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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신명기 입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2 조회수6,161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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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입문

 

 

1. 오경 안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신명기

 

신명기는 거의 대부분, 오경을 이루는 사대 전승 가운데 하나인 신명기계 전승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전승들은 신명기의 끝부분인 31장에서부터 다시 나타난다.

 

신명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 사건의 발전 과정은 찾아볼 수 없다. 시작하는 장소도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이고(1,5), 모세가 죽는 곳도 마찬가지이다(34,5). 신명기는 내용상 오경의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부분적인 단절과 반복을 제외하면 1―30장은 모세가 백성에게 한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곧 모세가 약속의 땅 문턱에서 죽기 전에 남기는 일종의 영적 유언과 같은 것이다.

 

특히 신명기의 권고적, 교훈적 문체에서 이 책의 통일성과 독창성이 잘 드러난다. 똑같지는 않지만 매우 비슷한 표현들이 신명기 안에서 자주 나타난다.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을 차지하여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선택하시는 곳에서 주님을 찾아라’,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준 계명과 율법과 규정들을 지켜라’,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겨라’ 등이다. 이와 같은 문장들은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등, 신명기계 역사서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이러한 문학적 유사성은 신명기와 오경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통일성에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런데도 신명기가 오경의 앞선 네 책과 연결된 이유는, 모세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거대한 문학 작품을 형성하려는 데에 있다.

 

 

2. 계약에 관한 설교

 

신명기는 그 독특한 수사학적 문학 양식으로 특징지어진다. 12―26장은 실천해야 할 일종의 법률과 규정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신명기(申命記)”라는 제목, 곧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붙인 ‘두 번째 법(deuteronomion)’(17,18과 각주 참조)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작품에 썩 어울리는 제목은 아니다. 신명기의 중심 부분이 법령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법전의 문학 양식을 지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명기가 다루는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탈출 20―23장의 이른바 ‘계약의 책’의 반복으로서, 거기에 나오는 가르침이 권고, 호소, 경고 등의 형태로 제시된다. 예컨대 히브리인 종의 해방에 관한 가르침은(15,12-18) 탈출 21,2-6의 법을 되풀이하면서도, 그 어조는 법률가보다는 교리 교사 또는 설교가의 것이다.

 

가르침의 대상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다(1,1; 34,12). 그런데 특이한 점은 대상을 “너”와 “너희”로 번갈아 부르는데, 자주 같은 문단 안에서, 심지어는 같은 문장 안에서까지 뚜렷한 이유 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6,1-3을 보면, 우리말 번역에서는 선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너희”로(1절) 시작하여 “너”로(2-3절) 바뀌었다가 다시 “너희”로(3ㄴ절), 그러고서는 다시 “너”로(3절) 바뀐다(다음 쪽 윗부분 참조). 창세기가 여러 전승이 혼합하여 이루어진 산물인 것처럼, 신명기 역시 두 가지 병행 전승이 합쳐진 결과일까? 그러한 가능성은 희박하다. “너”가 쓰인 단락들을 따로 떼어 놓을 경우, “너희”가 쓰인 단락들 자체만으로는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희-단락’은 ‘너-단락’을 보충하고 발전시키는 첨가 부분으로 보인다. 이 같은 현상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문학 형성 과정을 잘 보여 주는 표시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너”라고 하는 설교의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대화 상대자로 불린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이다(예컨대 6,4-5 또는 9,1 참조). 이렇게 큰 집단을 “너”라고 부르는 용법은 가르침의 문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온 백성이 마치 한 사람처럼 마음을 모아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전례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이 더 가능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짐 산과 에발 산 아래에 있는 세겜 성소에서 거행되는 전례에 관한 언급이라든가(27,11-14), “일곱 해마다, 곧 탕감의 해로 정해진 때마다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주 너의 하느님 앞에 나아가려고 그분께서 선택하시는 곳으로 모여 올 때, 너는 이 율법을 온 이스라엘 앞에서 똑똑히 읽어야 한다.”는 명령에는(31,10-11), 온 백성이 세겜에 모여 주님의 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기로 다짐하면서, 주님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는 축제의 기억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너“와 “너희”의 혼용은 우리말 번역에서 사정을 잘 모를 경우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 성서에서는 일관되게 “너희”로 수정하여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명기의 이러한 특성을 가능한 대로 존중하기로 한다. 다만 한 문장에서 “너”와 “너희”가 뒤섞임으로써 우리말의 흐름을 막거나 이해를 어렵게 할 때에는, 때때로 각주에 사정을 밝히고 문맥에 따라 “너” 또는 “너희”로 통일시켜 번역한다.

