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사도라는 요한이
복음서 곳곳에서 뜻밖에도 열혈청년(熱血靑年)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적극성과 정열은 분명 정의와 사랑 가운데 정의에 치우쳐져 있었다.
그런 그가 사랑의 사도가 된다.
아마 나이가 들면서 그는
정의를 초월하는 아니 참된 정의에 내재되어
그것의 근본을 이루는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리라.
즉 번갯불이 피뢰침에 의해 사라지듯
천둥의 아들인 그가 사랑에 의해 꺾여 녹아 들어간 것이다.
그는 진정 정의(正義)의 원천인 사랑을 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요한의 사랑 이야기를
그 어떤 모성적이 아닌
단순히 여성적인 사랑 타령으로
어설프게 받아들여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꼴이 된다.
십자가 아래 서 있는 그의 단호한 태도와 그 용감한 사랑을 보라.
그뿐 아니라 바로 그 후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신
요한의 행동은 또 얼마나 용감한가.
모든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의 무리들이
두려움과 절망감에 휩싸여 골방에 숨어 제 살길만 찾고 있던 바로 그 때
그는 괴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신 것이다.
특히 묵시록에 나타나는 심판·분노·지옥·파괴·피·패망·정의·권세·승리·환난·유황·낫·탕녀·쇠지팡이·진노·군주·군대·잿더미·악령 등등과 같은
그의 언어들을 살펴볼 때 그는 결코 심약한 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감미로울 정도의 사랑 설교는
치열한 자기결단과 투신의 산물이었다.
참으로 사랑의 신비는 사랑함으로써만이
그 신비의 본질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