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 나름의 해답과 저의 입장 정리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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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의형 | 작성일2011-03-01 | 조회수612 | 추천수0 | 신고 | |||||||||||||||||||||||||||||||||||||||||||||||||||||||||||||||||||||||||||||||||||||||||||
이번 기회에 욥기서를 다시 읽게 되어 기쁩니다.
또 이렇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연일까요? 어떤 이끌림일까요?
님께서 욥기서 내용으로 답을 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저는 자살을 천주교에서 막지 말라는 주장을 해 왔습니다. 지금 욥기서를 읽고 더욱 확신을 하게 하였고 계속 저의 주장을 계속 하고자 합니다.
님께서는 욥기의 내용 마무리에서 욥이 하느님 앞에서 승복하는 모습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승복하는가에 대해 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욥보다 못한 자인데 욥처럼 살게 해주시고 욥처럼 주장한 사람과 같은 기회를 주신 것에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처음 님께서 답을 주신 것에 대해 고맙기도 하였지만 우려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답을 댓글을 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처럼 형식으로만 남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지금 이후 내용은 내용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긴 내용을 참고 자료로 욥의 친구 말 내용과 욥의 말 내용을 나누어 올린 것입니다.
크게 나누면 친구의 말은 승복할 수 없는 형식일뿐입니다. 형식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없는 빈 강정입니다. 쑥정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욥의 말은 형식적으로 하느님께 대항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자이고 그 인정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용이고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내용과 형식을 갖춘 내용과 형식입니다.
님께서 바로 결론만 나온 것은 형식이었지, 왜 이런 결과가 나온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저또한 과정없는 형식으로 우려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지금의 한국의 카톨릭의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추기경님이든 신부님이든 사제이든 수도자인든 바른 신자이든 저와 같이 그저 부족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형식에 억매여 진실에 접근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의 자살에 대해 일축하였지만 진지한 저의 주장에는 일방적인 일축으로 일삼았던 것은 바로 욥의 친구처럼 헛소리를 한 것과 같은 태도였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였으면 합니다.
엘리파즈의 첫째 담론은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욥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로 겉의 형식만 보고 욥을 판단한 것입니다. 바로 내용없이 한 이런 지적은 위로도 아니고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응과 응보가 아니라 잘못된 인과응보는 결국 엘리파즈는 하느님과 멀리 있기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형식에 문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입니다. 바로 친구의 말은 쓸모없는 우정인 것처럼 저에게 자살을 막지말라는 주장에 대해 쓸모없는 신앙의 주장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어 하는 자에게 더욱 힘들게 한 것이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살해서 죽으라고 더욱 힘들게 하는 저주와 같은 행태를 바로 지금의 카톨릭 교회의 입장과 너무나 똑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빌닷의 주장으로는 하느님의 정의를 말하고 악인의 운명을 말하지만 실제 악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 욥기 이해에 대해 직접 천주교회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저에게 제 나름의 해석으로 자살을 합리화하는 식의 문제에 대해 누구에게 권위가 우선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직접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설명에 문제가 있으면 지적해 주십시요. 얼마든지 질문과 지적에 응하겠습니다.
욥기는 크게 하느님과 사탄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의 극명한 대조입니다. 이런 대조가 있는 시기가 항상 있었습니다. 본인은 바로 지금의 선과 악이 극명하게 들어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형식을 차용한 것이 왜 이 시대는 극단으로 치닫는지 이야기를 꺼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이 욥기의 작성된 시기에 대한 추정입니다. 하지만 명확것은 몰라도 이런 시기임은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선과 인간의 선과 함께 했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면 인간의 삶도 동일하게 축복된 삶을 살았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기에 축복을 받지 못한 모습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는 사탄의 시험인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시험에서 고통받은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욥에게 모든 재산을 빼았고 몸에 부스럼이라는 병을 준 것입니다. 저는 이 병을 봉화지염이라는 병으로 가정합니다. 또는 대상포진이라는 피부병을 연상케 합니다. 매우 가렵습니다. 이 병의 고통은 죽음을 생각할 만큼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원인은 몸의 체력이 저하되고 몸의 이 병원균이 잠재되었다가 온 몸의 신경망을 타고 번집니다. 그리고 고름같이 진물이 흐릅니다. 이 병을 보면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신명기에 보면 남자가 부정한 경우에 속합니다. 매우 부정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가치판단이 필요한 시기라고 짐작합니다. 새로운 병에 대해 의학적 지식이 없을 경우에 이 병으로 인한 전염성 등으로 부정하게 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앓게 되었다고 사람이 하느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거나 욥이 보이지 않은 죄를 지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욥은 이렇게 병에 걸렸을까?
