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천주교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점들을 풀어주세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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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전영은 | 작성일2006-01-23 | 조회수390 | 추천수0 | 신고 |
저도 답변 드립니다^^
제 짧은 지식보다 많이 도움이 되실 것 같아서
차동엽 신부님의 [여기에 물이 있다] 책에서 발췌한 글을 올립니다.
1. 성모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p271 <마리아, 믿는 이들의 도움>
마리아는 우상인가
가톨릭은 마리아를 신(神)으로 숭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느님 뿐입니다.
마리아는 다만 공경할 따름입니다. 공경하되 다른 성인들께 드리는 공경 중에서 최고로 더 정성껏 공경합니다.
그래서 삼위이신 하느님께 ‘흠숭지례 (欽崇之禮)’ 를 드린다 하고
마리아에게는 가장 존경한다 하여 ‘상경지례 (上敬之禮)’
그리고 성인들에게는 ‘공경지례 (恭敬之禮)’ 라 합니다.
‘흠숭’ 과 ‘공경’ 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신앙의 삶을 산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마리아를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된"(루가 1, 42) 여인이라 칭송하였습니다. 태초의 하와 이래 역사 속에서
찬란하게 이름을 떨쳤던 여인들, 오늘날 이 세상에서 탁월한 재능이나 업적이나 미모로 세간의 갈채를
받는 여인들, 미래에 태어나 최고의 찬사와 존경을 받게 될 여인들을 통틀어도 성모 마리아보다 복된
여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말 그대로 모든 세대를 관통하며 "여인중에 가장 복된" 여인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복됨’ 에는 그 어떤 여인도 견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예수님의 어머니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첫 기적을 베푸신 ‘가나의 혼인 잔치’ 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잔치 도중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리게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십니다.
마리아는 주저 없이 시중꾼들에게 이르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중략)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는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구세사(救世史)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라고
성모송을 바칠 수 있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 기적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략)
만일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짐으로써 일어나는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었다면,
그리고 잔칫집 주인과 신랑 신부의 난처한 상황에 대한 ‘연민’ 이 없었다면
성모님이 아들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까요?
그리고 아들의 능력에 대한 남다른 믿음이 없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아직 당신의 ‘때’ 가 아니라며 주저하는 아드님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것은 다른 아닌 성모님의 부탁에서 강하게 전해져 오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 곧 연민 이었을 터입니다.
바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사랑이
성모님과 예수님을 한마음으로 이어준 다리였습니다.
...(중략)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가리키며 유언하셨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예수님이 어머니를 부를 때 쓴 호칭은 그리스 원어로 귀나이(guynai)였습니다.
옛 성서에서는 이 호칭이 ‘여자여’ 라고 번역되어 마리아를 ‘비하’ 시키는
것으로 곡해되고 있지만, 원어의 용법은 오히려 약간 높여 부르는 ‘존대’ 의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여인이시여’ 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는
셈족 계통의 표현 방식(판관 11,12 ; 2사무 16, 10 ; 1열왕 17,18 ; 마태8,29 ;
마르 1,24 ; 루가 4.34 참조)입니다. 즉 그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높여서
부를 때 쓰던 단어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어머니’ 가 아니라 ‘어머님’ 하고
부르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여하튼
인류 구원의 대업(大業)을 완수하려는 절정의 순간, 절체절명의 찰나에
예수님께서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단지 제자 요한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사적인 부탁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한이 상징하는 ‘제자단’, 나아가 ‘교회’ 의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사적인 아들로 묶어 두지 않고 공인의 길을 가도록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가장 필요한 순간에 늘 곁을 지켜 주신 어머니에게 예수께서는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을 위해 미련 없이 내어 놓으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어머니를 교회의 어머니로 양도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께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당부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에게
어머니를 모시도록 명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제자에게, 사도단에게, 교회에게 든든한 어머니가 생긴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이 있는 곳에는 늘 마리아가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던
그 자리에 마리아는 제자들, 예수의 형제들, 부인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습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 예수님을 ‘탄생’ 시켰던 마리아는
이제 교회를 ‘탄생’ 시키기 위해 성령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믿는 이들의 도움이신 어머니
...(중략)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떤 의미에서 ‘믿는 이들의 도움’ 이실까요? 크게 보아
마리아는 모범, 발현, 전구 로써 ‘믿는 이들의 도움’ 이십니다.
