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열왕기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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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5,796 | 추천수0 | |||||
파일첨부 열왕기입문.hwp [1,137] | ||||||||
열왕기 입문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긴 기간을 다룬다. 열왕기가 다루는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사건은 다윗의 말년에 일어난 일로서(1열왕 1 - 2,10), 그 연대는 기원전 972년경이다. 반면에 열왕기의 역사에서 가장 나중에 일어난 사건은 기원전 561년 여호야긴 임금이 바빌론 임금의 특전을 받은 일이다(2열왕 25,27-30). 그러나 열왕기를 전기 예언서로 분류한 히브리말 성서의 목록이 시사하듯, 이 책에 수많은 역사적 자료가 나온다 해서 독자들은 이 책을 단순한 역사기록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이 책의 내용은 이스라엘 임금들이 통치하던 이스라엘 역사의 일정 기간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라 할 수 있다.
1. 열왕기의 내용
가. 다윗의 통치 말년과 솔로몬의 통치(1열왕 1-11)
- 다윗과 수넴 처녀; 아도니야가 임금 행세를 하다; 나단과 바쎄바의 계책; 솔로몬이 다윗의 명을 받아 임금이 되다 (1열왕 1,1-53) - 다윗이 죽다(1열왕 2,1-12) - 아도니야가 죽다; 에비아달과 요압의 운명; 시므이가 죽다 - 다윗(1열왕 2,13-46) - 솔로몬이 파라오의 딸과 혼인하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꿈을 꾸다; 솔로몬의 판결(1열왕 3) - 솔로몬의 대신들; 솔로몬의 통치 아래 왕국이 굳건해지다; 솔로몬이 이름을 떨치다(1열왕 4,1-5,14) -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다(1열왕 5,15-32) - 솔로몬이 성전을 짓다; 솔로몬이 자기 궁전을 짓다; 청동 기술공 히람을 데려오다; 청동 기둥; 청동 바다 모형; 물수레; 그 밖의 청동 기물; 성전 기물(1열왕 6-7) - 계약궤를 성전에 모시다; 솔로몬의 기도; 솔로몬이 백성에게 축복하고 권고하다; 성전을 봉헌하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다(1열왕 8-9,9) - 솔로몬이 히람과 거래하다; 솔로몬의 건축 활동; 솔로몬의 무역 활동(1열왕 9,10-28) - 세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오다; 솔로몬의 영화; 솔로몬의 병거대(1열왕 10) - 솔로몬이 하느님에게서 돌아서다; 솔로몬의 적들; 여로보암의 반란을 예고하다; 솔로몬이 죽다(1열왕 11)
나. 왕국의 분열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까지나. (1열왕 12-2열왕 17)
- 북쪽 지파들이 반기를 들다; 남북이 정치/종교적으로 갈라지다(1열왕 12) - 베델의 제단이 무너지다; 베델의 늙은 예언자(1열왕 13) - 여로보암의 아들이 죽다; 여로보암이 죽다(1열왕 14,1-20) - 르호보암의 유다 통치; 아비얌의 유다 통치; 아사의 유다 통치 - 다윗(1열왕 14,21-15,24) - 나답의 이스라엘 통치;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엘라의 이스라엘 통치; 지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오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아합의 통치가 시작되다(1열왕 15,25-16,34) - 엘리야가 가뭄을 예언하다; 엘리야와 까마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다; 엘리야와 오바디야;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다; 엘리야가 가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다; 가뭄이 끝나다;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가다;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다(1열왕 17-19) -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공격하다; 이스라엘이 승리하다; 아람군이 다시 쳐들어오다; 한 예언자가 아합을 저주하다(1열왕 20) -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다; 아합이 뉘우치다(1열왕 21) - 아합이 라못-길르앗을 되찾으려 하다; 미가야가 아합의 패전을 예언하다; 아합이 라못-길르앗에서 전사하다(1열왕 22,1-40) - 여호사밧의 유다 통치(1열왕 22,41-51) - 아하지야의 이스라엘 통치(1열왕 22,52-54) - 엘리야와 아하지야 임금; 엘리야의 승천과 그의 뒤를 잇는 엘리사; 엘리사가 두 가지 기적을 일으키다(2열왕 1-2) - 요람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3,1-3) - 이스라엘과 유다 동맹군이 모압과 싸우다; 과부의 기름병; 수넴 여자와 그의 아들; 독이 든 국; 백 명을 먹인 기적; 엘리사가 나아만을 고쳐주다; 