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은 십자가 사건까지는 철저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가난과 박해와 몰이해로 둘러싸인 채 세상 모두로부터 거부된 탄생.
열 두 살 때 그 놀라운 지혜를 성전에서 드러내셨으나 그 드러남만큼
오히려 그후 서른이 되실 때 까진 철저히 숨겨짐의 삶을 사셔야 했다.
그 봉쇄의 삶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악마의 광란적인 시기 질투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광야에서 악마에게 승리하시고 세례를 통해 공현되셨던 그분.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은 그 기세로 고향 땅에 전도를 시작하셨건만
그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문전박대의 결과만 초래하였다.
그분의 성자(聖子)다움은 오히려 악마에게나 통하고(마르 5,7)
백성에게선 몰이해의 화살만 돌아올 뿐이었다.
무한하고 지극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고
특히 말씀으로 일깨워 주며 구원사업을 펼쳤으나
그 백성에겐 끝내 배신당하고 거꾸로 죄인으로 내몰리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은 당신을 동전 몇 푼에 팔아먹고
또는 당신을 내버리고 달아나고 부인하고,
온 백성이 공모하여 그분을 향해
"죽이자! 죽이자!"고 미쳐 날뛰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그분은 참혹한 몸뚱이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독하게 돌아가셨다.
갈릴래아의 아름다운 언덕 위에서 산상설교를 하시며
’야훼의 남은 이들’ 그들 착한 민중들과 함께 선포하셨던(마태 5-7장)
하느님 나라의 꿈도 악마의 훼방짓 앞에 무참히 짓밟혔고,
복음은 돼지 앞의 진주(마태 7,6)꼴이 되었고,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이제 완전히 좌절된 것만 같았다.
사실 모든 것은 다 끝난 것 같았다.
그야말로 암흑이 판을 치는 때(루가 22,53)였다.
이렇게 그분의 삶은 온통 실패로 끝맺음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포기된 좌절과 실패와 절망 등등의
그곳에서 부활의 꽃이 활짝 피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
모든 것이 완전하게 주어졌다.
참으로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아니 그 보다 더 한 것이었다.
왜냐면 천지창조만 해도 그냥 ’무(無)에서 유(有)’를 낳은 것이지만
여기선 ’절대무(絶對無)에서 절대유(絶對有)’를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