 

여호 24장이 마치 단 한 번 일어난 일처럼 들려 주는 세겜의 집회도 실제로는 정기적으로 되풀이된 계약 갱신의 전례를 회상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전례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 백성의 역사 회고(2-13절), 주님만을 섬기라는 권고(14-15절), 백성의 약속(16-24절), 법률의 선포와 계약 체결(25-26ㄱ절), 증인의 채택(26ㄴ-27절). 그런데 신명기의 전체 구조도 이와 매우 비슷한 순서를 따른다 : 과거의 회고와 권고(1-11장), 법률의 선포(12,1-26,15), 상호간의 약속(26,16-19), 축복과 저주(27,1-30,18), 증인의 채택(30,19-20). 그런데도 신명기의 설교가 세겜에서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세가 요르단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는 전승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긴 설교는, 왕정 시대 이전에 세겜에서 거행되었던 예식을 잘 반영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왕정의 등장과 함께 이 계약의 축제는, 특히 예루살렘에서 다른 축제들 때문에 그 중요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계약의 법에 관한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이 가르침이 공동체적 성격을 띤 “너”를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는 “너희”를 쓰기 시작한 것은 원래의 전례적 상황에서 벗어날 때였을 것이다.

 

이 가르침을 전하는 이의 말투를 보면, 그의 역할이 예언자의 역할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예언자는 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말씀을 그분의 백성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곧 하느님께서 “나”로 말씀하시는 가운데에 현존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모세는 자신을 가리키려고 일인칭을 쓰고, 주님을 부를 때에는 삼인칭을 사용한다(예컨대 9,9 이하). 신명기의 본문들은 서슴없이 모세의 중개자 직분을 강조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법을 계시하시려고 상대하는 사람이 바로 모세이며, 이 법을 백성에게 전달하고 설명하라는 명령을 받는 이도 모세이다(5,6; 6,1; 9,9―10,5). 그런데 모세의 이 중개 역할은 이스라엘에서 레위인들에게 계승된다. ‘열두 지파에게 내린 축복’은, 레위인들이 야곱에게 법규를,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33,10). 계약 갱신 축제 때에 율법을 봉독하라고 모세가 명령한 이들도 레위인들이고(31,10-11), 성대한 전례에서 모세와 함께 설교자로 등장하는 이들도 바로 그들이다(27,9). 분명 모세는 계약의 법을 가르치는 데에 창시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레위인들이 충실히 이 직무를 계속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모세의 이름으로 전함으로써 지속성과 권위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후대의 상황들을 살펴보면, 레위인들이 새로이 나타나는 여러 가지 유혹과 관련하여 전승을 발전시키고 늘 새로이 현실화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약속의 땅에 자리잡은 백성의 교만(8,11-20), 가나안 종교 의식의 유혹(12,2-3), 임금의 전제주의(17,14-20), 절망적인 유배 상태(4,25-31) 등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유효한 법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근본과 핵심적인 요구를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해를 돕고 마음을 열어 주며, 그들이 주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생활 자세를 가지도록 하려고, 신명기는 지혜 문학적 가르침을 사용한다(4,5-8과 잠언 2,6; 4,40과 잠언 3,2; 8,5와 잠언 3,11-12; 16,19와 잠언 17,23 등 참조).

 

이렇게 신명기는, 모세에게 그 근원을 두고,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바빌론 유배에 이르기까지 권고와 경고와 약속의 말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한 레위인들의 설교가 점차적으로 문서화한 거대한 작품이다.

 

 

3. 개혁 문서

 

이 긴 문학의 주요 형성 단계는 어떠한 것들인가? 이미 교부들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던 중요한 발견에 의해, 신명기가 처음 알려진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2열왕 22장은 요시야 임금 제18년에, 곧 기원전 622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책”(2열왕 22,8.11) 또는 “계약 책”이(2열왕 23,2.21)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이 책에 담긴 경고에 충격을 받은 임금은 온 백성을 불러모아 장엄하게 계약을 갱신하고, 종교 개혁을 선포한다. 그런데 이 개혁의 내용은(2열왕 23,4-20) 신명기의 기본 요구와 일치한다. 곧 지방에 있는 모든 성소를 파괴하고 모든 예배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키는 것이다(신명 12). 따라서 요시야가 선포한 문서는 원래의 짧은 신명기 원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책의 발견이 사람들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점으로 보아, 분명히 발견된 때와 가까운 시기에 형성된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이보다 1세기 이전 히즈키야 임금이 행한 예배의 정화 역시 예루살렘으로 예배가 집중됨을 보여 주고 있는데(2열왕 18,4.22), 이 예배 정화의 기초가 되는 문서는 없다. 따라서 신명기의 초본은 아마도 히즈키야의 개혁이, 다시 우상 숭배를 번성하게 한 므나쎄의 치명적 통치 아래 실패로 돌아간 시기인(2열왕 21) 기원전 7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옛 이스라엘의 정통 신앙 전승을 근거로, 종교 혼합주의와 사회적 무질서에 대항하여 싸우는 수많은 레위인들의 개혁적 성향을 드러낸다.

