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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례미사는 주일에도 당연히 합니다 카테고리 | 천주교
작성자한정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21 조회수1,306 추천수1 신고
당연히 장례 미사는 주일에도 거행합니다. 의정부 교구 소속인 우리 본당에서는 그러한 경우에도 항상 장례미사를 거행합니다. 작년에도 같은 질문에 대하여 본란에서 저가 답변드린 바가 있는데, 주일날에도 장례미사를 거행한다는 강력한 권고의 내용이 들어 있는 우리 의정부 교구장님의 사목교서를 아래에 올려드리오니 올려주신 질문과 관련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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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성월을 맞이하여 부활의 희망을 담은 교회의 상장례예식과 봉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찾아가는 교회, 함께 하는 교회”실현을 위해 반포하는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의 교서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삶에로 (Per Mortem ad Novam Vitam)


서 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부활의 희망


우리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미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1)


우리는 이 기도를 바칠 때마다 돌아가신 형제자매들을 잃은 슬픔 안에서도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커다란 위로를 받으며 천상의 성인 성녀들과 하나되는 벅찬 감동을 받습니다.


저는 우리교구의 첫 사목교서“찾아가는 교회, 함께하는 교회”에서 현시대는 죽음의 문화가 만연하고 있음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사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맞이해야하는 고통의 절정이며, 죄의 결과입니다. 또한 현시대는 물질만능주의와 증가하는 이혼률, 가정의 붕괴, 노인문제, 자살, 생명 경시풍조, 인간소외 등 어둠의 그늘진 절박한 환경에 있는 모든 이들이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2)


그러나 우리의 부활 신앙은 “죽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 제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門)”이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 자체의 의미와 내용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희망의 신앙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상 희생제사의 재현이며 기억인 미사성제는 부활신앙을 통한 희망을 담은 빠스카의 거룩한 나눔의 축제이며, 동시에 죄를 씻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제사입니다. 이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는 죽음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도 “부활의 빛이 되어 찾아오시는 하느님”, “새로운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관상합니다.


저는 이미 교구 설립의 첫해인 성체성사의 해(2004년)에 반포한 첫 사목교서에서 “교회의 살아있는 생명의 증거이며 우리 신앙의 모든 원리가 깃든 이러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관상3)”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미사성제에서 빵이 쪼개어 나누어지는 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또한 나누라고 초대하십니다. 가난하지만 함께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바로 그들 안에서 나누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남과 더불어 나눌 때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삶을 생기 있게 바꾸어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선포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일 것입니다.


성서에 전해지는 부활하신 주님은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 가시어”, “함께 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되찾아 주십니다. 어둠이 깊게 깃든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꿈을 잃은 이들에게 잊혀진 꿈을 되찾아 주시며, 슬픔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기쁨과 희망으로, 의심은 믿음의 확신으로 변화시켜 주시어 도망가고 싶은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렇듯 “찾아 가시어” 그리고 “함께 하시며”실망에 젖은 이들의 마음을 희망과 용기가 솟아나도록 위안의 원천이 되어 주십니다. 교구장 착좌미사에서 반포한 “찾아가는 교회, 함께하는 교회”라는 표어 안에는 이처럼 부활 신앙의 모든 원리가 깃든 성체 성사의 신비, 육화의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교서를 통해 주님께서 주신 부활의 희망을 담은 교회의 상장전례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죽음의 그늘진 라자로와 그 가족들을 “찾아가시어”,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신 “함께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관상하므로써 보편교회와 일치하여 부활의 빛을 비추는 성체성사의 삶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교 장례식의 참된 의미는 미사성제 안에서 드러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령을 통해 장례식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었습니다. “자모신 교회는 장례예식으로 죽은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릴 뿐 아니라, 또한 자녀들의 희망을 북돋아 주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후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천명해 오고 있다.”4)


우리 교회의 장례예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위와 같이 천명한 것처럼 “죽은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일은 바로 영원한 대사제이시며 흠 없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입니다. 이러한 직무에로 초대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로서 세례때 부여받은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봉사직을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부활이시며 빛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죽은 이들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드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교회의 장례예식은 고인에 대한 이별의 슬픔에 대한 애도라는 본성적인 의미를 넘어서 부활의 희망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믿음을 천명하는 복음화의 자리입니다.


