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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 개의 종파가 다 옳은가? - 종교 무차별론의 허구성(2)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2-11 조회수570 추천수1 신고

 

- 두 개의 종파가 다 옳은가? -

 

 

 

흔한 질문에 쉬운 대답

 

 

 이제 종교 무차별론의 철학을 검토해서, 과연 지성을 가진 인간이 이를 논리

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따져 보기로 한다. 제1심은

지성의 법정에서, 제2심은 계시(啓示)의 법정에서 심문하기로 한다.

 두 가지 종교가 얼마나 서로 다르거나 말거나 다 같이 옳다고 말하는 무차별

론자는 논리와 상식의 제1 원칙을 어기는 것이 된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주의가 동시에 다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이 논리의 제1 원칙이다. 하나가 참이

라면 이와 모순이 되는 또 하나는 거짓이다. 이 원칙을 무시하면 사람은 일체

아무런 결론도 옳게 내릴 수 없다.

 

 예를 들면, 15명의 학생을 앞에 놓고 교사가 백지 한 장을 들고 무슨 색이냐

고 질문했다. 그래서 15가지의 대답이 나왔다. 어떤 학생은 푸르다. 어떤 학생

은 붉다. 어떤 학생은 노랗다고 말하고 마지막 학생만이 희다고 말했다. 이 때

교사가 이 학생들을 전부 귀여워하기 때문에 ’한 사람만 맞고 틀렸다’고 말

하지 않고 ’모두 다 맞았다’ 고 말했다 하자. 그러면 이 교사의 애정과 너그러

움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과연 이 교사가 올바른 정신인지를 의심치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15가지의 대답이 옳다고 말하는 바람에 지성(知性)의

자살(自殺)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구구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논리의 근본적 원리임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종교 문제에 있어서만은 이 말이 버젓이 통하니 이상할 노릇이다.

 하느님의 위격(位格)이 몇이냐는 물음에 유니테어리언 교파는 ’하나뿐’ 이라고

대답하고, 감리교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라고 대답한다. 이 때에 두 가

지가 다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각 교파의 교리의 차이

 

 교리의 차이의 실례는 유니테어리언(唯一神格論)과 감리교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 교파마다 제각기 간판을 내걸고 있음은 그 무엇이 서로 다르기 때문

이다. 침례교파에서는 갓난아기의 세례는 무효라고 우기는 데 비해 루터파에서

는 유효하다고 한다. 가톨릭에서는 성체를 구세주의 참살과 피, 신성과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믿지만, 장로교에서는 다만 그리스도의 상징 또는 기념으로만 여

긴다.

 

 비오 11세 교황은 1928년 1월 6일자 회칙(回勅) ’참된 종교적 일치’에서 이러

한 교리의 차이가 모든 그리스도교들이 일치하려는 노력을 수포화하는 근본 원

인임을 밝혔다.

 

 

"무슨 협정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교파가 일치될 수 있겠는가? 성전(聖傳)

계시의 참된 근원임을 주장하는 편과 이를 부인하는 편이 일치될 수 있는가?

주교, 신부, 부제(副祭)라는 성직자 계급을 하느님이 정해 주신 제도라고 주

장하는 편과, 이것을 시대와 환경의 조건을 따라 채택된 제도에 불과하다는

편이 어떻게 한 회원이 될 수 있는가? 또 빵과 포도주가 실체변화(實體變化)

어 놀랍게도 이것이 곧 그리스도라고 흠숭하는 편과, 이를 기념 또는 상징으

로만 여기는 사람과, 또 모든 성인들 중에서 특히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

로 받드는 편과, 이렇게 하면 ’하느님과 사람과의 중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편과,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이 어떻게 일치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상치(相馳)하는 여러 가지 견해(見解)에서 유일한 권위, 유일한 신앙

법칙, 유일한 신앙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교회의 일치를 이룰 길이 없음을 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 무차별론에 떨어지기는   

얼마나 쉬운 줄도 잘 안다. 곧 그들은 교리의 진리는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

며, 변할 수 없는 계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인간 생활의

필요와 인간 정신의 여러 가지 경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만큼 인간 생활에 맞

게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과는 중대하다

 

 이러한 기본 교리의 차이에서부터 서로 상극(相剋)이 되는 실천적인 면에서의

결론들이 나오게 된다. 예컨대 유니테어리언처럼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간에 지

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옳다면, 그 즉시 그리스도를 신(神)으로 흠숭하는 성공회

