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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프로테스탄트적 성서관의 오류 - 성서를 대하는 가톨릭의 입장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2-21 조회수1,920 추천수8 신고

 

- 프로테스탄트적 성서관의 오류 -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가톨릭 신자가 이 기록

을 오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 그 교훈을 신앙 도덕의 규정으로 삼는 것은 복음이

성령에 의하여 기록된 하느님 말씀으로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보증되고 있기 때문

이지 단지 역사적 탐색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복음서가 그 중요한 일

부로 포함하고 있는 성서를 하느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

도가 세우신 교회라는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무류권(無謬權)

을 인정하기 때문이다.그리하여 교회에 이러한 권위를 허락하는 것은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믿기 때문이다.

 

 성서를 믿는 것교도권에 복종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가톨릭 신자에게 이 3자는 논리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관

계로 결합되어 있다.  실제로는 혼연 일체로 통일된 신앙 의식으로 움직이고 있으

므로 교회와 그리스도나 성서를 대립시키거나 대치시키는 프로테스탄트적 견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의 상투적 논법인 이 방면으로부터의 가톨릭 공격처럼 표적

이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러한 논법은 도리어 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박약한 일면

을 폭로하는 것이 된다.

 

조금이라도 교리에 통달한 가톨릭 신자는 곧 반박할 것이다. "당신은 성서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는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성서로 하여금 그

렇게 권위 있게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성서는 하느님 말씀을 실은 것

으로 거기에 잘못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말을 당신의 말

처럼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보증을 제시하여 주시오. 그러고 나서 이야기합시

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는 결국 "내가 성서를 읽어보고 여기에 나와 있는 사

실을 틀림없는 하느님의 말이라고 느껴서 믿은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이러

이러하다고 체험으로 믿고 있다." 라는 이상은 말하지 못한다. 성령에 의하여

쓰인 틀림없는 하느님 말씀이라는 성서에 내재한 객관적인 증거는 발견하지 못

한다. 성급한 이야기지만 신약 성서는 이것만이고 그외 것은 모두 정경(正經)

이 아니라는 편리한 목록은 성서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현재 성서에 붙어

있는 목록은 후세 사람이 편의상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어느 한 부

분은 후세 사람이 가필(加筆)한 것이라든가 아니라든가 하는 세부적 문제는 어

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이쯤 되면 프로테스탄트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체험본위로 밀고 나가거나, 혹

은 고등비평(高等批評)의 도움을 빌리거나 성공회처럼 마음대로 좋게 뽑아 낸

성전(聖傳)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나는 체험 본위로 밀고 나가는 데

철저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유일한 도망 갈 구멍이라고 생각한다. 이 길을 따

르는 데는 종교적 체험을 풍부히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자아 본위로 분투하는 강렬한 인격(그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흔히 정복적 지배욕

으로도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傳道)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는 정도의 신

념은 종교적으로는 무의미하니까.)의 소유자인 것도 그 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적으로 선출된 소수의 사람들(나는 결코 그들의 운명을 부러

워 하지 않는다!)의 것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

라 이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은 가톨릭에 대해서도 불교도나 그 외 어떠한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도 한마디 공격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이러한 공격에 곧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가톨릭

교회가 진정한 교회임을 인정한 가톨릭 신자예요. 인정하는 것이 자유로운 나

는 진리의 체험에 매일 살고 있어요. 나의 체험이 틀렸고 당신의 체험이 옳다

는 주장은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나요? 당신은 두 가지 개인적 체험의 시비(是

非)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표준을 무언가 가지고 있습니까? 그 표준은 당신의

이른바 ’체험’ 속에 파묻혀 있는 한 남을 다룰 수 있는 아무런 객관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이 논법은 가톨릭 신자의 입에서 나왔건 불교도나 그 외의 어떠한 종교 신자

가 사용하여도 체험 본위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완전히 유효하다. 순체험

주의자는 자기 입장으로는 어떻게도 주장할 수 있으나 개인적 체험에 파묻혀

객관적으로 권위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다른 체험을 가진 소유자에게

는 전혀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다행히 추종자를 얻었다면 우연히도 그들은 주

장자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명하였든가 그렇지 않으면 주장자

의 경험을 우상 숭배하는 패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길을 따라가는 프로테스탄트의 마지막 입장은 빌헬름 헤르만에

의하여 가장 용감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교도는 그 신념에서 결코 완전한 일치를 볼 수 없다. 모든 살아 있

는 것은 그 특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만일 진실로 신약 성서에서 교훈

을 얻고자 원한다면 거기에 나타나는 개인적 견해의 놀랄 만한 풍부성을 명확

히 인정하여야 한다. 이 다양성을 공통의 신조로써 묶으려는 것은 그리스도 교

회의 성서에 대한 소잡한 남용이다." (Christlichprotestantische Dogmatik in

"Die Kultur der Gegenwart", I, IV, 2, S. 165).