 

이 레위인들은 대부분,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기원전 722년에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 그 곳을 떠나 피신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기이하게도 잊혀져 있다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알려지고 이어서 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전승을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집중시켜, 세겜에서 행하여졌던 옛 계약 의식을 새로이 함으로써, 신명기는 모세에게 내린 계시에서 비롯된 계약의 윤리를 왕정 시대에 복구시켰던 것이다.

 

 

4. 신명기의 완성과 구조

 

요시야가 행한 개혁의 기초가 되었던 문서는 계속해서 보충된다. 이러저러한 계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다양한 권고들이 펼쳐지고, 경고가 강화되기도 하며(28,45-68 참조), 설교가 삽입되고(4,15-31 참조), 동일한 주제와 관련된 오래된 단편들이 덧붙여지기도 한다(5,6-22 또는 27,11-26 참조).

 

그리고 룻기를 빼고 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까지를 포함하는 이른바 ‘전기 예언서’의 틀을 잡은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신명기계 편집자가, 이 책의 서론 구실을 하는 설교를 덧붙이고(1-3장) 새로운 결론 부분을 보탠다(31-34장). 이 결론은 모세에서 유배까지 이르는 선택된 민족의 역사, 곧 열왕기까지 펼쳐지는 긴 역사로 넘어가는 것을 수월하게 해 준다.

 

이렇게 완성된 신명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그리고 이어서 오경 전체의 종결 구실도 하는 결론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1 부:두 개의 설교로 시작되는데 하나는 서술적 문체(1,6-4,44), 다른 하나는 훈계적 문체로 되어 있다(4,45-11,32).

제 2 부:법령들과(12-26장), 몇몇 전례문(27-28장).

제 3 부:마지막 훈계(29-30장).

신명기와 오경의 결론:모세의 죽음에 관한 전승들(31-34장).

 

 

5. 신명기의 주제들

 

신명기가 비록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자료로 형성되었지만, 이 책은 일관되고 전통에 충실한 한 집단의 묵상과 가르침을 드러낸다. 따라서 신명기 안에 다양한 자료들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주요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신명기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 열쇠가 되는 구절은 아마도 29,28의 말씀일 것이다: “감추어진 것은 주 우리 하느님의 것이지만, 드러난 것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것이니,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신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민족의 선택, 생활 전반에 걸친 실천의 요구 등, 신명기의 중심 주제를 요약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6,4). 이 말씀 안에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의 출발점이자 중심이 되는 기본 내용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우리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신명기에서 인류의 창조자로 소개되시기도 하지만(4,32), 그분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백성의 역사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분으로 인식된다. 신명기는 이러한 역사에 관해서 몇몇 일화밖에 들려 주지 않지만, 설교 내용 안에 언제나 중요한 과거의 일들이 언급된다. 성조들에게 내린 약속(4,31), 이집트 탈출(7,19), 호렙 산에서의 율법 부여(5,5), 광야의 횡단(8,2), 그리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4,40; 1,25). 모세의 연설에서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로 나타나는 이 마지막 단계가, 신명기 저자에게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명심해야 할 하느님 행동의 일부이다(4,9). 이 사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느님의 권능을 똑똑히 보았다. 아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과 당신의 행동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신 것이다(29,3). 그래서 먼 옛날부터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삶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회고하는 ‘신앙 고백’이 신명기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신앙 고백’은 때로는 명시적으로(6,21-23; 11,2-3; 26,5-9), 때로는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사건들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을 드러내는 큰 표지이다. 또 다른 표지는 주님의 대변인을 통해서 주어진다. 모세는 이 대변인 역할을 유일하게 수행한 인물이다(34,10.11). 그리고 모세가 선포한 법이 그 역할을 영원히 계속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지속적인 생활 안에서는 예언자들(18,15), 그리고 예언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레위인들이(33,8) 주님의 증인이자 해석자이며, 그분과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이다. 이러한 표지들 덕택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 하느님이시며, 자기들을 사랑하시어(6,5) 자기들과 계약을 맺으신(26,17)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유일한 분이시다. 다른 거짓 신들은 나무나 돌에 불과하다(4,28). 그리고 이 유일성은 명백히 표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신명기는 처음으로 성소의 유일성 원칙을 도입하는 것이다(12,5). 이 유일한 성소에서 이스라엘 회중은(5,22) 호렙에서처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만 드려야 할 예배를 분산시키는 모든 요소가 제거될 수 있다(6,4). 법 역시 일치의 표지이다. 신명기는 “규정과 법규”를 길게 나열하는 가운데에서도 율법과 계명에 관해서 말하기를 좋아한다(1,5; 5,31; 6,1). 율법은 온 백성이 정성을 다하여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을 명시한다. 결국 신명기의 일신론은(한 분이신 하느님, 하나밖에 없는 성소, 하나뿐인 법, 한 백성 등) 이스라엘인들이 영위하는 전체 삶의 유일 개념으로 귀착된다.