는 우상 숭배를 범하는 것이 된다. 만일 성공회가 옳다면 유니테어리언은 그리

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독성죄(瀆聖罪)를 범하는 것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무차

별론은 결국 실제적으로는 선과 악, 거짓과 진리, 우상 숭배와 참종교 등을 동

일시하는 말이며, 진리를 결정짓는 일체의 객관적 표준을 부인하고 사람의 지성

(知性)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교파가 같다는 무차별론의 원리가 가톨릭만 빼놓고 그

밖의 개신교 교파들에게는 맞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말도 옳지 않다. 개신교와 전반적으로 성서 자유 해석의 원리는 공통되지만,

그들 교파들이 주장하는 객관적 교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초기 혁명가의 한 사람인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의 비통한 한탄은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참되다.

 

"우리 동포들은 이 교리 저교리의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오늘 그들이 믿고 있

는 종교가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 교황께 선전포고를 감행한 이 숱한 교파들

이 어느 점에서 일치할 것인가? 어떤 파가 믿는 것을 다른 파가 배척하지 않는

것이 도무지 없다."

 

 이와 같이 무차별론은 지성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진리와 오류를 분간하는

일체의 구별을 무시하는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를 이성(理性)의 법정에서 따져 승소(勝訴)하였으니 마음이

흐뭇하다. 그렇지만 이 문제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계시(啓示)의 법정에 다시 제

소하기로 한다. 그래서 영원(永遠)한 진리(眞理)가 지성의 소리와 달리 말하는

지 보기로 한다.

 

 

그리스도는 무차별론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앙 교리를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본을 따라 온갖 괴로움과 죽음까지도 용감히 참아받은 시대였다. 그리스도를 부

정하고 로마의 잡신(雜神)에게 향을 피우라는 명령을 어긴 탓으로 무수한 그리

스도교인들은 처음 3세기 동안 로마의 원형(圓形) 극장에서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었고, 살아 있는 몸에 콜타르를 발린 채 밤중에 전차(戰車) 경주를 비추는 관

솔불 노릇을 당했다.

 

이들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그리스도가 친히 생명을 버리면

서 계시 진리에 보여 주신 모범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리스도가 죽기 전날

밤 초만원을 이루었던 유다인 최고 재판소 산헤드린(Sanhedrin)에서는 대사제

(大司祭) 가야파 앞에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가야파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스도께 도전한다.

 

"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분명히 대답하여라.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당시에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다. 하물며 스스로가 하느님이

라 말하면 법에 의해 극형을 면치 못했다.  그리스도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또 당신의 신성(神性)을 부인만 하면 유다인은 당신에 대해서 아무런 벌도 주지

않을 뿐더러 절박한 생명의 위험도 면할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애매

한 말이나 우물쭈물 핑계도 대지 않고 칼날같이 날카롭고 간단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  그래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당신 교리의 한마디를 손톱만큼이라도 고쳐서 생명을 구하기

보다는 차라리 대죄인으로서 부끄럽고 미련한 십자가에서 죽어가기를 택했다.

이것이 세기를 이어 그리스도교인들의 마음속에서 불타는 본보기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을 충성으로 지키게 했고, 신앙의 정통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했

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가르치신 그 교리를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고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생각은 애당초 발붙일 여지도 없게 했다.

 

 가야파가 유다인의 최고 법원의 편견을 고집하여 물은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우물쭈물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음은 그분의 공생활(公生活)

에서 가르치신 태도의 본보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무차별론자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계시(啓示)의 빛으로 본 무차별론

 

 이제 그리스도가 당신 제자들과 또 제자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알게

될 모든 이에게 이와 똑같은 의무를 부과하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즉 그리스

도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교리를 그대로 정확히 가르치기를 명하고, 사도들의 말

을 듣는 이들에게 사도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의무를 부과하였는가?  

만일 그리스도가 이 두가지를 명령했다면 종교 무차별론은 계시(啓示)의 법정에서

유죄(有罪)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세주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들에게 복음을 설교하기를 명

하신 말씀을 검토하기로 한다. 비(非)가톨릭 독자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개

신교의 성서를 인용하기로 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

러므로 너희는 가서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任英彬 역, 대한 성

서공회 版, 마태 28, 18-20). 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

파하라. 맏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

은 정죄를 받으리라"(同上, 마르 16, 15-16).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서 이중의 의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만민에게 복음을 설교하기를 위임했다.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강생(降生)했다. 그러므로 그분은 당신

의 종교가 전 인류의 보편적 종교가 되기를 지향했다. 만일 어느 민족 또는 어

느 개인이라도 이를 거절하면 그만큼 계시의 목표가 꺾이는 폭이 된다.