믿는 이들의 부활할 육신은 바로 다름 아닌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이며 성령이 머무셨던 궁전입니다. 성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둔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5)의 정성을 본받아 믿는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성모님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6)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장례식의 참된 의미는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경축하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세례로 한 몸이 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장례식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 빠스카의 제사인 미사에서 가장 잘 드러나며 온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7)


미사성제를 통해 죽은 이들의 영혼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십자가상의 희생(SACRAFICIUM)으로 정화되는 것입니다.8) 또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의 영혼을 성인들과 함께 드리는 통공으로 씻어주고 라자로를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상가(喪家)의 가족들을 위로해 줍니다.9)


미사성제는 그리스도교 장례식의 중심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상의 희생제사인 미사성제 안에서 그리스도의 빠스카 축제(CONVIVIUM)인 나눔의 성찬례와 그리스도 희생제사의 기억(ANAMNESIS)과 재현이 이루어집니다.10) 그 어느 한 가지의 성격만을 기울여 생각할 수 없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장례미사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은 정화되고 유가족은 위로를 받으며,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부활의 신앙을 확인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 여정의 시작은 부활의 희망 안에서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빠스카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보편교회는 전례 안에서 위령미사의 등급11)중 장례미사를 가장 높은 미사로 규정하였으며 의무 대축일,성주간 목요일, 빠스카 삼일, 대림시기, 사순시기, 부활시기의 주일이 아니면 어느 날에나 다 봉헌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였습니다.


장례미사의 등급12)은 연중 주일미사의 등급보다 3등급이 더 높은 미사이기에 평일에도 두 개의 독서13)와 3개의 제대초 그리고 부활초14)를 켤 수 있도록 하여 부활의 의미를 전례적인 표징으로 드러내도록 하고 있습니다.15)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며 주일에 우리는 미사를 통해 부활의 신비를 축제로 재현합니다. 이러한 전례의 정신과 규범에 의하여 주일에 거행되는 장례미사는 더욱 풍요로운 부활의 신앙을 성사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며 찾아가는 선교의 커다란 장이 되는 것입니다. 사목자들은 유가족 중에 쉬는 교우들이 있다면 고백성사를 받도록 배려하여야 하며 미사에서 영성체를 함으로써 고인을 위하여 봉헌되는 성찬의 제사에 새로이 참여할 수 있도록 사목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16)


만약 주일에 미사가 많은 본당에서는 교중미사를 제외한 기존 미사시간의 미사를 장례미사로 봉헌할 수 있습니다. 주일 장례미사가“육신의 부활을 믿는”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전례적 표지가 되는 것이며, 또한 장례미사에 참석한 비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신앙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자연스런 초대가 될 것입니다.


2. 고별식의 의미


천주교회의 장례예식은 장례미사 전 밤샘기도, 장례미사, 그리고 고별식 세부분으로 나누어 실행됩니다. 장례미사 중에 혹은 장례미사를 성당에서 거행할 수 없을 시기에도 고별식은 거행합니다. 고별식은 시신를 발인(發靷)하기 전에 혹은 매장하기 전에 교우들의 공동체가 마지막으로 가는 형제에게 인사하는 예식입니다. 죽음으로 서로 갈라진다 하지만 고별식에서 가족들의 손에 들려진 촛불처럼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인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까닭에 죽음 자체로도 갈릴 수 없는 하나 된 통공을 드리며 이별을 아쉬워합니다.17)


따라서 고별식은 모든 장례식의 절정이며 아름다운 예절입니다. 우리는 고별식을 통해 고인에 대한 석별의 정을 나누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 예절은 영혼을 깨끗이 하는 예식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됩니다. 영혼의 정화는 미사성제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8)


3. 우리의 아름다운 상제례 문화인 연도(煉禱)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상제례 문화는“연도(煉禱)의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초상이 나면 “연도(煉禱)났다”고 하였습니다. 초상집에 문상을 가자고 할 때에도 “연도(煉禱)하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또한 명절이나 제사 때 우리는 연도를 바칩니다.


