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도 성 요한 [Re:1243]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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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경 | 작성일2001-06-06 | 조회수484 | 추천수0 | 신고 |
+ 찬미 예수님 !!!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애제자)인 사도 성 요한에 대한 부족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뽑아 드립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자료 속에는 사도 요한이 구마능력이 있다는 말은 찾을 수 없군요. 읽기에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성 요한]
1. 사도 요한에 대한 전통의 증언 1) 이레네오(130∼200년)의 「반이단론」; 이레네오의 사도 요한에 대한 증언(이레네오 「반이단론」II,12,5; III,3,4)은 에우세비오의 저서에서 인용되었다(Eusebius 「H.E.」 III,3,4; III,13,3-4). 거기에 나타난 증언은 다음과 같다; "아시아에 있던 주님의 제자인 요한을 알고 있던 모든 주교들은 요한이 그들에게 그것을(복음서를) 전해주었다고 증거했다. 왜냐하면 요한은 트라얀 시대까지 그들과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 후에 주님의 품에 기대 있던 제자인 요한은 그가 아직 아시아의 에페소에 머물러 있을 때 그의 복음서를 펴냈다.” 한마디로 이레네오의 증언은 "제베대오의 아들인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 받은 제자(애제자)였다. 그는 오래 동안 에페소에서 살았고, 거기서 제4복음서를 펴냈다."는 식으로 단순하고 완벽하다. 2) 에페소의 주교 뽈리까르뽀(주교 재임 189∼198년)의 교황 빅토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에 더하여 증인이면서 동시에 스승이었고, 주님의 품에 기대 있던 요한은 사제가 되어 司祭冠을 쓰고 있었다. 그도 역시 에페소에서 잠들었다.”라고 쓰여있다.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도 비슷한 증언을 한다.
2. 사도 요한의 신약성서 내에서의 위치 - 마르코복음에서는 베드로 다음에 배치한다(마르3,16.19). -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다음으로 언급한다(마태10,2-4; 루가6,14-16). -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님을 따른 최초의 사도였다.
3. 출신 1) 갈릴래아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베대오, 어머니는 살로메였다. 어머니인 살로메는 나중에 예수님을 따르며 도와 드리던 "거룩한 여인들" (루가8,3)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2) 大야고보와는 친형제이다. 3) 집안은 일꾼을 고용할 정도(마르1,20)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4. 성품 1) 일반적인 갈릴래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호쾌하고 격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大야고보와 더불어 형제들에게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마르3,17). 2) 뛰어난 체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3) 정직하고 순진한, 그리고 굳센 타입의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5. 소명 - 친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베드로/안드레아 형제와 같은 날 부르심을 받았다. -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소명을 받았고, 이 부르심에 주저 없이 따라 나섰다.
6. 사도로서의 요한 1)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애제자이다(마르5,37; 9,2; 13,3; 14,33). 2) 바울로는 베드로, 요한,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소 야고보)를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로 간주하였다(갈라2,9). 3)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특히 참으로 중요한 시기에는 항상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목격하였다(마르5,37; 9,2; 14,34). 4)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인지를 물었다(요한13,23). 5)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보살피라는 명을 받았다(요한19,26 이하). 6) 부활 날 아침,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이 비어있는 사실을 목격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요한10,2). 7)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그가 세말까지 죽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말씀을 들었다(요한21,22). 8) 요한복음 1장 40절의 제자가 요한과 동일한 인물이라면,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7. 예수님 승천 후의 행적 1) 사도 요한은 항상 베드로와 같이 있었다. 사도들의 목록에도 같이 붙어 기록되어있다. 2) 예루살렘 교회에서 요한의 권위는 최고 지도자와 같았다. 50년경, 바울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사도15,1-34), 요한을 "교회의 기둥과 같다"고 하였다(갈라2,3). 3) 언제 팔레스티나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57∼58년경으로 추측된다. 이는 바울로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베드로와 요한은 없었고 소 야고보와 원로들만 있었다(사도21,18)는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유다인들이 로마 제국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켰을 때(70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을 했는데, 이때 요한도 에페소로 가지 않았나 보고 있다. 4) 에페소에서 활동하다가 고령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이레네오, 에페소의 뽈리끄라테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이렇게 증언한다. 사도 요한은 바울로 다음으로 에페소에서 선교했다고 할 수 있다.