엘리사가 잃어버린 도끼를 찾아주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를 사로잡다; 포위된 사마리아가 기아에 빠지다; 엘리사가 자객들이 오는 것을 미리 말하다; 아람군이 진지를 두고 달아나다; 수넴 여자 이야기의 마무리; 엘리사와 아람 임금(2열왕 3,4-8,15) - 여호람의 유다 통치; 아하지야의 유다 통치(2열왕 8,16-29) - 엘리사의 제자가 예후에게 기름부어 임금으로 세우다(2열왕 9,1-13) - 예후가 이스라엘 임금 요람을 죽이다;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지야를 죽이다; 예후가 이세벨을 죽이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을 죽이다; 예후가 유다 임금 아하지야의 형제들을 죽이다; 예후와 여호나답; 예후가 바알 숭배를 없애다; 예후의 죄; 예후의 마지막(2열왕 9,14-10,36) - 아달리야의 유다 통치;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2열왕 11) - 요아스의 유다 통치; 아람의 침입과 유다 임금 요아스의 시해(2열왕 12) - 여호아하즈의 이스라엘 통치; 여호아스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13,1-13) - 엘리사가 죽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2열왕 13,14-25) - 아마지야의 유다 통치; 유다 임금 아마지야가 죽다(2열왕 14,1-22) -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14,23-29) - 아자리야의 유다 통치(2열왕 15,1-7) - 즈가리야의 이스라엘 통치; 살룸의 이스라엘 통치; 므나헴의 이스라엘 통치; 브가히야의 이스라엘 통치; 베가의 이스라엘 통치(2열왕 15,8-31) - 요담의 유다 통치; 아하즈의 유다 통치(2열왕 15,32-16) - 이스라엘의 마지막 임금 호세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몰락에 대한 반성; 사마리아인의 기원(2열왕 17)
다. 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에서 유다 왕국의 마지막까지다. (2열왕 18-25)
- 히즈키야의 유다 통치; 사마리아가 함락되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유다를 치다; 히즈키야가 이사야에게 문의하다; 아시리아가 다시 위협하다; 히즈키야의 기도; 산헤립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 히즈키야에게 내린 주님의 징표; 산헤립의 말로(2열왕 18-19) - 히즈키야의 발병과 치유; 바빌론 사절단; 히즈키야가 죽다 (2열왕 20) - 므나쎄의 유다 통치; 아몬의 유다 통치(2열왕 21) - 요시야의 등극과 종교 개혁; 주님의 율법책을 발견하다; 요시야가 계약책을 봉독하고 계약을 맺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 요시야가 과월절을 지키다; 요시야의 나머지 개혁; 요시야가 죽다(2열왕 22,1-23,30) - 여호아하즈의 유다 통치; 여호야킴의 유다 통치; 여호야긴의 유다 통치; 유다인들의 첫 번째 바빌론 유배(2열왕 23,31-24,17) - 시드키야의 유다 통치; 예루살렘이 함락되다; 성전이 파괴되다(2열왕 24,18-25,21) - 느부갓네살이 게달리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다(2열왕 25,22-26) - 여호야긴이 바빌론 임금에게 은전을 입다(2열왕 25,27-30)
2. 열왕기의 기원
우리에게 전해진 열왕기는 뚜렷이 둘로 나뉘어 있지만, 히브리말 성서는 한 작품이다. 두 권으로 나뉘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말 역자들이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 분리는 점차 굳어져, 유감스럽게도 아하지야의 통치 시대와(1열왕 22,52-54에서 시작하여 2열왕 1장으로 끝남) 엘리야 이야기를(1열왕 17장에서 시작하여 2열왕 1장으로 끝남) 갈라놓았다.
열왕기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통일된 작품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은 성서의 다른 책들과 완전히 독립해서 쓰여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서, 열왕기가 본디 유일한 역사 문헌으로 한데 묶였으리라는 가설을 내세웠다(여기에 신명기도 포함될 수 있다). 한 가지 좋은 예로 1열왕 1-2,11은 다윗의 통치를 전하는 사무엘 하권과 곧바로 이어진다.
열왕기를 분석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다른 색깔일 뿐 아니라,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열왕기 저자 자신이 이전의 기록을 이용하였으며, 자기가 의존한 사료를 인용했음을 밝힌다. 이는 이 작품이 한 번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1열왕 11,41; 14,19.29 등은 ‘솔로몬의 행적’,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 ‘유다 임금들의 실록’을 언급하는데, 이런 사료들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본문을 편집할 때 출발점이 되었던 문헌들이다.