연도(煉禱)란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상제례를 대신하는 말인 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토착화된 우리의 기도이며 봉사의 행위와 함께 하는 상제례 문화입니다. 많은 쉬는 교우들이 상가(喪家)봉사와 연도(煉禱)봉헌을 받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며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이들도 우리의 아름다운 전례와 기도 그리고 봉사에 감화(感化)되어 교회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연도는 한국천주교 박해의 원인이었던 제사논쟁에 대하여 부활신앙을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풍습과 접목시킨 토착화된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유교의 제례가 박해시대 당시 조상신에 대한 ‘미신적인 행위’로 금지된 것을 알게 된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들이 신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마련해야 했으며 특히 인륜에 해당되는 장례와 제사를 새로운 의식으로 토착화하여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에서 연도가 탄생된 이유입니다.


연도(煉禱)는 장례예식 중 말씀의 전례 형태로 밤샘기도에 해당하며, 우리의 전통가락으로 역사적인 발전을 거듭한 아름다운 노래이기도 합니다. 또한 연도는 시대의 문화에 따라 발전하였으며 우리가 자랑스럽게 간직해야할 우리 교회의 전례적이며 영성적인 유산입니다.


4. 전통 제사와 미사성제의 관계성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제사이며 죽음에서 부활하신 살아있는 대사제의 현존하는 완전한 의식입니다. 따라서 천주교회의 미사는 단하나의 제사입니다.


가톨릭 교회 전례의 중심이 되는 이 미사성제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의 참여와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를 포함한 통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제이시며 동시에 흠없는 제물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봉헌되는 가장 완전한 제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모두 미사라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제사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성장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유교의 제사는 조상신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우리 미풍양속의 개념에서 조상을 기억하고 가족, 친척과 함께 가족애를 다지는 전통으로 현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산업화와 핵가족화로 인한 가족애의 저하(低下)를 막고 진정한 가족애를 느끼는 목적으로서의 제사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통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재확인하였습니다.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에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데 있다.”19)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우리의 전통유산인 효와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5. 올바른 제례문화에 대한 인식 필요


연미사 및 전통제례와 관련하여 유교의 삼우제(三虞祭)와 불교의 사십구제(四十九齊)에 대한 개념 등은 천주교의 부활 신앙과는 다른 바탕에서 성립되었으므로 그 의미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토착화를 위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제(虞祭)란 갓 돌아가신 영혼을 위로하는 유교의 제사입니다. 여기에서 편안할 우(虞)자는 형체(形體)가 땅 밑으로 돌아가고 없어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에 싸여 방황하고 있는 영혼을 편안하게 해드린다는 안신(安神)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제를 세 번이나 지내게 되는데 이를 위해 가족들은 마음과 몸을 정결히 하며 효(孝)의 정신으로 정성을 다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삼우제의 효(孝)정신을 토착화하여 삼우(三虞)미사가 있습니다. 또한 이때에는 삼우제의 본정신을 이어받아 가족들 중에 쉬는 교우들은 교회의 부활 신앙으로 돌아오며 고백성사로서 영혼을 정화하고 가족공동체를 다지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삼우제(三虞祭)는 교회에서 효(孝)의 표양으로 받아들여 예수님의 죽음 이후 3일간 부활을 기다리는 “정화와 안식”의 미사로 그 의미를 토착화하여 삼우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주 바람직한 전례입니다.


사십구제(四十九齊)는 윤회(輪回)하기 위한 판결을 기다리는 죽은 영혼이 7명의 각 재판관에게 7분야의 재판을 받는 형벌과 무서운 심판의 기간을 의미하며 49일째 되는 날 염라대왕의 심판으로 윤회되는 그날에 정성을 다하여 심판을 가볍게 한다는 불교의 윤회관이 드러나는 가장 대표적인 불교의 제례양식입니다. 사십구제(四十九齊)의 미사는 불교의 제례문화가 어떤 해석 없이 천주교의 연미사에 그대로 수용된 문화의 역전이현상(易轉移現想) 입니다.