 

 둘째, 그리스도는 당신이 가르친 그 교리를 그대로 설교할 의무를 사도들에게  

맡겼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를 준수하도록 가르치라"

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사도들이 제멋대로,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교리를

가르치기를 금하는 말씀이다.

 

 그렇기는커녕 당신이 ’가르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모든 이에게 설교하도록 명

했다. 사도들은 어떤 교리는 가르치고 어떤 교리는 배척할 자유를 받지 못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전 복음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써 결합되

어 있다. 그런 만큼 사도들은 이를 줄이거나 늘리거나 바꾸거나 훼손함이 없이

전 세계에 전해야 했다.

 

 이제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동일한 진리를 만민에게 가르칠 의무를 맡겼음을

명백히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아직도 그리스도가 모든 이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의무를 밝혔는지, 또는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적당히 고치는 자유를 주었는

지 의심스럽게 여기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은 조금만 바꾸

어 생각하면 즉시 알 수 있다. 사도들에게만 대중에게 복음을 설교할 권리와  

권위를 주었을 뿐 청중에게는 이에 상응한 수락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가? 권리가 있으면 이 권리를 존중하는 상대방에게는 이

에 상응한 의무가 따른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설교할 권리만 맡기고 그 설교

를 듣는 이들에게는 이에 상응한 수락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면 그 권리는

아무 뜻도 없는 장난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명령이다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명령한 말씀 속에 함축적으로 명확히 드러나기는 하지

만, 이 대답만으로는 시원치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명령할 때에

함축적으로 말씀한 이것을 청중에게 다시 똑똑히 밝혔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

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가 사도들에게 설교를 명한 직후에 덧붙인 말씀이다.

 

이처럼 그분은 대중에게 이를 거절할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분은 이러한 초자연

의 진리를 계시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고, 이를 설교하기를 사도들에게 명했다.

따라서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는 이론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교리

를 믿어야 되는 의무를 부과한 그리스도의 명령에 직접 어긋나는 것임을 알 것이

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가르친 계시 진리를 믿어야 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를 영원한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분은 그 교리를 설교할 사명을 사도들에게 맡기는 것만으로 그치

지 않았다. 그분은 사도들이 진리를 정확히 전하지 못한다든가, 또는 틀리기 쉬

운 인간이니만큼 무의식중에 잘못 전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청중의 마음속에

일어날지도 모르기에, 청중이 이런 인상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즉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

내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라는 보증을 해주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 자체로는 틀릴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이 설교하는

동안은 그리스도가 항상 그들과 함께 있어 그들이 오류에 떨어지지 않게 보호

하며, 그들의 가르치는 바가 신적 인준(神的認准)을 받았다는 도장을 찍어줄

것을 보장한 것이다. 그분은 성부께서 당신에게 임명한 그대로 그들에게 권위

를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이 사람들

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앙의 일치를 강조했다

 

 오튼(Otten)이 지적했듯이 "그리스도가 사명을 맡길 때에 함축적으로 명한 신앙

과 종교의 절대적 일치는 그분이 교회에 관해서 언급한 모든 말에서도 이와 똑같

이 명백히 추론(推論)된다. 그분은 교회에 관해서 항상 ’하나’ 라고 말했을 뿐

’여럿’으로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오직 하나의 가족, 하나의 양우리, 하나의 도시, 하나의 나라를 말했

다. 그분은 이를 하나의 바위베드로 위에 세웠다. 그분은 당신의 양과 양들

을 치는 오직 하나의 최상의 목자를 임명했다. 이가 곧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열쇠

를 맡긴 오직 하나의 대리자이다. 그분은 사도들에게 신앙 일치의 절대적 필요성

을 골수에 사무치게 하기 위하여 거듭거듭 예를 들었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한 듯하

다."

 

 

 실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신앙의 일치를 강조한 만큼 복음서에는 그분이 항상

이 진리를 특히 힘주어 말하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수난 바로 전날 밤

에도 그분은 이것을 특별한 기도의 지향으로 삼았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

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분은 이 일치를 사도

들뿐 아니라 장차 당신을 믿을 무수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신 것임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의미 심장한 말씀을 덧붙였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

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일치를 두드러지게 강조한 것은 사도들의 전교에서 다시금 되풀이된다.

