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 믿는다."
이것은 맹목적인 신앙을 말함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서엔 "보고 믿는다"는 표현이 곳곳에 있다.
여기서 외치고 싶은 것은
믿음이란 의지의 소산임을,
즉 본다는 것이 곧 믿음을 낳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
그것은 일면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그대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였다 할지라도
다시 그대는 불신으로 빠져들 수 있으니,
본다는 것은 결국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사도 도마가 그 뒤 순교까지 하며 참된 제자가 된 것은
단순히 못으로 뚫린 자국을 보고 만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 그는 주님의 현존을 결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가롯 유다스가
그많은 기적과 섭리의 역사를
가장 가까이서 스승을 따라다니며 보았으면서도
그가 끝내 믿지 못한 것은,
절대 결단을 못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항시,
심지어는 죽기 전까지도
예수를
’땅의 왕’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느냐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바로 거기 그 틈에 악마의 손길은 스며든 것이다.
거기에다 그는 너무 보려고 안달했던 것이다.
되지도 않을 그 자신의 결단을 위해
탐욕스러울 정도로 보려고 했던 그 마음이
결국은 스승을 죽음에까지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가 예수의 원수들에 대한 궁극적인 기적적 승리를
예수 체포를 통해 구했던 것은 뻔하다.
그는 진정 ’하느님의 아들’로 스승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분의 "짠!" 하는 승리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볼려는 욕망을 제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 프쉬케적인 유혹에 빠져선
결국 제 스스로마저 망치고 만다.
기적을 요구하고,
특별한 것을 구하고,
피눈물이니 메세지니 하며
기적의 현상과 그 현장을 쫓아다니고,
기도의 결과에 심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는 것들은,
모두 볼려는 마음이 낳은 것이다.
자기억제를 하지 않는 한 그것은 결코 만족을 모르기에
결국 아편중독 환자처럼 극단으로 치우치고 만다.
따라서 예수께선 말씀하신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