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길,
곧 하느님에로의 길은 끝없이 지체될 뿐 아니라
자신의 꿈을 조금씩 잃어버리며
끝내는 ’나의 꿈’이라곤 몽땅 바쳐 버리는
살을 에이는 듯한 아픔의 길이다.
성모님의 인생이 그러하였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가질 것이라는 영보의 그날,
두렵기는 했어도
천사의 놀라운 예언(루가 1,30-33; 35)에 의해
그녀는 내심 고무되었을 것이다.
"혹 모후와 같은 몸이 되진 않을까.
천사의 말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가능이란 없으니."
비록 지극히 겸손하나 마니피캇에는
마리아 그녀의 희망찬 미래에 대한 기대,
그 어떤 들뜸 같은 게 아름답게 드러나기도 한다(루가 1,47-49).
특히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니"라는 구절은 놀랍지 않는가.
사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자신도 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 못한 예언을 할 경우가 있다.
그 어린 소녀 마리아가 그 순간
하느님의 오묘한 구원역사 그 경륜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는 보긴 어렵다.
진정 그것은 믿음의 행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 희망 어린 꿈은 갈수록 깨트려지기만 한다.
"위대한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다윗의 왕위를 잇는 야곱 후손의 왕"이 되시리라는 그 아기는
놀랍게도 지독한 가난 속에 마굿간에서 태어난다.
비록 목자들의 보고와 동방박사들의 내조(來朝)가 있었지만
베들레헴의 시련을 겪으며
마리아의 꿈은 벌써 한 조각 하느님께 바쳐진다.
그 뒤 나자렛 생활 30년을 통해
그녀의 꿈은 나날이 거듭 하느님께 조각조각 바쳐진다.
물론 그 사이 간간이
’시메온의 예언’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의 대답’ 같은 특별한 사건들이 있어
그녀의 가슴을 잠시 출렁이게도 했었지만,
이제 그녀의 가슴속엔 하느님의 꿈(비젼)이 대신 차차 들어차게 된다.
특히 아들 예수의 메시아 그 길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조금씩 이해하면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으니
다가온 아들 예수의 공생활은
그녀의 소박하나마 남아 있던 꿈을
그야말로 처참히 앗아가는 것이었다.
들리느니 아들은
부랑자 무리들과 섞여 다니며
기적을 행한답시고 죄인들 집단 속에 빠져들어
그야말로 미쳤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으니(마르 3,21),
마리아의 꿈 봉헌은 끝없이 계속될 따름이다.
그뿐 아니라 그 아들은
끝내 악당으로 몰려
십자가형에 처해 못 박혀 죽게 되었으니,
그 십자가 아래에 서서
그녀의 모든 꿈은 온전히 무(無)가 된다.
모든 꿈을 몽땅 잃어버린 그녀의 가슴 위로
참혹히 죽은 아들의 주검이 안겨지고,
그 공허의 심사로 아들을 묻고 난 뒤,
그날 금요일 밤
그녀는 혼절의 상태에서
꿈많은 어린 소녀 시절의
그 영보의 순간을 되새겨 본다.
"위대한 분,
하느님의 아들,
온 민족을 다스릴 왕"
그 모두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모든 꿈이 온전히 사라진 그때
그 무(無)의 상태(케노시스)에서
내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여 왔던 하느님의 꿈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며
그녀의 온 존재를 불사른다.
그것은 그야말로 오순절 성령강림 체험을 미리 겪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성령강림의 의미가 그러하지 않는가!
내 모든 꿈이 사라진 곳에 내려 가득 차는 하느님의 꿈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지난 날엔
무슨 뜻인지 온전히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 왔던(루가 2,50-51)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구약의 구절들을 비롯하여
아들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이
이제사 그녀 안에서 그 참뜻을 명확히 드러내주니
그녀는 기쁨에 벅차 제2의 마니피캇을 노래 불렀으리라.
여기에서 믿음의 여인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안식일 다음날
다른 여인들처럼 무덤에 가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엔
부활하신 예수께서 벌써 와 계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