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살에 대한 고민의 시작을 하는 이유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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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의형 | 작성일2011-01-31 | 조회수729 | 추천수0 | 신고 |
제 자신이 지금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반성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욱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라도 이제까지 온 길에서 새로운 길을 가야한다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한 답을 찾았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국 사람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대해서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가 입니다.
답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 자신에게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바로 영혼이 깨어난 것만큼 좋은 점도 있지만, 현실에서 절망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마치 종착역처럼 새로운 길도 보이지 않고 새로운 대안도 막연하고 어느 누군가 특별한 길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에게 시작했지만 결국 사회와 국가와 온 인류가 공감하기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의 인류역사라고 봅니다.
결국 내 영혼이 세상과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어떻게 일치가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함께 가야 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제까지 잘 해왔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깨어났고 많은 것을 보고 듣지만 어느 한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선교, 복음의 전파가 한계에 도달한 모습에 대한 고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잘 해왔다! 하지만 그 한계를 조금더 극복하여 복음의 전파를 질적으로 영역적으로 얼마나 넓힐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동안 한계로 여긴 것이 무엇일까? 결국 서양식 사고의 한계를 보았고, 인간 중심이 과도한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언어와 법과 제도의 틀에서 우리가 고착된 자화상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이 틀을 넘어서거나 깨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바로 자살이라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살 막연히 반대해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고 싶은 것이 저의 몸부림입니다.
얼마나 간절한 문제입니까?
그리고 모두가 공감하는 하느님을 다시 재발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동안 신앙으로 알고 있던 다른 모습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자신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게 세상과 내 영혼이 함께 갈 수 있을까 입니다.
이제까지 함께 하지 않았던 방식이기도 하고, 이제까지 함께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함께 해야할 일이 지나쳐왔던 면이 이런 논의라는 것입니다. 참 나我와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수님의 길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죽음에 대한 논의입니다. 바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틀에서 새롭게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아니 진정한 하느님의 종인 사제의 모습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감추고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난 확신하고 있는데 다른 부분에서는 정치적이다. 세상 일이다 하면서 멀리 보고 있는 점을 끄집어 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던 시대처럼 과거의 모세의 율법이 주인되어 신앙인이 자유롭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논의조차 어려운 만큼 자유롭지 않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게 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개인이 결국 교회와 사회를 벗어나서는 어떠한 결론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 대해 경계를 너무 지나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어쩌면 더 지독하게 경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더욱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과 교회를 더욱 멀리하는 것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는 절박함을 알게 되어서 더욱 때를 쓰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부모님이 결국 자신의 자식에게 져줄지 모른다는 막연함으로 시작된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고민할 것은 정말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실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교회가 말입니다. 제 생각이 맞다고 해도 교회가 틀리다고 하면 저 개인은 맞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하셔도, 결국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제 자신에게는 진정한 자살이기도 한 것입니다.진정한 의미 찾기가 되지 않는다면 결국 죽음이고 그 방향이 결국 제 자신이 하느님께 있음을 마지막이라도 주님을 향하여 가르키며 죽고 싶은 바람이 큰 것뿐입니다.
니이체가 신이 죽었다는 말은 결국 지금은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가?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을 통해서 하느님에 대한 불신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게 가장 큰 문제이고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지금 원하는 것이 바로 영혼문제이고, 이 영혼이 어떻게 세상과 자유로운 사람들이 많은가입니다. 이는 교회의 문제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지, 다른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라는 저 개인적인 믿음이고 신앙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계속 죽음과 자살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의하는 자세와 태도가 결국 정답이고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죽을 것이라는 답입니다. 이게 바로 지금 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정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생각이고 이렇게 말뿐입니다. 이를 교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죽음일지라도 어떻게 죽었는지 삼가 하고 고민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진정한 영혼의 모습을 삶을 통해서 그 결단을 통해서 진정한 한 사람의 영혼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바른 앎이란 결국 바른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고, 지금도 참 예수님의 메시지를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의는 결국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을 분명히 따르는 것이지만, 결국에 성령님과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가 입니다. 결국 이 죽음을 통해서 정말 죽음을 두려움 없이 맛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것이 진정한 죽음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요?
결국 제가 어떻게 죽어야 할까요?
그게 혼자인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말문을 열어보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문을 볼 것 같아서이지요.
자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과 상관이 없든 있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리고 묻지만 살인까지........
또한 보이지 않는 경계와 두려움이 .........
그리고 미래가 더욱 불확실하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2012년이 뭐이 어쩌구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말은 완전히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저의 자살론에 대해 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게서 분명히 들어나는 것은 내 영혼과 세상이 너무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세상이 너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반듯이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교회의 역활이 더욱 확장되어야 하지,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이 되어야 하지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실천이 아닐까요?
그런데 결론은 이렇습니다.
서로 일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논의할 가치가 없다입니다.
또 하나는 일치가 되기 위해서는 논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 될까요?
저는 실천하려고 하는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살을 통해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와 같은 문제라고 생각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자살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살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어떻게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는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했던 것이 바로 가톨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쟁반대, 사형제도 반대, 낙태반대 등등
그런데 이런 모든 논의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결국 이런 논의를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역활이 먼저 법과 제도에 적용되어야 하고 우리 삶에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이 자유로워야지 억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찾아내려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천이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질과 폭이 넓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신앙인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문제가 되고, 문제였던 것이 지금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의 인간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해답은 인간의 수평적인 많은 문제에서 하느님께로 향한 수직적인 문제로 더욱 수직적으로 얼마나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냐가 해답이고 우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의들 때문에 사제를 향해 구원의 몸짓과 손짓을 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고 있는 지금의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소원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제가 이렇게 절박하기에 목마름 사슴처럼 당장이라고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소리소리를 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의 신앙이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제게 물으신다면 저는 이런 실천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저의 게으름과 부족함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막연하지만 가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어리석은 것일까요?
영원히 확실한 답을 찾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가요?
저는 정말 다급합니다. 입술이 마르고 눈이 더욱 불거지고 있습니다. 그냥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닐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금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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