따라서 탈상과 관련하여 봉헌하는 사십구제(四十九齊) 미사는 주님의 부활 이후 성령의 강림을 상징하는 50일 미사 혹은 일곱 번의 안식년 다음 50년이 되는 완전한 회복과 자유의 해인 희년(僖年)20)의 의미를 담은 50일 탈상미사로 바뀌어야 합니다.


탈상(脫喪)이란 상복을 벗는다는 의미로 전통적인 우리 상제례 문화의 용어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며 부활을 믿는 우리는 기도생활과 성사생활 안에서 끊임없이 죽은 이들을 위해 통공을 봉헌해야 합니다. 하지만 슬픔을 딛고 부활의 신비를 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어느 정도 애도와 기도의 기간에 대한 한정으로서 탈상의 기간은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간은 어떤 제한적이며 규정에 의해서보다는 위에서 언급한 예처럼 그밖에 자신과 가정의 처지에 따라 교회적이며 성서적인 개념 안에서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6.  현대의 장묘문화에 대한 인식의 개선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상황에 맞는 올바른 장묘문화를 이룩하여야 하겠습니다. 좁은 국토 그리고 무분별한 묘지개발 등으로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이며 성령의 궁전이었던 시신21)은 편의주의와 물질주의 안에서 부활의 신앙을 드러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영적도움을 간청하고 그들의 몸에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토착화 정신에 따라 신자들의 장례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조하기에 힘써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와 지역 사람들의 정신과 풍습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가문의 전통이나 지역적 풍습, 문화에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다 받아들이도록 하고 혹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빠스카 신비에 대한 신앙과 복음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것을 토착화하여야 하겠습니다.23)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정신에 따라 화장24)과 그밖에 다양한 장묘형태가 자유로워졌습니다. 시대와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다양하고도 발전된 장묘문화가 필요합니다. 또한 장기기증과 시신기증 등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뜻깊은 사랑과 나눔의 문화는 매우 고무적인 것입니다.


결   문 :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요한 11,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십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요한 11,34-36)하고  표현한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라자로의 장례식에 찾아오시어 그를 일으키시기 전에 애도의 눈물을 흘리시는 참으로 인간이시며 생명의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슬픔에 잠긴 유가족인 마르타에게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 25-26)하며 부활의 희망을 굳건히 해주시고 신앙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한 토마 사도를 찾아오시어 부활의 증거인 십자가상의 오상(五傷)을 보여주십니다. 이처럼 생명이며 부활이신 그리스도는 찾아가 만나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상실감으로 어둠이 드리워진 고통 받는 이들의 마음에 부활의 빛을 비추시며 그 안에 새 생명의 기운이 움트게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찾아가시어” 그리고 “함께하시며” 평화를 빌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그러기에 앞서 지적한 현시대 죽음의 문화와 다양한 고통 안에서 부르짖는 이들과 상실감에 빠져 슬픔과 아픔에 젖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감싸주며 그 안에 희망과 생명이 깃들도록 애쓰는 이들 안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은 구체적인 우리를 통해 그들을 찾아가시고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위로자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협조자는 우리와 함께 머무시며 위로의 직무를 다하시는 성령이십니다. 부활의 은혜는 그렇기에 성령께서 비추시는 은혜이며 그분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함께 머무시는 현존이 가져다주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사랑의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권리가 있을 따름입니다. 죽음에 그늘진 모든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생명의 하느님께 편히 맡겨드리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누리어야 할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인 우리 믿는 이들의 죽음은 부활의 신앙이 만개(滿開)하는 시기이며 신앙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기도가 하나 되는 복음화의 자리입니다.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며, “찾아가는 교회”, “함께하는 교회”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의 부활신앙을 드러내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죽음에 그늘진 모든 이들에게 찾아가 봉사하는 그리스도 복음화의 장(場)을 정성껏 실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니”(위령감사송1)



2005년 11월   2 일  위령의 날에

천주교 의정부 교구장  주교  이 한 택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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