그러나 행적이나 실록을 언급하는 단편들은 이 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쓰면서 다른 사료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예를 들어 저자는 성전 문서고에 있던 자료도 알고 있었다(1열왕 4,1-6.7-19; 5,7-8 참조). 또 다른 부분에 나오는 일부 교훈들은 이미 문헌으로 정리되었거나, 아니면 그 정확한 성격을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구전 전승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세바 여왕의 이야기는(1열왕 10,1-13) 별도의 전승에 속한다. 아합 임금과 관련된 일화들은 전혀 다른 관점의 두 사료에서 나왔다. 한편에서는 그를 맹렬히 비판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를 용감한 임금으로 묘사한다(1열왕 22,9.35). 요시야 임금에 관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기록은(2열왕 22 - 23,30) 부분적으로 공식 실록이 아닌 다른 사료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어떤 대목들은 특별히 예언자들의 행적을 함께 다룬다. 이런 대목들은 예언자들의 제자들이 보전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언자들의 일화들이 임금들에 관한 이야기와 합해진 이유는 그 둘이 같은 시대에 속해 있었고, 예언자들이 임금들 앞에서 조언과 중개 역할을 맡아했었기 때문이다. 열왕기 안에는 아히야나 이믈라의 아들 미가, 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들에 관한 짧은 일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1열왕 13; 2열왕 21,10-15), 엘리야와 엘리사와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있다.
그러면 서로 다른 이 사료들이 어떻게 하나로 모아졌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열왕기와 관련된 가장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여호야긴의 유배 모습을 전하는 2열왕 25,27-30의 저자와, 솔로몬과 동시대 인물로서 계약궤를 묘사하고(1열왕 8,7) 그 밖에 다른 사실들을 전하는(1열왕 9,21) 저자는 결코 동일 인물일 수 없다. 솔로몬시대와 유배 시대 사이에는 사백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열왕기를 썼을까? 여러 이론들이 나왔지만, 대다수 주석가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충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
먼저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서 여호수아서와 판관기와 사무엘서가 있었다(어떤 학자들은 신명기도 포함시킨다).
첫 번째 편집자가 1열왕 1장에서 2열왕 20장을 저술하였을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연대기에, 다른 한편으로 솔로몬의 행적기와 유다와 이스라엘 임금들의 실록을 담은 문헌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이 편집자는 구전 전승의 요소들도 이용하고, 나아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 사건을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팔레스티나의 한 사제가 기원전 580년경에 이 책을 썼다고 여긴다.
첫 번째 편집자보다 한 세대 뒤에, 곧 기원전 550년경 아직 바빌론 유배가 풀리기 전에 같은 팔레스티나에서 두 번째 편집자가 나타난다. 이 두 번째 편집자는 자기가 입수한 다른 일화들과 전승들을 이용하여 선임자의 작품을 보완하였을 것이다. 그가 첨가한 내용으로는 다윗과 그의 후계에 관련된 이야기와(1열왕 1,1-2,11에 계속되는 2사무의 왕위 계승 대목), 예루살렘 포위를 다루는 본문을(2열왕 18-19; 병행 이사 36-39) 들 수 있다. 세바 여왕의 방문에 얽힌 전승도 그가 이 책 안에 집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들과 모세 율법이 그의 편집 안에서 각별히 중요하게 연결되는(여호수아서에서 열왕기 하권까지 이어진다)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두 번째 편집자를 예언자들의 집단에 속한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레미야의 제자가 아니었나 추측한다.
3. 열왕기의 연대
열왕기에 나오는 연대는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열왕기 연대는 이스라엘 역사와 고대 근동의 역사가 분명히 연결되는 몇몇 경우말고는 정확하게 정립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에집트 문헌들, 아시리아-바빌론 임금들의 실록과 그 관련 문헌들은 열왕기의 몇몇 사건들에 관하여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점들말고도 열왕기의 자료들은 흔히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우선 유다 임금들의 통치 연대를 보면 언제나 이스라엘 임금들의 통치 연대와 함께 언급되고, 이스라엘 임금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서로 모순되는 연대 체계를 끌어들이는 원인이 된다. 그 다음 필경사들의 오류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원래의 문헌에 나오는 숫자를 뒤바꾸어 놓거나 다른 숫자와 혼동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솔로몬과(1열왕 1) 요담의(2열왕 15,5) 통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세자들이 선왕과 함께 나라를 통치하게 되는 경우, 임금들의 통치 연대를 정확하게 나누어 배치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이런 예는 솔로몬과 요담의 통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연대 측정이 어려운 원인은 열왕기 안에 서로 겹치는 여러 연대 체계 때문이다. 이 다양한 연대 체계는 저마다 다른 사료들에서 나왔다. 따라서 이 책을 대하는 사람들은 연대를 측정하는 데에 세 가지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첫째는 유다의 통치에 근거한 연대, 둘째는 이스라엘의 통치에 근거한 연대, 셋째는 둘을 조화시켜 얻은 연대이다. 예를 들어 왕국 분열에서 아합 통치의 끝에 이르는(기원전 933-853년) 기간을 우리는 80년으로 보는데, 유다의 연대로는 84년, 북왕국 연대로는 78년, 그리고 둘을 조화시켜 얻은 연대는 75년이다.