이 부분을 예측한 부분이 이곳입니다. 욥기 21장의 내용입니다.
악인들의 성공 7 어째서 악인들은 오래 살며 늙어서조차 힘이 더하는가? 8 자식들은 그들 앞에서, 후손들은 그들 눈앞에서 든든히 자리를 잡지. 9 그들의 집은 평안하여 무서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의 회초리는 그들 위에 내리지도 않아 10 그들의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들의 암소는 유산하는 일 없이 새끼를 낳지. 11 아이들을 양 떼처럼 풀어 놓으면 그 어린것들이 마구 뛰어논다네. 12 손북과 비파에 맞추어 목청 돋우고 피리 소리에 흥겨워하며 13 행복 속에 나날을 보내다가 편안히 저승으로 내려간다네. 14 그런데도 하느님께 이런 소리나 한다네. “우리 앞에서 비키십시오. 당신의 길을 안다는 것이 우리 마음에는 내키지 않습니다. 15 전능하신 분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며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에게 매달리리오?” 16 그렇지만 그들의 행운은 그들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지. 악인들의 뜻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네. 바로 악인의 성공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과 대응하는 사탄이 우리의 삶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결국 욥이 고민하다가 결국 병을 앓게 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욥의 입장에서 이유없이 자신이 죽음을 직명하는 고통에 다했다면 죽음을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욥은 하느님을 신뢰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하느님께 굴복하라는 친구들의 말과 아내의 말은 결국 악에 굴복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욥의 신앙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초바르의 말은 결국 하느님의 신비는 알 수 없으니 당신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하라고 조언합니다. 결국 악과 선을 구분을 못하는 친구의 답변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라고 하였지만 결국 선과 악을 구별못하는 친구인 것입니다. 그 동안 욥의 삶을 보고 시기 질투가 옆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욥은 하느님과 함께인 삶을 살았고 그리고 주변과 잘 어울리면 축복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초바르는 그 동안의 욥의 삶에 대해 긍정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욥을 탓하는 어투입니다. 그럼 초바르는 어느 쪽에 서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 쪽에 서있지 않음을 알 수 있고, 욥이 바로 하느님 쪽에서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12장에 얼마나 하느님께 얼매이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17 그분은 자문관들을 맨발로 끌어가시고 판관들을 바보로 만드시는 분. 18 임금들의 띠를 푸시고 그 허리를 포승으로 묶으시는 분. 19 사제들을 맨발로 끌어가시고 권세가들을 넘어뜨리시는 분. 20 신뢰받는 이들에게서 언변을 앗아 버리시고 노인들에게서 판단력을 거두어 버리시는 분. 21 귀족들에게 수치를 쏟아 부으시고 힘센 자들의 허리띠를 풀어 버리시는 분. 22 어둠에서부터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고 암흑을 빛 속으로 끌어내시는 분. 23 민족들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하시며 민족들을 뻗어 나가게도 흩어지게도 하시는 분. 24 나라 백성의 수령들에게서 지각을 앗아 버리시고 그들을 길 없는 광야에서 헤매게 하시는 분. 25 그래서 그들은 빛 없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을 술취한 자같이 헤매게 하신다네
하지만 엘리파즈는 욥이 결백하지 못하고 불경스럽다고 하면서 재앙을 잉태할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웃음거리로 절락한 것에 대해 결백함을 주장합니다. 빌닷의 비난은 욥의 정황에서 악인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욥은 살아 계신 구원자를 통해서 문제의 근원을 찾습니다. 바로 형식적인 친구들의 말이 아니라, 시작과 근원이신 하느님께 억매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내용의 증명을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근본적인 문제를 알고 싶은 것은 바로 하느님께 어떻게 승복하고, 자살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고 하는 신앙의 내용을 보아 주었으면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초바르는 욥의 탐욕을 말하지만 정작 탐욕자는 누구인지 불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초바르에 답변을 통해서 욥은 벌받지 않는 악인들에 대해 얘기를 하며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파즈는 욥의 신앙에 회의적입니다. 욥은 오히려 현실은 하느님의 부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하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부재인 악과 손잡으라는 엘리파즈의 주장이 된다고 역설적으로 설명되는 부분입니다. 빌닷의 말은 결국 욥을 벌레 같은 사람 구더기 같은 인생으로 폄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욥은 자신의 결백을 하느님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초월성 5 그림자들이 몸서리치네, 물 밑에서 그 주민들과 함께. 6 그분 앞에서는 저승도 벌거숭이 멸망의 나라도 가릴 것이 없네. 7 북녘을 허공 위에 펼치시고 땅을 허무 위에 매다신 분. 8 그분께서 물을 당신의 구름으로 싸매시니 구름 덩이가 그 물 밑에서 터지지 않네. 9 어좌 위에 당신의 구름 덩이를 펴시어 그 겉모양을 가리신 분. 10 빛이 어둠과 만나는 곳까지 물의 겉면에 둥근 경계를 지으셨네. 11 그분의 꾸지람에 하늘의 기둥들이 뒤흔들리며 놀라네. 12 당신 힘으로 바다를 놀라게 하시고 당신 통찰로 라합을 쳐부수셨네. 13 그분의 바람으로 하늘은 맑아지고 그분의 손은 ‘도망치는 뱀’을 꿰찌르셨네. 14 이것들은 그분 길의 한 조각일 뿐, 그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작은 속삭임만 듣고 있나? 그러니 그분 권능의 천둥소리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나?
