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여느 문화보다도 현대는 구조적으로
탐욕에서 비롯된 비축(備蓄)의 문화로 되어 있다.
맹목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도체 절제를 모르는 축적(蓄積)에의 편집적인 행위,
그것이 발전추구주의로,
군사력 경쟁으로,
신세계적 환상주의 등등으로 꾸며져 있지만,
기실 그 비축문화에서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가 비롯되고 있다.
이기주의와 불평등의 극심화,
핵전쟁 가능성과 파멸적인 국가적 경쟁주의,
또한 가히 병적인 업적주의(業績主義)와 그에서 비롯되는 초조 불안 등등,
심지어 퇴폐향락주의 역시 그 기원은 비축문화에 담겨져 있다.
그리하여 현대를 구하는 유일의 길은
’만나의 길’ 곧 나눔의 정신을 통하여
불요불급한 비축을 방지하는 것뿐이다(루가 3,11).
"오늘 먹을 것은 오늘 벌어서 오늘 먹는다"는
그리하여 이 땅에 ’부패한 어제의 만나’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물질적 억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런데 이른바 ’만나의 정신’은 그냥 놀고먹자는 것이 아니라,
능력대로 만나를 줍되 필요 이상의 것은
능력껏 주어도 자기필요량을 구하지 못한 자에게 나눠주어
그야말로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 베버의 지적대로
마치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전형적인 비축사회인 자본주의 사회를 낳았듯이,
그러한 노력이
"일용한 양식만을 지니는 비축적(非蓄積) 사회국조"를 깨트리지는 앓을까
하는 의문을 솟게 할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나눌 때 일용한 양식은 오히려 의미를 새롭게 지니면서
본질에의 회귀가 이뤄져 보다 풍요로워진다.
나눔의 정신을 바탕으로한 생활은
자연 정신적인 것에다 가치를 두게 하는 까닭에
생활의 질은 가히 거룩할 만큼 높아지며,
모두는 일용할 만나 이상의 것을 원하지도 않게 되고,
그렇게 허례허식의 과다낭비와 탐욕스런 사치가 사라지면서,
그 사회는 그것을 오히려 가치 있는 일에
공동으로 새롭게 투자할 여지가 생겨난다.
그러한 적요적급(適要適給)하게 이뤄지는 투자가
’어제의 부패한 만나’를 온전히 없이해 주며
’있는 만나 모두’를 쓰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신적 풍요는
탐욕적이거나 이기주의적인 향락이
아닌 진정한 풍요의 생활을 가져다주게 된다.
여기에 또한 참된 가난의 참된 가치가 드러난다.
가난은 진정한 자유를 주고,
그 자유는
존재적 신뢰감(그것은 결국 존재의 기반인 하느님에 대한 것)에서 비롯되니
그것은 예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는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고 부탁하신
마태 6장25절 이하의 말씀에서도 확실하다.
루가 16장13절에서 나타나듯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긴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거짓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깊이만큼 재물의 가치는 사라지게 마련이니
비축문화의 상징인 바벨탑이 교만의 상징으로 함께 됨은 옳다.
진복팔단의 첫머리처럼 하느님과 함께 하려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내일 걱정’이야말로
인간을 악마로 변신시키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이다.
악마는 언제나 유혹의 첫말을 "내일은 어떡하지?"로 시작한다.
첫아담과 에와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광야의 예수에게까지 그러하였다.
’내일 걱정’은 인간에게서 행복을 빼앗는 악마의 수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