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민족의 초기 역사는 아브람과 모세 그리고 판관기를 통해서도 볼 수 있듯, 연전연승의 쾌재의 기간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타민족들조차 "하느님은 너희 편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는 위대하다"고 감탄할만큼 그들은 기고만장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우리 편"이라는 신념어린 사상이 조금도 어려움도 없이 품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뒤로 오면서 몰참스런 패배와 치욕스런 굴욕을 자꾸만 겪게 된다. 그들의 가관일 정도의 시적(詩的)인 눈에 의해 야훼의 채찍이나 야훼에 의해 쓰여진 도구로 본, 그 강대국의 손에 의해 오히려 그들은 마음대로 지배당하고 유린되고 "고운 거문고조차 걸어 두고" 싶어질 만큼 비참과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던 바빌론 유배는 "과연 이래도 하느님이 우리편이란 말인가!"라는 의문마저 솟게 하였다. 즉 신앙적 위기가 닥친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다름 아닌 욥서와 예언서이다. 앞의 것은 고난이야말로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요, 뒤의 것은 너의 죄악이 이런 상태를 불렀으니 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제 대단히 역설적인 성격 곧 사디즘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고, 또한 대단히 엄한 심판자가 되셨다. 특히 예언서는 만민구원의 보편적이고 전인류적인 신관(神觀)을 낳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그리고 위 둘은 이사야서에서 미묘하게 통합되어 메시아사상을 낳게 된다.
사실 창세기에서 역대기까지의 역사서가 끝난 뒤에 욥기가 바로 이어지는 것은 의미 깊다. 역사서의 정신 그 역사관은 한마디로 "심는 대로 거둔다"(신명기 30,15이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은 참으로 야훼 신앙의 세계 안에선 분명 유효하다.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나 그 신앙세계의 바깥하고 섞이며 외적 요인이 변수로 작용하면 거기 파격적인 현상들이 펼쳐진다. 즉 심지 않은 데서 가라지가 나오고(마태 13,27) 의인이 불행과 고통을 당하고 악인이 뜻밖에도 행복하게 살기도 하는 이변이 일어난다. 그야말로 패러다임적 차원의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야훼 신앙의 세계권을 벗어날 때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서와 욥기가 갈라서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예언서들과 요나서와의 관계와 비슷하다. 예언서들은 대개 유대민족을 박해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할 정도의 심판을 노래하지만 그런 역사관을 벗어나 객관적 입장에서 하느님의 경륜을 살펴본 요나서는 오히려 니느웨의 시민들조차 사랑하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작업을 서술한다.
그렇게 볼 때 욥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해방신학을 수용한 교황청의 그 행위와 같다. 곧 야훼 신앙 세계의 밖의 것을 만나 그것을 토착화시키듯 야훼화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왕정시대를 거쳐오면서 빈부격차·계급화·이방인과의 혼혈 등등과 같은 사회적인 구조악에 의해 빚어진 현상들인 의인의 불행과 고통의 문제는 신명기적 관점으론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욥기의 저자는 야훼의 섭리를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불의한 고통의 원천인 구조악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사회혁명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내면화의 길을 택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천재지변에 섣부른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듯, 인생고와 불행의 그 현상에 대해선 솔직하고도 거리낌없이 드러내야 하지만 그에 대한 선악의 판단에 대해서만은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같은 것에 비하면 욥기의 그것에 대한 처리란 아직은 미숙하기만 하고 지극히 초보적이지만, 그 끝으로 나타난 것이 다름 아닌 대속사상 곧 메시아사상이었다. 사회의 구조적 악이 빚은 그 불의한 고통, 즉 불의한 고통의 총량을 대속할 자(여기서 그들은 직감적으로 그런 존재를 ’아자젤의 염소’와 결부시켰을 것이다)로서 메시아가 창출되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