 

 

나는 이 길을 따라가는 가엾은 크리스챤에게  "종교는 왜 그리스도교가 아니면

안 됩니까? 진종(眞宗)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까? 대본교(大本敎)라도 좋지 않

습니까?" 라고 묻고 싶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독특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들은 성서에서 출발

하여 실제적으로는 종교적 진리는 상대적인 것, 바꾸어 말하자면 상대적이므로

절대의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참종교"

는 따위는 도저히 진정으로 주장할 수 없는 자기 부정의 입장에 빠지게 된다.

 

 

잘못된 성서관이 낳은 여러 가지 모순

 

이러한 형편이므로 성서를 신앙의 유일 규범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는  당연히

그 자유 해석도 주장할 수 밖에 없다. 자유 해석이란 물론 비(非)가톨릭적 해석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반(反)가톨릭적 해석을 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만

일 각기 신자들에게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로마 교황의 권위에 대신하여 수많

은 소교황(小敎皇)의 권위를 가지고 해석하여야 한다. 세계적 대교회의 교도권

대신 군소 교회의 교도권을 수립해야 하는 우스운 장면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실정은 이 우스꽝스러운 입장을 잘 극복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역시 목사의 가르침에 따라 장로는 사실 교회를 통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로마 교황의 권위나 세계적 교회의 교도권은 외부로

부터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의 체험과 같은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성전(聖傳)과

교회법에 의하여 명백히 한정된 말하자면 입헌적(立憲的)인 것이다. 이에 반하

여 소교황 등의 권위와 군소 교회의 교도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폭군의 독재

전제로까지 타락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역사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는 이들 소교황의 통솔하에 있는 크리스챤이나 군소 교회의 신자들보다 훨

씬 자유로운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로테스탄트의 이른바 자유 해석은 가톨릭 신앙 입장에서 굳이 보

지 않더라도, 성서 성립의 역사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그 모순에 차 있는 실정

을 감안하여도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성서만을 채용하고 성서의

기초가 되는 성전을 버리는 것은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

스도교 신앙을 초대 교회 내에 최초 저술에 앞서 가르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로 신약 성서 자체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복음서는 사도들

이 그리스도 생애와 기적과 교훈에 대한 설교 일부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 또한 이들 사적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 일정한 해석이 붙여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 해석은 사도의 권위에 의하여 진실한 것으로 가르쳐지고 또한 받

아들여졌다는 것은 그들 서간이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복음이 신앙에 의하여 활동하는 하느님의 능력인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대상은 서두에 "이 복음은 성

서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

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

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

되신 분입니다."(로마 1, 2-4)라고 간단히 기술한 데 그치고 독자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항으로 그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는 또 갈라디아인을 나무

라 그의 복음을 버렸다고 분개하고 있는데(갈라 1, 6-10) 그 복음서는 십자가

에 못 박힌 예수의 복음으로 이것이 있으면 율법이 없어도 족하다는 점을 상세

히 논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데살로니카

후서 중에도 "우리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교우 여러분 굳건히 서십시오. 그리

고 우리가 전한 말이나 써 보낸 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전하여 준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2데살 2, 15)라고 훈계하고 있다. 그 복음과 성전의 내용은 물론

세상 끝날에 관해 적은 것 외에 이 짧은 서간에는 아무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

다. 성전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이들의 태도나 복음서의 사실을 설명할 수 있

겠는가.

 

 그 외에 프로테스탄트는 흔히 가톨릭 신자들이 성서를 모른다든가 읽지 않는다

고 말하며 비난한다. 사실  우리는  성서에  대하여  그들  프로테스탄트처럼  신

경질적이  아니다.  자기들 교회에서 만든 것으로 아침 저녁으로 항상 그 정신을

호흡하고 있으며 내용은 성서에 의하지 않아도 교회의 기도서나 강론이나 교리

문답에서 항상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 수양서로 성서를 읽

는다. 신앙은 교회를 통하여 이미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신앙의 빛에 비추

어 성서를 읽고 마음의 양식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는 마음으

로부터 읽으므로 본래 같은 신자의 마음에 있는 신앙과 성서를 만들어 낸 정신이

서로 교감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쉽게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마치 클래식 음악

을 들을 때 이 부분은 피아노의 여린 음이고 바이올린은 어디서 시작하고 첼로는

어디서 시작하는지 무슨 악기의 무슨 음조로 연주하는지 머리 속으로 계산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음악의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서 감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이 말은 복수니까 이러한 뜻일 것이라든가 이 장의 사실성이 의심스럽다

든가 하는 쓸데없는 토론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교회에 물으

면 안다. 세목에 걸쳐 알고 싶으면 자유로이 연구하며 토론한다. 그리하여 교회

의 신조에 저촉되지 않는 한 되도록 관용으로 모든 해석을 포용한다.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또는 배타적으로 참된 것인가, 확실한 보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

을 정할 필요가 생겼을 때에는 교도권이 발동되어 정하므로 그 때까지는 안심하

여 되도록 대담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토론하며 구명하는 넓은 마음의 여유가 있

다.