...(중략)
전구
성모 마리아는 ‘전구’ 로써 ‘믿는 이들의 도움’ 이 되십니다. 여기서 ‘전구’ 라는 말은
단지 그냥 사무적으로 전해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전구는 우리의
사정과 필요를 아뢸 때, 그것을 자비심과 연민으로 깊이 공감하시고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기도’ 에 ‘자신의 기도’ 를 보태서 전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구를 청할 때 우리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전구를 청하는 기도는 성모님을 통한 ‘전달’ 의 효과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변호’ 와 ‘중재’ 나아가 ‘연대’ 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는 마리아께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청하는 것은 결코
하느님께 ‘손실’ 을 끼쳐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마리아에게 드리는 것은
조금도 줄지 않고 틀림없이 모두 하느님께 바쳐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이
불어나서 하느님께 바쳐집니다. 성모 마리아는 충실한 전달자 이상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되시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성모님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을 거치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 주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께 우리가 나아가는 데 장애가
아니라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입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의 은혜를 못 누립니다.
2. 고해성사, 사제의 사죄권??
p314 <삶을 동반해 주는 성사의 은총들>
토털 서비스 :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돌보시는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꼼꼼하게 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셔서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권한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베푸시는 완벽한 토털 서비스! 이것이 바로 7성사가
지니는 의미입니다. 7성사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한 사람의 영적 일생을
동반해 줍니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이 7성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요한 모든 단계와 시기에 관계된다.
성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며, 치유하고 사명을
부여한다. 이 점에서 자연적인 삶의 단계들과 영적인 삶의 단계들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210항)
그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태어남(세례성사) → 양육됨(성체성사) → 성숙함(견진성사)
→ 타인을 위한 봉사1(혼인성사) 또는 타인을 위한 봉사2(성품성사)
→ 용서(고해성사) → 치유(병자성사) 또는 죽음(종부성사)
의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략)
용서: 고해성사
약속의 말씀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릴 정도로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말씀과 행동으로
죄에 멍든 마음과 육체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로써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
하셨다"(마르 2,5).
그리고 가장 은혜로운 것은 예수님 자신이 지니고 있던 용서하는 권한을 제자들에게
물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8,18).
부활하신 예수님은 첫 발현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사죄권을 부여하셨습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 사죄권은 오늘날 주교들 및 그들로부터 위임된 사제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여간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들에게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닌, 사제의 들리는 음성으로
"당신의 죄는 사하여졌습니다" 라는 선언을 듣는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로써 받는 은총
사람은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 하느님 및 교회와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은총을 얻습니다. 이 은총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백자와 하느님과의 화해 : (중략)
2) 교회 공동체와의 화해 : (중략)
3) 벌의 사면 : (중략)
4) 양심의 평화 : 벌의 사면을 받음으로써 영적 위안을 얻고 마음이 안온해 집니다.
5) 영적 싸움을 위한 힘의 증대 : 다시는 죄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1496항)
개인이나 단체가 죄로 입은 상처가 여러 가지인 것처럼 회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치유도
가지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죄를 위해서도 고해성사를 성의껏 자주 받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반복이거나 심리적 수련이 아니라,
세례의 은총을 완성하려는 항구한 노력이며 예수님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해 성사의 다섯 단계
고해성사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친 후 주님께 적나라하게 자기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중략)
고해는 의무가 아니라 권한
가끔 고해성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것이지 같은 인간인 사제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는
수치를 겪어야 하는가?"
더구나 극소수의 신자들도 사제와 잘 아는 처지여서 죄를 고백하기가 부끄럽다고 주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해성사는 인간의 나약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의 파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값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속죄는 인간인 사제의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사제를 통한 그리스도의 행위 입니다.
혹시라도 사제가 비밀을 누설하면 어쩌나 하는 망설임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우이며 유혹입니다.
비밀 엄수는 사제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고해의 비밀은 2천 년의 교회 역사가 보증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에 관해 꼭 알아둘 것들
1) 대죄와 소죄 : (중략)
2) 상등통회(上等痛悔)와 하등통회(下等痛悔) : (중략)
3) 7죄종(七罪宗): (중략)
4) 모고해(冒告解) : (중략)
5) 고해성사의 빈도 : 교회는 고해성사를 1년에 적어도 한 번을 받아야 한다고 교회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냉담자, 행방불명자의 최소 한계선을 알려 주는 것이고, 성사를 자주 보는
것은 자기의 발전에 좋은 효과를 낼 것입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신부님들도, 그리고 교황님께서도 고해성사를 보신답니다^^
(아래 글은 평화신문에서 발췌한 것)
신부나 수도자는 물론 교황도 고해성사를 본다. 일반적으로 신부들은 가장 존경하거나 마음이 통하는
선배 사제에게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본다. 이때 사제 생활의 어려움, 고민 등을 함께 나누며
영성 지도를 받기도 한다.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은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한 명의 고해사제를 정해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반드시 한명을 통해서만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3. 술과 담배 평화신문의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 질문
: 남편이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웁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내 남편은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자랑할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남편 건강이 걱정입니다. 술과 담배를 끊게
하는 성서적 근거나 교리가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심현지(아가페, 35) 경기도 일산.
