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유딧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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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4,490 | 추천수0 | |
파일첨부 유딧입문.hwp [792] | ||||
유딧 입문
유딧서는 토비트서나 에스델서처럼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던 끝에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자세히 서술하는 이야기이다. 이 유딧서의 소재는 팔레스티나 땅의 조그마한 성읍이면서도,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는 길목들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인 베툴리야가 포위되는 사건이다. 그 때에 신심 깊은 한 과부가 이 성읍에서 나가 적군의 진지로 간다. 유딧이라는 이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적장 홀로페르네스는 그를 꾀려고 연회를 여는데, 자기가 술에 잔뜩 취하고 만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유딧은 적장의 목을 베어 버린다. 이로써 침략군이 패주하게 된다.
1. 이야기의 역사성
이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먼저 기원전 604년에서 562년까지 바빌론을 다스린 느부갓네살 임금이 여기에서는 기원전 612년에 그의 부왕 나보폴라사르와 메대인들의 연합군에 점령된 니느웨의 임금으로 나온다. 이 느부갓네살은 본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파괴시키고 나서 예루살렘의 주민을 유배지로 끌고 가기도 한 자이다. 그러한 그가 유딧서에 따르면 자기 군대를 팔레스티나로 원정 보내는데, 이 군대가 유배에서 막 돌아온 이스라엘인들에게(4,3; 5,19) 패배하고 괴멸하게 된다. 그리고 침략군을 지휘하는 ‘홀로페르네스’와 그의 내시 ‘바고아’는 페르시아 이름인데, 이 이름들은 아르닥사싸(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기원전 359-338) 파견한 이집트 원정대를 기술하는 어떤 문헌에도 나온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유딧이 속한 시므온 지파의(유딧 9,2. 그리고 8,1과 각주 참조) 영토 안에 있는 브돌이 언급된다(여호 19,4). 반면에 유딧서의 베툴리아는 사마리아 지방, 곧 도다인과 에스드렐론(또는, 이즈르엘) 평야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파른 산비탈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 계곡에는 샘물들이 솟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베툴리아라는 이름과 이 곳에 대한 유딧서의 묘사에 들어맞는 지역이 달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가 베툴리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딧서 이야기에는 니느웨, 다마스쿠스, 띠로, 예루살렘처럼 널리 알려진 이름들과 함께 다른 지명들도 나오는데, 주석가들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곳들이 지리적으로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1,5에는 라가오 경계 안에 있는 대평야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말이 나온다. 이 라가오는 현재의 라이, 곧 토비트서에서도 언급되는(4,1; 5,6), 메대 땅 엑바타나 북동쪽에 있던 라게스의 변형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명들의 문제가 모두 이런 식으로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은 유딧서의 내용이 역사 기술이 아니라, 어떠한 가르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자유롭게 구성한 이야기임을 말해 준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 전통은 실제 사건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예컨대 이와 비슷한 경우로 에스델 왕비 이야기가 있는데, 이 왕비는 결국 삼촌 모르드개의 지도를 받아 큰 일을 이룬다. 반면에 유딧은 고대 사회에서 예사롭지 않은 방식으로 에스델보다 더욱 현저하게 주도적 구실을 해낸다. 저자가 이러한 여인의 이야기를 몽땅 창작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교화적 성서 해설로서 ‘미드라쉬’라고 불리는 유다교 문헌에도 유딧 이야기와 비슷한 설화가 꽤 자주(열두어 번)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설화는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임금이 이교 제단과 그 의식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지 3년 만에, 곧 기원전 164년에 거행된 성전 봉헌식을 기념하는 하누카 축제와 관련된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활약은 안티오쿠스 임금의 그리스 군대 또는 셀류코스 왕국의 군대가 포위한 예루살렘에서 펼쳐진다. 이 여주인공은 또 종종 무명으로 나온다.