참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거룩한 사명을 충실히 완수했다. 주님께 대한 확고

부동한 충성으로써 이 일치를 실생활에 반영하였고 이로써 자기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신앙의 일치를 굳게 지키기를 권장했다. 지칠 줄 모르는 이방인의 사도 바오

로는 에페소인들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아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

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

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성 바오로, 일치의 결함을 엄책

 

 일부의 갈라디아인들이 바오로가 가르친 신앙에 관해서 갈팡질팡하여 교리와

신앙에 일치를 잃었을 때 바오로가 불같이 엄책하였던 것을 보면 현대의 종교

무차별론자들은 무어라고 꾸며 댈 것인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다

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강

조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이미 받은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는 자가 있

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

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둡니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도 다른 사도와  마찬가지로 계시의 어느 부

분이라도 왜곡하거나 고치는 것은 가장 큰 벌을 받아 마땅한 짓이라 여겼음이

분명하다.

 

 모든 교파는 다 같이 좋은 것이니 만큼 교리의 차이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

는 무차별론자들에게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른 교리를 설교하는 자는 너희 신앙을 뒤

엎는 자들이니 이들을 외교인으로 여길지니라. 너희 참된 신앙에 가장 악독스런

위험으로 여길지니라. 그리고 한 번 충고한 후에도 이단을 고집할 양이면 저를

너희로부터 파문할지로다." 이런 말은 너무 준엄하게 들릴지 모르나 실상 부드러

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덜 엄한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참된 우리(襤) 밖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어느 종교를 믿든지 성실(誠實)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받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한편으로  주관적 성질, 이를테면  마음의 태도로서의 성실

함과, 다른 편으로 객관적 진리와 이를 찾는 합당한 노력의 대용(代用)으로써의

성실함을 분간해야 한다. 주관적 성질로서의 성실함, 말하자면 종교 무차별론자

에 대해서 선의(善意)와 호의(好意)를 베풀어 주는 것은 매우 가상한 마음가짐이

다. 그런데 성실함이나 선의에 있어서는 반드시 눈이 있어야 한다.

 

이는 지성(知性)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 착한

마음은 눈먼 정서에 마구 이끌려 어리석음을 두둔하기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객

관적 진리와 이를 찾는 합당한 노력은 하지 않고 그냥 무턱대고 성실하기만 하다

면, 이는 종교 무차별론자들이 말하는 뜻으로는 그릇된 것이며 당연히 단죄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자기 힘으로는 뽑아 버릴 수 없는 선입 편견(先入偏見) 때문에,

또는 그 밖에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그리스도의 참신앙을 찾지 못

하고 자기가 믿고 있는 믿음이 올바른 것이라고 성실히 믿는다면, 그 사람은 하느

님의 눈앞에 잘못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에 객관적 진리를 열성적이고 이치에 맞게

힘써 찾는 성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오 9세 교황의 명백한 가르침이다. 그는 1854년과 1863년 두 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참종교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불가승적(不可勝的) 무지(無知)에 있는 사

람은 하느님 눈앞에 잘못이 없으며, 또한 그들은 성총의 도우심을 받아 영생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자유로 죄악에

떨어지지 아니한 사람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국민과 나라와 마음과 그 밖의 것이 다 다른데 누가 감히 이 무지의 한계를

밝히 그어 놓으려 하겠는가?"

 

 교리 문답은 교황의 틀릴 수 없는 가르침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자기의 큰 잘못이 없어 가톨릭 교회가 참교회인 줄 몰라서 교회 밖에 머물러 있

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성총을 잘 사용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

자기 탓 없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그들의 불가승적(不可勝的) 무지(無知) 때문

에 하느님의 눈앞에 잘못이 없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 비신자들이 받고 있는 인상과는 정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

장 아량이 넓고 가장 이치에 맞는 단체이다.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영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영원히 계속하는 조직체로서 가장 친절하고 가장 이

치에 맞는 단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명령을 받들어 온갖 이단유설

(異端謬說)을 반대하지만 이단(異端)을 부르짖는 사람은 사랑한다. 교회는 전심

전력으로 오류(誤謬)를 거슬러 싸우지만 죄인은 사랑한다. 그리고 아무리 대죄인

이라도 이를 덕스럽고 거룩하게 살도록 인도하기에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교회

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구원의 문을 열어 두고 있다. 다만 제 양심의 빛을 거슬

러 행동하는 사람, 자기가 의심하고 있으면서도 탐구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열려진 문을 닫고 있을 따름이다.