 

(2)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주님께서 자기를 ‘당신의 것’으로(7,6 ; 28,10),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음을(7,6), 그리고 자기가 보잘것 없는데도(7,8) 은혜로 채워 주셨으며(9,5), 자기를 아들처럼 대해 주셨음을 안다(1,31). 과거의 사건들에서 기원하는 하느님의 이 선택은 모든 세대에도 해당된다(11,2; 29,14). 그리하여 백성은 언제나 자기들의 하느님께서 “오늘”도(1,10) 자기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온 백성의 능동적인 응답을 전제한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10,16), 곧 계약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신들과 일체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4,19; 17,3). 그리하여 말씀으로 살아야 하고(6,8), 말씀을 듣고 지키며, 세세한 조항에 이르기까지 율법에 충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을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6,5).

 

그렇게 함으로써 의로워질 수 있고(6,25), 자기의 생활도 신앙을 증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전쟁과 관련해서도 예외가 아니다(20,1.4).

 

이뿐만이 아니다.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구원의 사건들을 되새기게 된다. 이스라엘의 순종은 결국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여러 결실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5,15). 이스라엘이 햇곡식을 예물로 바쳐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비옥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다(26,5-10). 축제들을 지내야 하는 이유는 이집트 탈출 때를 기억하기 위함이다(16,1.3.12).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5,15). 이스라엘이 가난한 이들을 존중해야 하고(10,18), 누구든지, 심지어 이집트인이라 할지라도 억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24,18-22; 23,8), 그들도 이집트에서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이렇게 이집트 탈출을 상기시킴으로써, 공동체에서 이방인을 제외시키려는 편협된 생활 태도를 없애려고 노력한다(14,21; 15,3; 23,21; 28,12).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전체가 그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결국 자기 구원의 사건들을 기리는 기념 그 자체가 된다.

 

가난한 이들을 존중하라는 법은 그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은 삼 년마다 바쳐야 하는 십일조(14,28), 빚의 탕감(15,1), 종의 해방(15,12-18), 이삭과 포도에(23,25-26) 관한 규정들을 읽어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임금 역시 가능한 대로 평민처럼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17,15). 이러한 가르침은 특별히 신명기의 가장 오래된 부분이 편집될 때에 삽입된다. 백성의 일치가 사회적 불평등으로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힘을 더해 가는 부유층과 나날이 더 비참해지는 소시민층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이가 공동의 유산으로 지닌 과거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모두 형제였음을 상기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쟁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이 시급하였던 것이다(15,4). 하지만 이 시기의 설교가들은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호소에 응답하고 실생활로 구원의 사건들을 재현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12,28; 26,16-19 참조).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생활에 극적인 요소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명기가 이해하는 생활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연속이다. 이 생활은 인간에게 매 순간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하며, 이 충성은 원칙적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30,14). 백성에게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충성과 행복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배반과 불행의 길이다(11,27-28; 28). 여기에 선택이 요구된다(30,15-20). 그러나 실제는 어떠한가? 이 물음에 대해서도 역사가 대답하는데, 그 답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집트 탈출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배반하였고, 모세는 줄곧 백성을 위하여 하느님께 간청을 드려야 했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악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일으켰으므로, 멸망해야 마땅하지만(9,7), 그분의 지칠 줄 모르는 성실성 때문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선택의 요구를 받는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구원 역사의 다른 시기들은 어떠하였는가? 이미 첫 설교가들은 이 상황의 극적인 특성을 예고하였다. 그러나 모든 환상이 사라지게 될 때가 다가왔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선택하여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고, 또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다. 유배 시기에 활동하였던 신명기의 마지막 저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말한다(28,15; 29,21). 