비잔틴의 두 연대기 저자, 곧 기원후 6세기의 요한네스 말랄라스와 이 저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기원후 11/12세기의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도, 유딧서와 내용은 같으면서 형식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임금 때에 예루살렘이 포위된다. 그 때에 유딧이라는 여인이 자기 민족을 배신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적진으로 간다. 그 뒤에 자기의 미모에 반한 홀로페르네스와 함께 외따로 떨어진 천막에 함께 머무르는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가 자기와 함께 잘 때에 그를 죽인다. 이어서 유딧은 별 어려움 없이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고, 그가 잘라 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창에 꽂혀서 성벽 높은 곳에 효시된다. 이 설화는 여주인공이 적장에게 몸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반면에 유다교 문헌에는 여주인공이 적장의 뜻에 따르겠다는 약속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유딧서는 더욱 조심스럽다. 유딧은 애매한 말을 하는데(12,14), 이는 완곡한 표현으로서 사실상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정중한 대답에 불과한 말일 수 있다.
이렇게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같다는 사실, 그리고 대중라틴말성서와 유다교의 여러 문헌에 따르면, 관건이 되는 공적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설화 전통의 기원에 실제 사건이 자리잡고 있음을 드러내는 새로운 표지가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이 근동 지방을 다스릴 때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된다. 유딧의 무공 덕분에 평화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러한 상황은 페르시아 시대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딧서가 말하는 사건의 정확한 연대와 정황과 규모 등을 이 이상으로 자세히 알아 낼 방도는 없다.
2. 문학 유형
이러한 유딧서의 문학 유형은 현대의 분류에서 어느 한 유형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는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역사의 틀을 조심스럽게 유지하면서 상상의 사건들을 그 안에서 전개시키는 역사 소설도 아니다. 또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 부차적인 사건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상상을 동원하여 소설로 엮은 역사 이야기도 아니다. 유딧서의 이야기는 일종의 ??미드라쉬??이다. 이 교화적 해설에서는 실제로 일어났을 수 있는 핵심 사건이 상당히 자유롭게 다루어지고 새로 지어지는 여러 가지 일화로 확대되며, 여기저기에 성서 본문을 시사하는 말들이 뒤섞인다. 저자는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에서 영감을 얻는다. 곧 다말의 꾀(창세 38), 에훗 판관이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모압 임금 에글론을 죽인 일(판관 3,12-30), 야엘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적군의 장수 시스라를 죽인 일(판관 4),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1사무 17),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호소한 일(1사무 25) 등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실제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건으로 이루어진 밑그림을, 기존의 성서에서 끌어온 자료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윤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작업은 최종 목적인 교화를 목표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곧 그 출발점이 어떠한 교의에 관한 교육적 예증을 제시하려는 원의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라는 것이고, 이 책의 가르침이 한 가지에 제한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유딧서가 일종의 묵시록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 둘은 거리가 멀다. 물론 유딧서에도 사건들이 확대되거나 과장된다. 그러나 예컨대 다니엘서나 신약성서의 묵시록, 그리고 이 책들과 유사하면서도 경전에는 들지 못한 제4에즈라서 같은 작품들처럼 상상의 괴물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딧서는 묵시 문학에서처럼 종말의 대재앙이 아니라 긴 평화 시대로 결말을 맺는다(16,25).
3. 저자와 저작 시기
유딧서의 원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디 셈족 말 곧 히브리 말이나 아람 말로 저술하였을 것이다. 그 뒤 기원전 2세기 또는 그보다 후대에 그리스계의 각색자가 칠십인역을 이용하면서 그것을 그리스 말로 번역한다. 그래서 칠십인역과 히브리 말 성서가 서로 다를 경우에는 그리스 말 번역본을 따른다. 곧 유딧 6,2 = 이사 28,1; 유딧 8,16 = 민수 23,19; 유딧 9,7과 16,2 = 탈출 15,2; 유딧 10,4 = 창세 38,14; 유딧 10,4 = 이사 3,20; 유딧 14,18 = 1사무 13,3; 유딧 16,12 = 1사무 20,30 등이다. 이 그리스계 편집자는 셈족 말, 아마도 히브리 말로 된 본문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히브리 말 문체를 충실히 반영하는 여러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본문을 때로는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이 (히브리 말에서 번역된?) 아람 말 본문을 라틴 말로 옮긴 대중라틴말성서와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사실이 말해 주는 것처럼, 때로는 자유롭게 각색하기도 한다.