우리는 연대를 측정할 때 되도록 최근의 고고학 발견들을 참작하려고 한다.
남북 왕국 임금들의 통치 연대
사울 B.C. 1030-1010년경 다윗 B.C. 1010-970년경 솔로몬 B.C. 972년경-933년
4. 열왕기의 신학
열왕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임금들의 역사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다. 열왕기에 나오는 역사 자체는 대체로 매우 간결하다. 예를 들어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므리 임금의 통치를 매우 간단하게 다룬다(1열왕 16,23-26). 그리고 세 해 동안 계속된 사마리아의 포위와 북왕국의 붕괴는 불과 몇 절로 처리한다(2열왕 17,3-6; 18,9-12). 가장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신명기적 용어와 표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 작품을 신명기계 신학이 (그리고 이 신학을 통하여 예언자들의 신학도) 배어있는 위대한 역사 문헌으로 여길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열왕기의 중요한 주제 몇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가. 왕정제도
이 책은 신명기계 저자와 예언자들이 생각하는 왕정 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참다운 임금은 주님의 규정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모세의 율법에 쓰여진 대로 그분의 법과 계명과 관습과 명령을 따른다(1열왕 2,3). 임금의 임무는 백성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1열왕 3,8-9 참조), 그 백성을 지혜와 정의로 다스리고, 동시에 백성을 “섬기는”(1열왕 12,7) 것이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데에 전념하는 일은 임금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의무를 기준으로 모든 임금의 통치마다 짧은 평가를 내린다.
불행히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임금들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엄격한 비판을 받는다. 열왕기 저자는 서른네 명의 임금들에 관해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후렴처럼 되풀이한다. 그는 실례들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주님에 대한 불충은 여러 가지이다. 이를테면 우상을 숭배하고, 거짓 신들에게 신전이나 제단을 세워 바치며, 이방 신들에게 문의하고 온갖 억압과 불의로 백성을 괴롭히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동의 없이 전쟁에 임하고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 등이다.
저자의 가장 큰 비난은 율법을 거스르는 경신례를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임금들에게(특히 북왕국 임금들) 떨어진다. 때때로 어떤 임금들은 뉘우치고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왕국의 전체적인 모습은 어둡다. 열왕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멸망은 결국 임금들과 그들에게서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마땅하고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나. 다윗과 그의 왕조 유다
임금들의 맨 앞에는 가끔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는(1열왕 3,6; 8,24; 11,13 등), 이 왕조의 창시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자리잡는다. 주님에 대한 다윗의 충성과 열심은 올바른 임금의 본보기가 되어, 그의 후계자들의 평가 기준이 된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걷고(1열왕 3,3), 아사는 자기 선조 다윗처럼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며(1열왕 15,11), 요시야는 자기 선조 다윗이 걸어간 길을 정확하게 따라갔다(2열왕 22,2). 요시야에 관해서는 저자가 1열왕 13,2에서,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 요시야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의 불충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나 역대 임금들에게 적용된 다윗과의 일치라는 평가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아히야 예언자는 여로보암이 다윗과 같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1열왕 14,8).
열왕기 저자는, 다윗 후계자들의 불순종을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분열과(1열왕 11,9-11) 유다 왕국의 멸망을(2열왕 23,26 이하 참조) 가져온 직접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1열왕 2,4에서 경고하는 위협에도 다윗 집안에 내리신 주님의 약속은 영원하리라고 믿는다.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너에게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으리라”(1열왕 2,4. 그리고 2사무 7,12-16 참조). 주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시어” 예루살렘에 “등불을” 하나(다윗 왕조의 왕자) 남겨두신다(2열왕 8,19. 그리고 1열왕 15,11 참조).
마침내 열왕기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후손은 비록 갈대아에 유배된 몸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바뀌어가는 것을 체험한다. 바빌론 임금은 그에게, 죄수복을 벗고 날마다 임금의 식탁에서 음식을 들 수 있는 은혜를 베푼다.