 

 사실 교회가 결정적 권위를 가지고 해석을 결정한 성서의 문장 구절, 이른바

dogmatic text의 수는 극히 적다. 내가 세어 본 일은 없으나 어느 성서학자는

모두 20-30곳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지금 기억하

고 있는 것은 마태오 복음 26장(26, 28)의 "이것은 내 몸이다. 나의 피다." 라

는 성찬의 한 구절, 또 야고보서 5장 14, 15절을 병자 성사의 뜻으로 해석한다

는 정도이다. 근본 대정신이 같은 것이므로 성서 해석을 구차하게 그리 상세하

게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앙의 통일을 살아 있는 교도권에서 구하지 않

고 죽은 문자에서 구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느 서적이든지 그

의미 해석에 대한 쟁론을 서적 자체가 해결하지 못한다는 가톨릭 교회의 주장을

교회가 탄생하기도 전의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렇게 갈파해서 써놓았다.

 

 

 

 "그 서적에게 백 번 물어보라. 백 번 같은 대답을 하리라. 무식한 자에게나 궤

 

변론자에게나 다 같이 찢길 터이니… 그 저자가 나와서 명백히 그 뜻을 해석하

 

기 전에는 그 서적은 모욕만 받을 것이다." (Plato Pheod., 60)

 

 

 

이것은 법전만 만들면 사법권은 없어도 나라가 자연히 통치되어 간다고 생각하

는 것같은 유치한 생각이다. 요컨대 성서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만들어

내고 그 내용의 진실을 보증하는 가톨릭 교회이다. 프로테스탄트가 아무리 이

것을 연구하고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여도 그것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어느 새가 공작새 날개깃을 주워 자기 날갯죽지에 꽂고 의기 양양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성서가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자마자 그것을 살릴 정신이 없기 때문에 참 복음

은 줄기를 떠난 가지처럼 조만간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각

성서를 신앙의 유일 규범으로 말하는 군소 교회의 분열과 다툼의 딱한 광경 속

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의 이른바 "성서대로" 란 것이 얼마나 한심한 상태인가.

 

나는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가엾은 신앙관에 대해서 독일 괴팅겐 대학의 고대

언어학과 역사학 교수이며 또한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 -다른 표현으로는 종

교적 체험이 풍부한 프로테스탄트-로 알려져 있는 바오로 데 라가르데의 공평하고

현명한 다음의 말이 그들을 반성시킬 때가 있을 것으로 빌어 마지 않는다.     

 

 

 

 "한 가지 명확히 한정되고 또한 그 자신 확신있는 교단(敎團)이 제공한 서적

의 집성(集成)에 앞선 시대의 교의(敎義)를 완전히 알고자 하는 것은 전혀 불

가능한 일이다. 현재 신약성서가 신약 성서로 (als solches  보통 서적이 아니

라) 만들어진 것은 가톨릭 교회의 업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톨릭 교회

의 이 작품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 교회를 영속적 지위에 놓이게 하는 이상,

톨릭 교도권을 다른 모든 점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교회 교리의 전체를 끌어 낼 수 없는 것은 마치 독일 상법

법전에서 독일에는 형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서적(신약  성서)에서 모순된 것을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단지 거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비그리스도

교적이라고 보아서도 안 된다." (Paul de  Lagarde, Deutsche Schriften,  

Gesammtausgabe letzter Hand, 2. Abdruck, Goettingen, 1891, S. 43).

 

 

 

 

 

 

 

 

 마지막으로 이교(異敎) 철학자들의 오해와 공격에 대한 초대 교회 최초의

 

호교론자이며 순교자인 성 유스티노의 말로서 필자의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철학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고 진리의 명확한 이해이다.

 

 그리고 행복은 이러한 지식과 이해에 대한 보상이다."

 

 

 

 

 

 

 

 

 

 

 

 

 

- 이와시타 소이치 신부의 ’가톨릭 신앙’과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교부들의 신앙’  中에서 -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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