8. 순교 여부 1) 형제인 大야고보와 함께 헤로데 아그리파의 박해 때인 44년에 순교하였다는 설: 요한의 순교설은 주로 唯理主義者들이 제4복음서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이유 중의 하나인데, 1세기말에 저술된 제4복음서는 이미 44년에 순교한 요한의 저서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이에가 처음 주장을 하였고, 슈바르츠, 바우어, 고구엘, 유리켓, 바이스, 벨하우젠, 루와이즈 등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순교의 근거는 첫째,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마르10,35-40; 마태20.20-28)라는 말씀은 헤로데 아그리파의 박해로 44년에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고; 둘째,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인 빠삐아스의 증언(주님의 설교 2편)에 ‘신학자였던 요한과 야고보는 유다인의 손에 걸려 죽었다’라고 되어있으며; 셋째, 시리아인 순교자 축일표(411년경 작성됨)에 야고보와 요한은 같은 날 예루살렘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고; 넷째, 사도 요한이 에페소에서 살았다는 증거가 그리스도교 문헌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인 루체우스 카리누스가 150∼160년경에 쓴 「요한의 행전」에는 에페소에서 살았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이 책은 위서이기 때문에 믿을 수는 없다. 2) 순교설에 대한 반박: 주로 가톨릭측 학자들인데(앗보드, 브르스톤, 꾸레멜, 하르낙, 슈레르, 스피다, 쟈안 등), 반박 내용을 보면 첫째, 마르코복음 내용(마르10,35-40)에 대한 반박으로는 이 주장은 유리주의자들의 선입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유리주의자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초자연계 및 초자연적 능력을 부정한 결과로 이런 결론을 유추해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예언을 쓰기 전에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을 기록할 때, 복음사가가 만일 초자연계를 완전히 부정한다고 한다면 세상의 종말, 혹은 교회에 대해서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예언을 왜 기록으로 남겼는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의 예언도 꼭 피의 순교의 뜻으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피의 세례"라는 표현은 오리제네스 시대의 뒤, 곧 3세기 초에야 비로소 등장한 표현이다. 예수님이 마실 잔이나 고난의 세례는 꼭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받으실 여러 가지 괴로움을 총칭할 수도 있다; 둘째, 빠삐아스의 증언에 대한 반박으로는, 이것은 빠삐아스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두 군데의 문헌에서 따와서 한 증언이다. 하나는 그리스 수도자인 게오르기오스 하말도로스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역사가인 시리아의 필립보(430년)이다. 그러나 하말도로스는 명백히 필립보의 글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참고한 것은 필립보의 글이다. 필립보는 천지개벽의 예부터 시작하는 36권에 걸친 방대한 부피의 그리스도교 역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60∼80년 사이의 사건에 대한 발췌부분이다. 이 책은 광범위한 부분을 다루고는 있지만 너무 모순이 많아서 오늘날에는 著作이라고 보기보다는 확실치 않은 자료들을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編纂으로 여기고 있다. 비잔틴 역사가인 필립보의 권위는 요한이 장수를 누렸다는 지금까지의 전통을 부정하게 할 만큼의 가치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셋째, 순교자 축일표에 대한 반박을 보면, 순교자 축일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는데: 가. Breviarium Syriacum(시리아 순교자 축일표) - 12월 26일; 예루살렘에서 스테파노의 첫 순교 - 12월 27일; 예루살렘에서 사도 요한과 사도 야고보 순교 - 12월 28일; 로마에서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의 순교 나. 카르타고 순교자 축일표(505년경 작성됨) - 12월 26일; 스테파노의 순교 - 12월 27일; 세례자 요한과, 사도 야고보의 순교 - 12월 28일; 헤로데 대왕에게 살해된 무고한 아기들 다. 예로니모의 순교자 축일표 - 12월 27일; 복음사가 요한의 순교, 소야고보의 주교성성 기념 유리주의자들은 카르타고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축일표는 여러 많은 교회에서 어떤 인물이 기념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꼭 순교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기념의 명분은 순교뿐 아니라 주교 성성식이나 죽음, 또는 장례일이 될 수도 있다. 두 인물 이상이 같은 날 기념되는 것은 같은 날 죽어서만이 아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이고, 옛 전례에서 성탄절 직전이나 직후에 위대한 4명의 사도를 기념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같은 축일일 수도 있다.
9. 기타 3세기 초의 떼르뚤리아노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네로 황제에 의해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가기 전에 끓는 기름 가마 솥에 던져졌으나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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