셈족 말로 쓰인 원작은 그리스계 셀류코스 왕국의 박해에 항거하여 마카베오 형제들이 봉기하던 시대에 최종적인 꼴을 갖추었을 것이다. 자기가 온 세상의 유일한 신이라는 느부갓네살의 주장은(3,8; 6,2)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악한 임금, 셀류코스 왕국의 안티오쿠스 4세가 떠벌이는 호언에 비길 수 있다(다니 11,36-37). 이 유딧서 원작의 저자는 틀림없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의 이야기를 이용하면서 종교와 율법과 성전과 관련하여 위협을 받는 동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예들을 들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아무리 큰 위험에 빠져도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또 당신을 믿는 이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당신께 등을 돌리지 않는 한 그들의 적들이 어떠한 일을 꾸미든지 그것을 좌절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여주인공 ‘유딧’은 ‘유다인 여자’를 뜻한다. 그리고 ‘유다’는 히브리 말과 아람 말, 또 그리스 말에서도 여성이다. 그래서 ‘유딧’은 이교도 박해자들에게 항거하라고 촉구되는 ‘유다’ 민족이나 나라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4. 본문과 고대 번역본들
유딧서의 기초 본문은 셈족 말로 쓰인 원문을 자유로이 번역 또는 개작한 그리스 말 본문이다. 우리는 한하르트가 여러 종류의 수많은 수사본과 고대 번역본들을 대조?정리한 것을 이용한다: Robert Hanhart, Septuaginta. Vetus Testamentum Graecum. Auctoritate Academiae Scientiarum Gottingensis editum. VIII/4, Judith, Vandenhoeck & Ruprecht 1979.
그리스 말에서 번역된 고대 라틴말역은 적어도 여섯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라틴 말 역본들은 완전히 새로운 번역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매우 깊숙이 손질된 교정본들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번역본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 말 본문과는 거리가 있는 원문을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부류의 수사본들을 대조?정리한 고대 라틴말역의 종합판은 아직도 준비 중이다.
시리아말역은 고대 라틴말역에서 볼 수 있는 본문 형태와 가깝다. 대중라틴말성서는 예로니모 성인이 기원후 400년경에 어떤 아람 말 원문에서 새로 번역한 것이다. 성인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이 번역은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은 채 상당히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 작업을 하면서 그는 기존의 라틴 말 번역본들을 이용하는데, 아람 말 본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변경하거나 삭제하였다. 이렇게 이루어진 라틴 말 번역본은 칠십인역보다 현격하게 짧다. 그리고 이 대중라틴말성서에는 칠십인역에 없는 부분도 들어 있고 일화들의 배열 순서도 썩 만족스럽지 않다. 이로써 예로니모가 칠십인역의 바탕이 된 셈족 말 원본과 같지 않은 아람 말 원문을 따랐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 아람 말 원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5. 경전성
유다교의 라비들은 구약성서의 범위를 정할 때에 유딧서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같은 경우에 속하는 토비트서, 지혜서 등처럼 유딧서도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를 망설였다. 특히 유다교 경전을 잘 아는 학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이 책을 자주 인용하며 폭넓게 이용하였다. 유딧서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부정하는 저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노센스 1세 교황이 405년에 작성한 경전 목록에는 유딧서가 포함된다. 그리고 이 목록은 1442년의 피렌체, 1546년의 트리엔트, 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확인된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들은 구약성서의 범위와 관련하여 유다인들의 이른바 ‘좁은’ 경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개신교 성서 학자들은 유딧서를 비롯하여, 유다인들에게 신뢰를 받으면서도 그들의 경전에는 들지 못한 책들을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 분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책들을 ‘제2경전’이라고 부르게 된다.
신약성서에서는 유딧서가 인용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생각이나 표현 방식이 유딧서와 비슷한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첫 세대 역시 이 책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곧 유딧 1,11과 루가 20,11; 유딧 8,6과 루가 2,27 및 1디모 5,5; 유딧 8,14와 1고린 2,11; 유딧 8,25와 야고 1,2; 유딧 13,18과 루가 1,42; 유딧 13,19와 마태 26,13 등이 서로 관련된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유사 구절은 대중라틴말성서에서만 발견되는데, 유딧 8,24-25와 1고린 10,9-10이다.
6. 종교적 의미
유딧서는 유다인들이 이교도 세계의 위협에 직면하던 시대에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저술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때에는 나라의 존립만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경신례까지 위험에 처하였다.