 

그러나 신명기의 생각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의 죄가 마지막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회개시켜 용서를 받게 하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30,3). 그러나 그 동안에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며, 거기에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6. 성서에서 차지하는 신명기의 위치

 

신명기는 성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유다인들이 신명기에서 자기들의 기본 신앙인 “셔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6,4)“을 발견하였기 때문만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을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만도 아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5). 이 신명기 전승은 그 안에 담겨 있는 독특한 사상으로 구약성서의 다른 작품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신명기와 요시야의 개혁 정책을 가까이에서 지원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면, 용어나 주제상의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주님께서 하신 일들을 잊지 마라’(6,10-13; 예레 2,4-7), 마음의 할례(10,16; 예레 4,4 참조), 새 계약(30,1-10; 예레 31,31-34 참조). 이러한 것들은 신명기의 전형적인 주제들이다. 신명기의 문체, 그리고 여호수아서(1장과 23장), 판관기(2,6―3,6), 사무엘서(1사무 12), 열왕기(1열왕 8; 2열왕 17)를 관통하는 역사의 주요 단계들을 표시하는 설교와 반성의 문체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 거대한 역사서의 저자에 대한 신명기의 영향을 드러내 준다. 신명기와 마찬가지로 이 역사서의 저자도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계명과 법에 대한 순종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는 신명기의 법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한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과 죽음으로 이끄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주제는(30장 참조), 후대 유다인들의 윤리 가르침뿐만 아니라 복음서에도 계속 나온다(마태 7,13-14). 신명기의 일관된 관심사이며 유다인 공동체 생활의 누룩이 되는,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연대감이 복음서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7. 오늘날의 신명기

 

신명기가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자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신명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법령들은 우리 시대와는 다른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믿음과 은총과 성령의 나라를 세우신 뒤로는(로마 3,28; 6,14; 갈라 3,23; 5,18 참조), 율법이 무효가 되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신명기가 계명들의 모음이기 전에,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 곧 하느님 백성의 삶과 역사 안에서 일어난 그분의 활동에 대한 묵상이라는 점을 말해 둘 필요가 있다. 믿는 이들의 실존을 지배하는 것은 인식, 곧 현존의 발견과 선물에 대한 응답이라는 이중의 인식이다.

 

그리고 계명들 자체도 더 이상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비추어 줄 수 있게 표현된 것들이다. 사실, 이 모든 가르침은 변화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참된 충성을 찾으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 모든 종파의 신앙인들이 윤리의 근본에 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오늘날, 신명기는 밖에서 부과되는 법이 아니라, 묵상과 마음의 결단 안에 뿌리박고 있는 ’법’의 본보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명쾌하고 성숙한 윤리이며 참된 지혜이다(4,5-8).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역사 안에서이기 때문에, 구원 사건 안에서 매일의 행동 지침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사랑의 실천 윤리를 가르쳐 준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다 적용된다. 정치에서 시작하여 보건에 이르기까지, 사회 또는 가정 생활에서 다른 형제와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존중에 이르기까지(22,7; 20,19), 주님에 대한 사랑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 개개의 상황은 모두 우리에게 주님을 위하든지 거스르든지 선택을 하게 하며, 이 선택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은 우리의 행위,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또한 하느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순종의 무조건성과 진지성을 끊임없이 강조하며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신명기의 법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채워야 하는 조건이 아니라, 선택을 받고 또 가나안 땅에서 상속 재산을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결과를 일러 준다. 이 결과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명기의 설교가는 동시에 순종의 진지성을 강조한다.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약속하고,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행을 경고한다. 그것은 계약의 법이 백성 앞에 생명 또는 죽음의 문제를 내놓기 때문이다(30,15-20). 신명기는 이렇게 순종의 두 가지 특성, 곧 무조건성과 진지성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다. 이 균형은 지키기가 힘든 것이다. 이미 후기 유다교뿐만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에서도 가끔 순종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공로의 윤리, 또는 생명과 죽음을 결정짓는 순종의 진지성을 무시하고 이른바 ‘순수한’ 순종만을 강조하는 도덕 지상주의로 흐름을 볼 수 있다. 성서의 모든 증언 가운데에서 신명기는 성숙하고, 균형 잡히고 생동력 있는 윤리를 재발견하는 데에 더없이 중요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 번역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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