 역사 세계 안에서 한없는 증오와 질투, 가공할 살인과 폭력 그리고 잔혹한 수탈과 억압이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한 인간이 이웃을 물리치고 사랑의 공동체를 배척할 때, 지옥은 ‘생지옥’으로서 현실 세계 안에서 이미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고착 상황은 문과 창문이 없는 빛 없는 공간, 이 공간을 떠날 가망이 전혀 없는 수인(因人)의 처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연옥은 반지옥(半地獄)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발생하는 하느님과의 해후의 한 순간입니다. 연옥은 완성되지도 않고 사랑 속에서 아직 성숙되지 않은 인간이 사랑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룩하기에 부당함을 인지하면서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하느님을 만나면서 정화되는 과정입니다. 자신의 죄과로 말미암아 바람직한 인간이 되지 못한 사람이 -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해당 - 지고지순한 하느님 앞에서 벌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스스로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이 해후를 자신을 고통스럽게 불태우는 화염과 같은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여기서 하느님 자신이 연옥이라는 것, 그분과의 만남이 연옥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연옥을 이해하기 위해 장소나 시간, 특정 또는 경위를 포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더욱 개방하고,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는 가운데 정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과 더욱 완전한 일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만물과의 유대, 천당
 
천당이란 인간 삶의 완성된 충만, 즉 사랑과 통교의 완성된 형태입니다.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을 실천할 때에 자기 충만에 이릅니다. 천당은 사랑의 완성으로 모든 다른 존재들과 완전히 일치된 처지를 뜻합니다. 천당 지복은 한 개인이 이웃 동료와 세상사들을 배제하고 하느님을 상대적으로 직접 바라보며 갖게 되는 ‘사적 친교’ 안에서가 아니라, 모든 이웃들과 세상사, 그리고 사랑의 교환 속에서 일치하는 ‘공동체’ 안에서 성립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잔치로 비유하였습니다. “천당이란 우리 모두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와 아주 비슷하게 되며 유대를 이루고 또한 이웃들과 아낌없는 사랑의 교환으로 서로 일치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G. 그레사케). 그래서 한 사람이 생명을 선물이나 과제로서 받아들이고 모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죽음을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써 수락할 때에, 죽음마저 사랑 속에서 극복됩니다(1요한 3, 14).
 
인간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여 모든 것을 사랑할 때에, 하느님은 그에게 당신 자신을 그대로 선사함으로써 천당의 지복이 형성됩니다. 극도의 고독성이 지옥의 본질적 요소라면, 만물의 유대 내지 공동체적 성향은 천당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향잡지, 199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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