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1854]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상징인 이유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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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시몬 | 작성일2003-06-26 | 조회수505 | 추천수1 | 신고 |
주님의 평화!
최 인숙님 안녕하세요? 신앙상담 봉사자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에집트, 카르타고 등의 고대 동방에서 죄인의 양팔과 발에 못을 박고 매달아 처형하던 도구였는데, 이 형벌이 로마 제국에 유입된 뒤에 반역죄인이나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할 때 형틀로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상 십자가는 예수님의 시기까지는 질문하신 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중형으로 다스릴 때나 사형도구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한 이후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전파된 이래, 십자가를 사형도구로 삼는 일은 폐지되면서 십자가의 의미는 단순한 형틀로서의 의미를 벗어나서, 도리어 인류의 속죄를 위한 희생의 제단,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써 당해야 하는 고통 등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질의하신 분은 현재 예비자를 위한 봉사자라고 하셨기에 그리수도의 상징인 십자가에 대하여 좀 더 공부해 보시고 예비자들에게 십자가의 참다운 의미를 더 잘 설명해 드리시라는 뜻으로 여기에 함께 소개하여 드리오니 이 기회에 십자가에 관해서 잘 파악해 보시기 바랍니다.
원래, 십자의 표시는 그리스도교 이전에도 원시종교들 사이에서부터 태양, 별, 생명의 나무, 종합, 중심, 완전 등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계시의 신비로 파악되었고, 예수님께서도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십자가의 신비를 깨우치도록 가르쳤고, 또한 사도 바오로도 그의 서한들 (로마 5,8/ 1고린 1,17/ 갈라 4,16/ 필립 2,6-11)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중요한 테마로 다루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공경은, 4세기 초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뒤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데, 역사적으로는 성녀 헬레나에게 십자가 발현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서 320-345년 사이에 골고타에서 예수님이 2명의 도둑과 함께 못 박혔던 것으로 보이는 3개의 십자가가 발견되어, 이를 안치할 성당과 부활 성당이 예루살렘에 건축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35년 9월 14일이 위의 두 성당의 헌당 축일로 제정되자,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공경의 대상으로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엔 로마 교회에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 뒤에 692년 트룰라눔(Trullanum) 교회 회의를 통해 십자가 공경은 강화되었고, 787년 제 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들에게 희생과 고통, 경우에 따라서는 포기의 삶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희망으로 오늘을 힘차게 건설하고 기쁜 마음으로 희생하고 죽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결코 죽음의 터널을 지나지 않고서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고통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기쁨속에서도 영원한 기쁨을 위한 고통을 감내할 줄 알지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죄인의 기쁨이고, 죽음을 거치고 극복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가르침은 복음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며,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망각해 버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고통만을 지적하는 가르침도 복음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의 십자가는 개신교의 십자가와 달리 예수님의 형상까지 조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형상은 십자가에 달려 숨지신 모습이고 몸에 오상(五傷)이 있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십자고상(十字苦像 고통스러운 형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십자고상을 눈에 잘 띄는 곳에 걸고, 쳐다보고 기도하며, 강생구속과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각 성당마다 십자가의 모양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성당마다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라는 궁극적인 의미가 똑같지만, 그 십자가의 예수님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냐에 따라서 십자가의 모양이 다를 수가 있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을 ’자신의 비움’으로 해석할 때는 텅빈 공간을 강조하는 십자가의 모양이 생길 것이고, 예수님의 피흘린 모습을 강조할 때는 가시관이 예수님을 짓누르면서 피흘리는 모습을 강조할 것이고, 등등의 강조하는 점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양이 다른 십자고상에 대하여 왜 통일성이 없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십자가들은 무슨 깊은 의미를 나타낼려고 하는 것일까 하고 묵상하면서 고민해 본다면 자신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나번 대희년 때에는 대희년의 십자가가 널리 퍼지고 있었는데 이 십자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이 강조되고 있는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지난번 어떤 신앙상담의 질문에서 추기경님, 교구장님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계시는데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친히 돌아가신 십자가 나무를 세분해서 거기에다 모셨다고 들었다면서 그것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닌데 말입니다. 주교 이상 되시는 분들은 표시로써 십자가를 하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는 일반 쇠붙이로 하면 품위가 없으니까 조금 고급스러운 보석이나, 금으로 만든답니다. 거기에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나무가 다 들어갔다고 한다면, 앞으로 몇 백년 후에는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처럼 무거운 짐이란 뜻으로 누가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 돌아가신 십자가는 콘스탄틴 대제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찾아내어 그 조각들이 전 세계에 좀 있긴 하지만 그걸 다 주교님 십자가에 넣는다고 하면 주교님만 전 세계에 4천명 가까이 계시는데 4천명이 조금씩 가지고 계시면 4천조각, 몇 백년 후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상징적으로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질의하신 분께서 공부하시는데 참고자료가 되시기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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