유딧서에는 구약성서 전체에 공통된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히 독창적인 관점들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사건들이 극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들이 쉽게 가려질 수 있는데, 그것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유딧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초월적인 존재이시다. 그분의 계획은 사람들과 관련해서 볼 때에 자비로 충만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끌어들이시는 시련의 기간과 범위도 확실히 예견할 수 없다(8,14). 사람들이 그분께 바치는 제물들은 그분의 위대함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다(16,16). 또 그분의 섭리는 부차적 요인들을 통해서 실현된다. 곧 유딧서 이야기에는 어떠한 기적도 비상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한쪽에서는 야심과 관능 또는 공포로, 그리고 유딧 쪽에서는 반대로 신앙과 용기에서 나오는 인간적 정열의 결과로 펼쳐진다.
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서 온 백성의 구원을 이룬 사람은 한 여인이다. 모두 어찌 할 바를 모를 때에 이 여인만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지혜로 베툴리아의 지도자들인 남자들의 용기를 북돋운다. 그리고 그들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혼자서 대담한 일을 꾸며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무공을 이룬 다음, 이 여인은 아내와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다른 일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생활을 한다. 이는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일종의 여성주의이다.
유딧이 꾸민 계략은 그 자체로서 어떠한 덕의 표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옛 계약의 불완전성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어야 하는 저급 도덕에 따른 행동도 아니다. 유딧 이야기의 많은 세부 사항이 시사하는 대로, 성서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사람들의 꾀나 계략의 여러 본보기와 비교해 보면, 유딧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평가가 나온다.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이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고 그 땅으로 들어가, 민족의 생존과 종교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유딧은 정당 방위로 적군의 장수를 죽이는 것이다. 유딧과 가장 유사한 예는 야엘의 경우이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을 침략한 시스라를 죽인다. 자기 남편의 씨족과 하솔 임금으로 시스라의 주군인 야빈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시스라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판관 4,17-22).
유딧은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자질이나 용모에 대해서 어떠한 자신이나 환상도 품지 않는다. 그리고 홀로페르네스 앞에서 신중하고 품위 있게 행동할 따름이다. 이교도 홀로페르네스가 강인하고 정결한 이 여인에게 빠져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정염 때문이다. 유딧은 하느님의 도움을 확신하면서, 자신을 잘 다스리게 해 주는 기도와 고행 생활에 힘입어 위험이 가득한 상황과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딧서에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엄격주의적 해석의 흔적도,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을 피하려는 다니엘과 그 동료들의 세심한 노력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다니 1,8-16). 신심 깊은 이 과부의 금식은 어떠한 계명의 준수가 아니라, 애도하고 참회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축제 때에는 금식을 중단하기도 한다(8,6).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에게 한 말은 저자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한 어떤 명제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베툴리아의 주민이 아주 사소한 것들에나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들로서 보잘것없는 적이라고 믿게 만듦으로써 적군을 속이려는 것일 따름이다. 사실 유딧서는 율법의 세부 사항들에 관하여 일종의 무관심을 드러낸다. 여주인공은(16,24 참조) 자녀가 없는데도 신명기의 규정(25,5-10)에 따라 수숙혼(嫂叔婚)을 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또 율법이 금하는데도(신명 23,4. 그리고 느헤 13,1-3 참조) 암몬 족인 아키오르가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유딧 14,10). 이러한 사실은 율법 준수라는 울타리로 선택된 백성을 보호하기보다, 모든 사람이 참되신 하느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터 주려고 애쓰는 개방적 성향이 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 바탕에는 율법에 관한 유연한 이해가 깔려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율법의 그 어떠한 부분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또 부차적인 사항들을 언제든지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성서의 저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는 고통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백성이나 개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내리시는 시련이며, 또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8,25-27). 유딧은 자기 민족이 과거처럼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심을 잃지 않는다. 자기들이 포위되어 겪는 곤궁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하신다는 징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백성의 구원과 거룩한 성읍의 보호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더 높은 덕을 실천하라는 그분의 부름이다(8,21-24). 유딧은 바로 이 몫을 선택한다(13,20). 고통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배려의 표시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8,25).
대제국의 임금들은 종종 교만에 부풀어 자신을 신격화하기에 이른다. 모든 민족이 자기를 유일한 신으로 받아들인다는 느부갓네살의 호언은(3,8),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과 같은 역사적 임금들 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가공의 다리우스 임금의 주장보다 더하다(다니 6,8). 이와 관련하여 유딧서의 저자는 이사 14,13-14, 에제 28장, 그리고 다니 11,36의 무도한 임금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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