 

 

종교적 기생충 생활

 

 이제 마지막 의문이 남았다. 무차별론에 솔깃한 사람들은 이렇게 또 묻는다.

"참된 종교의 회원이 된다는 것이 영원한 구원과 또 올바른 생활을 위해서 그다

지도 불가결(不可缺)한 것이라면, 교회에 속하지 않고  불가지론(不可知論)을 공

언(公言)하면서도 올바른 생활을 하여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훌륭한 인사가

있음은 어찌 된 영문인가?" 그러한 인사들은 그리스도교적 이상이 침투된 사회

에 살고 있어 의식하든 안하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고취된 도덕률과 윤리관

의 깊은 감화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동포들로부터 존경

을 받고 있는 그 인격은 결국 따지고 보면 모두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행위의

표준에 기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무신론(無神論) ’때문에’ 존경받는 것

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받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소년이 꽤 높은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내리달렸다 하자. 그러

면 그 썰매는 언덕 밑에 와서 서지 않고 얼마쯤은 평지를 괘 빨리 미끄러져 갈

것이다. 그 때에 어떤 신사가 멀리서 이 소년이 평지에서 꽤 빨리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 뒤에 언덕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 틀림없

이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허 참 신통한 발명인데!  말도 끌지 않고 모터도 없이 저렇게 빨리  달리다

니…." 하지만 언덕을 쳐다보고 거기서부터 에너지를 얻은 줄 알기만 하면 이런

감탄은 깨끗이 없어질 것이다. 평지를 달리는 것은 빌려 온 힘의 덕분이다. 그

리스도교적 이상과 도덕률에 젖은 사회에 살고 있는 비(非)종교가도 이와 마찬

가지이다. 그는 빌려 온 힘으로 움직인다. 의식하든 안하든 그의 일거 일동은

그리스도교로 물든 과거 19세기 동안의 주요한 결과인 도덕률의 감화를 받고

있다.

 

 이러한 인사가 미상불(未嘗不) 도덕적 기생충이다. 밸푸어(Balfour)가 그의 저

서 ’신앙의 기초’에서 관찰했듯이 "자기보다 우수한 조직체의 동물의 체내에 사

는, 아니 거기서만 살 수 있는 벌레를 생물학자들은 기생충이라 부른다. 자연주

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초자연의 윤리  표준이 실제로는 자연주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자가 있다. 곧 무신론자인데도 신앙인과 다름없는 존경을 받는 생

활을 하고 있다고 으스대는 자들이 있다. 그러니 이들의 정신 생활은 기생충의

생활이다. 즉 그들에 속하는 신념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사회에 속하는 신념으

로써 눈가림을 하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념이 사라지거나 이러한 작용

이 끝이 나면,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이들 기생충의 생명은 더 이상 지탱되지

못하고 만다."

 

 

 

비종교인을 개심하게 하는 어려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정도(正道)를 벗어난 생활을 하는 것을 개심(改心)케 하기

는 신앙이 있는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양심을 자극

하는 요과적인 자극제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만일 십계명을 단지 셈족의 양심

에서 우러난 일시적 법률이며 이제는 돌아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또는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부인한다면 도덕률을 지킬 이유는 어디

에 남는다는 말인가? 그들은 불행하게도 들켰을 때  받게 되는 민법에 규정된

벌이나 사회의 비난쯤은 얼마든지 피할 길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다행

히도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신앙심이 있는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그에게는 종교에서 직접 솟아나오

는 초자연한 자극이 산더미처럼 많다. 민법은 이것을 다루는 판사들 역시 틀릴

수 있는 인간들이니 만큼 판사에 따라 그 판례가 다르지만, 종교의 제재는 틀릴

수 없는 전능(全能)하고 전지(全知)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판정된다. 그러므로 종

교인은 양심이라는 경찰과 함께 생활하는 셈이다. 이것이 워싱턴이 그의 유명한

퇴임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윤리 행위의 견고하고 줄기 찬 바탕은 종교’라는

심원한 진리이다. 이는 미국민이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경고이다.

 

"우리는 윤리가 종교 없이 지탱될 수 있다는 가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특수한

인격을 이룩하는 것이 세련된 교육의 힘임을 긍정하려면, 지성과 경험에 비추어

종교의 원리 없이 국민의 윤리가 보존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긍정해야 한

다."