예수님은 담배와 술을 했을까. 담배는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였을 때 원주민들이
피우던 것을 유럽에 들여온 것이다. 예수님이 담배를 알았을리 없다. 하지만 술은 즐기셨던 것 같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루가7,34).
예수께서 자신을 비난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또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써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베푼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도 바울로도 디모테오에게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을 위해서나 자주 앓는 그대의 병을 위해서 포도주
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1디모 5, 23) 하고 권한다.
물론 성서는 과도한 음주를 금지하고 있다. 성서는 ‘술에 취해 진탕 마시고’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은 이방인들이
나 하는 짓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남편에겐 이처럼 과음을 경고한 에페소서 5장18절, 루가복음 21장34절, 로마
서 14장21절 등이 도움이 될 듯하다.
그런데 왜 개신교는 술과 담배를 금할까. 술과 담배를 금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극히 일부 개신교 종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부분의 종파나 유럽을 위시한 다른 지역에서는 술과 담배를 금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
에 들어온 개신교가 청교도 성향의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주를 금한 청교도적 태도를
흠잡으려는 것은 아니다.
지나쳐서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비단 담배와 술뿐만 아니라 음식도 과식을 하면 좋지 않고 반찬도 너무
짜거나 맵게 먹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술과 담배는 성서나 교리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자문=서울대교구 교회법연구소>
4. 하나님을 모른다 하여도, 예수님과 같이 착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면, 천국에 갈수 있다??
여기에 대한 글은 결국 찾지 못해서 제 짧은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일단 저는 가톨릭에서 위와 같이 배운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하느님을 모르고 착하게는 살 수 있겠지만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할 때야말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보잘것 없음을 느끼는 때야말로
인간이 가장 거룩해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모른채 스스로 거룩해진다는 건,, 아마도 그건 교만이 아닐지^^
또 한 가지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 네 번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의 열정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_*
만일 실제로 저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 한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1) 앞으로 하느님을 믿지않고 거룩하고 착하게 살려는 시도를 하겠습니까?
2) 하느님을 모른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지금껏 거룩하고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라해도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살도록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을 것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느님을 알리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우리가 이 네 번째 문항의 답을 어떻게 정하건 말이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토론은 영적 성장을 이루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어야하지
단순히 꼬투리를 잡기 위한 이건 맞고 이건 틀리다 식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늦게나마 올린 이 글이 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님의 궁금증 덕분에 저두 나름대로 책을 찾아보면서 유익한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글~
이것도 차동엽 신부님의 [여기에 물이 있다] 에서 가져왔습니다
p424 <당신을 위한 희망의 편지>
...(중략)
우리의 삶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삶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1515-1582)가 일러줍니다.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마라
생각하라
네 지닌 영혼은 하나밖에 없는 것임을
한 번 밖에 더 죽지 않는 것임을
네 지닌 목숨이 짤다랗고
이것만이 네게 달린 것임을
하나밖에 없는 영광, 그것이 영원한 것임을
그제야 너는 많은 것을 버리리라.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마라
그 무엇도 너 무서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이 모두를 얻으리라
님을 모시는 이
아쉬울 무엇이 없나니
님 하나시면
흐뭇할 따름이라.
네 소원, 님을 뵈옴이요
네 두려움, 그를 잃을까 함이요
네 고통, 그를 못 누림이요
네 기쁨, 그리로 갈 수 있음이어야 하나니
그제야 너는 크나큰 평화를 더불어 살으리라
주여, 당신 안에 숨은 영혼이
또 무엇을 더 원할 수 있으리오
사랑하고 언제나 더욱 사랑하고
사랑으로써 모든 것에 불붙이고
또한 새로운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당신이 그 날을 맞이할 때까지 이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를 기도합니다.
...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찬미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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