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말 예언(마태오 복음 24장)은
흔히 혹세무민하는 이른바 종말예언가들이 하듯
그 날과 그 시간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식이 아니라
오직 ’종말론적 시대 상황의 패턴’을 말씀하실 따름이다.
따라서 그 날과 그 시간 같은 것을 예언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하다.
그런 관점에서
그분의 예언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가치전도의 대변혁적 전환기 상황 속에선
온갖 ’자칭 그리스도라 칭하는 세상 구원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꼭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과학·철학·이념·문화 등등으로도 나타나
제각기 ’이걸 통해서만이 이 혼란한 세상에
새시대의 새질서를 주며 구원을 이룰 수 있노라’고 떠들 것이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언제나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그 모든 것은 거짓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 새로운 질서 탄생 이전의 시대인
춘추전국적(春秋戰國的) 상황 속에서 서로 패권을 잡으려고
국가와 민족들이 서로를 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리는 근본주의자나 수구파로 몰려 미움받아 박해 당하며
도덕과 윤리질서가 무너져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그 속에서 가치관 혼란에 빠진 인간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몰려다니며 혼란을 더욱 부채질 하니,
사실 불안정은 미혹의 텃밭인 까닭이다.
이런 시대에 진리를 붙들고 그걸 지키며
끝까지 참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참으로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시대가 오면
하느님께 의지하며 진리 편에 선 믿음의 사람으로
구원의 길에 굳건히 서야 할 것이다.
그럴 때 기어힌 어둠을 헤치고서 떠오르는 샛별과 아침해,
곧 새 하늘 새 땅의 새 시대의 표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여시는 새시대가 오면
끝까지 참은 진리의 신앙인은 말 그대로 뽑힌 자로서
그 시대의 주춧돌이 되어
구원의 시대를 펼쳐 나갈 것이다.
그렇게 하여 흉측한 우상으로 가치전도의 원흉인
맘몬이 다스리는 어둠이 판을 치던 시대는 가고
다시 하느님이 통치하는 하느님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사실 예언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필연의 예언(예측)"이다.
예를 들어 ’자연계’의 현상을 과학적으로 예측하거나
’인생과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하여
미래를 어제와 오늘로 꿰뚫어 보는 것이다.
여기에선 어느 만큼 정확한 데이터를 취하느냐와
직관적 통찰의 영감어린 깊은 눈을 지녀
우주의 근본을 정확히 보느냐에 따라
그 예언(예측)의 무게가 결정된다.
여기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서부터
로마클럽의 지구미래예측
그리고 아인쉬타인의 이론적 예측까지 포함된다.
한편 다른 하나는 "계시를 받아 행하는 예언"이다.
예언자 자신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일을 예언하는 경우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건은
대단히 우연적이고 우발적으로 보여지고 또 생각되어진다.
여기엔 값싼 무당들의 신들린 상태에서의 예언에서부터
돈 보스코가 자신을 괴롭히는 불량배에게
"넌 지금 곧 눈이 멀 것이다"라고 외친 예언까지 포함된다.
한편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까지 포함된 히브리 예언자들은
둘 다 모두 함께 품고 있으니 놀랍고도 위대하다.
바빌론의 멸망을 예언한 예언자는
그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받았음도 분명하지만,
그와 함께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길을
자신의 눈으로 깊이 있게 꿰뚫어 보아
바빌론이 분명 멸망치 않을 수 없음을 확신케 된 것이다.
그들의 눈은 그 시대 다른 인간들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깊고 높고 넓다.
이사야는 말할 것도 없고 약한 예레미야까지
그들이
고대희랍의 "신탁을 받은 캇산드라 같은 무녀들"처럼
단순한 계시자로만 머물지 않고,
민족적 신앙지도자로까지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그 또렷하고 맑은 윤리의식,
뜨거운 정의감,
근본을 잊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 태도,
그 열정!
비록 백년에
한 두 명도 나오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키기에
손색이 없었고 충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