 

 그런 만큼 양심을 거슬러 도덕률을 어긴 경우 종교심은 타락으로부터 개심하

기를 크게 자극한다. 종교 생활의 정통한 연구가 콘웨이(B. L. Conway) 신부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참된 그리스도교인이라도 때로는 유혹에 못 이겨 이교도처럼 죄악에 떨어져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에 거짓말을 하는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타

락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일정한 기준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니만큼 되올라올 기대

를 걸 수가 있다. 그는 하느님의 산에 기어오르기만 하면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

한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타락은 오직 환경이 악한 때

문이라든가, 혈통의 탓이라든가, 보이지 않는 보다 강한 의지의 강박력 때문이라

고 우기는 사람은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가망이 없다. 그는 선을 악이라 하고 악

을 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결론

 

 이상의 말로써 종교 무차별론은 마르틴 루터가 개인의 사사로운 판단이 종교

생활의 최고의 지침이라고 내세운 주관주의를 그 근본 바탕으로 삼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이는 16세기에 그릇된 종교 혁명가들이 뿌린 종교적 혼란(混亂)과

난립(亂立)의 씨를 20세기에 추수한 것이다. 무차별론은 이제 현대 일반 대중의

종교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는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객관적 종교 진리를 활발

히 찾을 열성을 꺼 버리고 만다.

 

 

 가톨릭 교회가 그리스도가 온 인류 사회를 위하여 세운 유일하고 진정한 교회임

을 깨달으려면 우선 이제까지 말한 무차별론이 그릇된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

미 이 사상이 어떠한 뜻을 지니고 있는지 명백히 된 이상, 이것이 자연적 이성(理

性)에도 하느님의 계시(啓示)에도 어긋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며, 아울러 논리

의 근본 원리에는 물론, 상식에도 어긋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달콤한 사탕발림

속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回勅) ’참된 종교적 일치’에서 종교의 일치는

각 교파가 제각기 신조를 고집하면서 겉으로만 일치하는 데 있지 않고, 각 교파

가 모두 자모(慈母)이신 성교회(聖敎會)의 양우리 안에 되돌아와 조상들이 지니

던 신앙을 되찾음에 있다고 밝힌 것처럼, 이는 참으로 혼란과 오류 속에 허덕이

는 인류에게 진실로 감미로운 초청이 아닐 수 없다. 길  잃은 양들이 우리 안에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의 부르짖음 속에는 자부(慈父)의 마음씨가 메아

리치고 있다.

 

 

 "길 잃은 자녀들을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바오로가 그들의 피로써 봉헌한

이 성좌(聖座)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이 성좌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뿌리요  모

체(母體)’이다. 진실로 ’살아게신  하느님의 교회이며 진리의  기둥이요 기초’인

교회가 신앙의 순결을 잃고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의구심은 버리고, 교회가 가

르치는 권위와 통치를 섬기겠다는 지향으로써 돌아오게 해야 한다.  내 선임자

들에게 허락하지 않은 바가 내게 허락되어 죄스러운 불화(不和)로 나를 배반한

저 자녀들이 애통히 여기는 내 사랑의 품에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원컨대 ’모든

사람이 구원함을 받고 진리를 완전히 알기를 원하시는’ 주여,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 허락하시어, 저 길 잃은 모든 무리를 교회의 품에 돌아오게 하소서.

 

 그 높으신 뜻을 받들어 하느님 은총의 어머니시며 모든 이단의 정복자시며 그

리스도인들의 모친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달로써 모든 이가 하루빨리 성

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어 ’평화로써 서로 결합되어 정신의 일치를 보존하게’ 되

기를 기원한다. 그대들은 내가 얼마나 간절히 그들이 돌아옴을 고대하는지 알고

있다. 또한 가톨릭의 세계에 살든 나를  떠났든, 모든 자녀들이 이를 알기를 원

한다. 그들이 나를 떠났을지라도 겸손되이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면 예수 그리스

도의 유일한 참교회를 깨닫고 드디어는 완전한 사랑 속에 나와 일치될 것을 의

심치 않는다."

 

 

 

 

 여기에 지극한 정성으로 바라야 될 일이 있다.  그리스도교계의 일치의 복구이

다. 이 거대한 목표가 달성되고 곧 지난 4세기 동안 그리스도교계를 찢어 온 가

지를 바로잡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그릇된 오해와

원한의 씨가 제거될 것이다.

 

 

 

 

 

 

 

 

 

 

 

 

 

 

 

위의 글은 존 A. 오브라이언 대주교님의 명저(名著)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 인용했음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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