<<사람을 위한 지혜>> 욥기 28장 28절 그러고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셨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이 부분은 악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막지 말라는 내용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무고를 선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형식면에서 욥의 친구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또한 욥의 주장으로 보면 불경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면으로 보면 욥의 친구는 악의 편에서 사탄에 놀아난 위선적인 친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형식면에서 욥의 친구이고 욥에게 하느님께 화해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위기는 결국 하느님의 부재에서 온 악인들의 행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마지막 하느님께서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하느님 입장에서 욥과 그렇지 않은 피조물 인간에게 만용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은 한낱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면서 욥의 친구처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하느님 흉내를 내면서 악에게는 항거하지 않고 의인의 고통에 침을 뱉는 모습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고 계십니다. 그리고 욥의 모습에서 하느님과 소통하여 축복을 받는 모습과 사탄의 개입으로 악으로 인한 고통일 때는 자신의 고통을 아파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지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의인의 고통을 통해서 바로 악인이 얼마나 벌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그 동안 자살을 주장하는 것은 교회법에서 금지한 것은 절대적으로 찬성합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찬성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살이 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마저 악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극단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살이 늘고 살인이 늘고 비인간적인 사회문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이런 문제에 아무런 항거를 할 수 없고 괴롭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가 이런 문제를 줄어들게 하기 위해서 교회가 나서야 함을 주장한 것입니다. 바로 자살과 타살을 막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 기준으로 교회의 확장을 선언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억울함이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로 위선과 악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없는 지금의 교회권력과 지금의 정치권력에 대해 분명한 교회의 입장을 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정의에 의해 고통당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욥기 42장
다시 읽어 보니, 이제야 비로소 승복에 대해 알 것 같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 이번 기회로 욥기가 다시 정리하여 받아 들이게 됩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받아드리고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그저 귀와 눈으로 직접 하느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의 경험입니다. 모두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전한 신앙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바른 승복이 되지 않는다고 정의하게 됩니다.
저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고 앞의 의견과 동일한 주장이 되겠습니다.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는 앞의 내용에서 친구들의 답변에서가 아니라, 실제의 믿음과 삶의 모습에서 불일치한 인간적인 고뇌에서 오는 반성일 것입니다. 이는 낮은 수준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욥기마저 읽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는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진성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욥의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모습은 어떠한 상황이라도 하느님을 더욱 철저히 신뢰한다는 믿음을 보여 준 것이라고 봅니다.
저에게 반추하면, 세상과 사회와 사람들, 그리고 교회권력자들과 나라의 권력가들, 그리고 엉뚱한 친구들과 엉뚱한 답변들! 이런 것과 상관없이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적인 고뇌로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이제와서 보니, 맨 앞의 축복의 욥은 하느님과 형식과 내용을 갖추었지만 인간적인 욥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욥은 인간의 고뇌로 악으로 인한 고통에 대항하여 저항하였습니다. 아무리 의미없는 먼저와 잿더미에서도 받아들이는 욥의 모습에서 진정한 숙명이 무엇인지 되씹어보게 합니다.
이런 숙명은 바로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계에서 겨우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저 자신이 한계를 계속 맞닿아보아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살논쟁과 숙명 논쟁과 욥의 내용을 하면서 계속 제 자신의 한계에 맞닿으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언제나 이런 한계에서 하느님을 귀와 눈으로 실제의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확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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