다. 예루살렘과 성전
신명기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열왕기는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특별한 자리를 부여한다. 우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성읍이다(1열왕 8,12). 그리고 그곳은 성전의 성읍이다. 1열왕 8,15-19에 따르면 이 성전 건축은 원래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집 한 채 짓기를 간절히 바라던 다윗의 소원이었다(2사무 7,1-16 참조). 성소의 중요성은 성전 봉헌 때에 솔로몬이 바친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열왕 8,23-53).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의 어떠한 생존 환경에서도 하느님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이다(탈출 33,7의 “만남의 천막” 참조). 요시야의 종교 개혁도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열왕 22-23).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도 성전 안에서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첫 시도는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다. 이후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경신례 생활에서 중심이 된다. 열왕기 저자가 미리 예루살렘 밖에서도 제사가 바쳐졌음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1열왕 3,2; 22,44; 2열왕 12,4; 14,4; 15,4.35) 종교 개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제사를 바친 실례로 가르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친 제사를 들 수 있다(1열왕 18).
성전을 예배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까닭에, 사제들은 경신례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따라 제사를 바치는 권한은 오로지 사제들, 곧 레위 지파에 속한 사제들에게만 귀속된다. 1열왕 8,1-6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부터 이미 그들이 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묘사한다. 열왕기 저자는 나중에 아달리야가 다윗 가문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할 때에 다윗 왕조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 일도 사제들의 공적으로 돌린다(2열왕 11). 저자는 요아스가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게 된 것도 여호야다 사제가 그를 잘 지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열왕 12,3). 사실 솔로몬을 도유한 사람도 사제였다(1열왕 1,39).
예루살렘 중심으로 레위 지파 사제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예배를 철저히 강조하면서, 열왕기 저자는 다른 한편 여로보암의 주도로 단과 베델 같은 다른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완전히 배척한다. 저자는 “여로보암의 죄” 또는 “여로보암의 길”(이런 표현은 스무 번 가량이나 나온다)을 엄하게 단죄하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여로보암 자신과 그를 따른 그의 후계자들의 잘못을 고발한다(역시 스무 번 가량). 열왕기 저자의 견해로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바치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한 왕국에 총체적인 단죄와 심판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 왕국의 임금이 바알의 제단들을 철거하여 주님께 충성을 보인다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2열왕 3,1-3 참조). 이같은 실제적 분열은 사마리아가 함락되기까지 한탄의 대상이 된다(2열왕 17,23 참조).
라. 예언자들의 개입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한 개입은 열왕기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승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엘리야와 엘리사뿐 아니라, 나단, 스마야, 아히야, 미가야, 이사야, 여예언자 훌다도 큰 권위를 지닌 이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기적들(특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 못지않게 그들의 정치적 행동도 매우 중요하게 드러난다. 나단은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1열왕 1,11-17). 엘리야는 하자엘을 아람의 임금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도유하라는 명령을 받는다(1열왕 19,15 이하. 그리고 2열왕 9,1-3; 8,11-13 참조).
죽음의 신탁을 전함으로써 임금과 그 가문의 파멸을 선언하는 것도 예언자들의 몫이다. 아히야 예언자와 여로보암 임금(1열왕 14,10-11), 엘리야 예언자와 아합 임금의(1열왕 21,21-24) 경우가 그 좋은 예들이다. 이 밖에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의 승리를 예고한다(2열왕 20,14-19).
그런가 하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임금의 승리를 알려주거나(엘리사: 2열왕 7,1; 13,17-19. 이사야: 2열왕 19), 군사 행동에 개입하기도 한다(이름모를 예언자: 1열왕 20,13-14. 미가야: 1열왕 22,19-28. 엘리사: 2열왕 3,9-19; 6,8-7,20).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에 얽힌 이야기에서 스마야 예언자는 동족 사이의 전쟁을 막는 자로 나타난다(스마야: 1열왕 12,22-24).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아합 임금 앞에서, 임금이 포도밭 주인 나봇의 조상 대대로 이어오는 권리를 짓밟았다고 비난한다(1열왕 21,3-17 이하).
이 모든 경우에 예언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그분께 순종할 것을 호소하고, 그분께서 충성하는 이들을 보호하시리라는 약속도 선언한다.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과 규정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예언자들의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을 유도한 법전이 발견되었을 때, 여예언자 훌다가 한 역할이 그 좋은 예이다(2열왕 22,14-22). 이처럼 열왕기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종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와 정치 영역에서도 탁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런 영역들이 다같이 이스라엘의 한 분 “임금님”께 속하기 때문이다(이사 6,5; 44,6; 즈가 14,16. 시편 입문 19-20쪽,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노래들' 참조).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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