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마카베오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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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6,031 | 추천수1 | |
파일첨부 마카베오입문.hwp [939] | ||||
마카베오 입문
마카베오 상?하권은 유다교 경전에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예로니모 성인은 이 책을 외경으로 여겼고 나중에 개신교에서도 그렇게 분류하였다. 그렇다고 교부들이 마카베오서를 덜 인용하거나 낮게 평가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4세기 말부터서야 경전 목록에 나타나는데, 가톨릭교에서 이 책이 경전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논란이 끝나는 것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때였다. 루터는 마카베오 상권이 경전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였다.
마카베오 상하권은 헬레니즘 시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려 주는 유일한 책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셀류코스 4세 통치 말기인 기원전 176년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누스가 즉위하는 기원전 134년까지 반세기 가량의 역사만을 다룬다. 그 때에 유다 땅은 셀류코스 왕조의 속국이었다.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하는 셀류코스 제국은 지중해에서 이란의 평원 지대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으나, 로마인들과 파르티아인들의 압박과 끊임없는 왕위 계승 분쟁으로 급속히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마카베오 상권과 하권은 주제가 비슷하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들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유다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고,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기원전 175-164년) 말살하려던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책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다루는 시기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카베오서는 전부 그리스 말로 전해진다. 그리고 하권은 본디부터 그리스 말로 쓰여졌다.
이 두 책에서는 셀류코스 왕조의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에 따라 사건들을 기록한다. 곧 태양의 한 해 주기와 달의 한 달 주기를 혼합하여 계산하는 달력으로 춘분이나 추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달력이다. 상권은 일반적으로 가을을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을, 반면에 하권은 봄을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을 따른다. 가을 기준 달력에 따르면 셀류코스 왕조가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한 것이 (기원전 46년부터 사용되는 율리우스력으로) 기원전 312년 10월 7일이 되고, 봄 기준 달력에 따르면 기원전 311년 니산 달(춘분 다음 첫째 달) 초하룻날 곧 (율리우스력으로) 4월 3일이 된다. 셀류코스 왕조의 이 태양?태음력은 바빌론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이용되었다. 이렇게 하여 봄 기준의 달력은 1마카 1,54; 2,70; 4,52; 9,3.54; 10,21; 13,41.51; 14,27; 16,14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성전과 관계된 일이나 유다 내부의 역사와 관련된 연대들이 제시된다.
우리말 번역은 W. Kepler, Septuaginta. Vetus Testamentum Graecum. Auctoritate Academiae Litterarum Gottingensis editum. IX/1, Maccabaeorum Liber I, Vandenhoeck & Ruprecht 1990, 그리고 같은 곳의 W. Kepler - R. Hanhart, Maccabeaorum Liber II(IX/2) 19762를 대본을 삼았다.
마카베오 상권 1. 내용
마카베오 상권은 유다 마카베오, 그리고 그의 두 형제 요나단과 시몬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이다. 시몬은 유다 땅에 하스몬 왕조를 창시한 사람이다. 저자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 후계자들, 특히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를 강요하려고 했던 에피파네스의 시도를 입문으로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1장), 마따디아 사제와 그 아들들의 반란 이야기로 들어간다(2장).
첫째 부분은 마따디아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베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유다 군대의 장수로 임명된 마카베오는 기원전 166년부터 160년까지 여섯 해 동안 독립 투쟁을 지휘한다(3장 - 9,22). 그는 먼저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 4세가 페르시아에 원정을 가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을 담당한 리시아 총독을 공격한다(3장 - 4,35). 마카베오 상권은 이어서,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유다가 정화시킨 일과 주위 민족들을 굴복시킨 사실을 다루고(4,36 - 5장), 에피파네스의 죽음도 알린다(6,1-17). 같은 내용을 마카베오 하권도 전하는데, 먼저 9장에서 에피파네스의 죽음을, 그리고 10장에서 성전 정화를 이야기하는 이 하권의 순서가 더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하권에도 순서의 혼동이 없지는 않다. 11장에 나오는 편지들이 그 좋은 예이다.
에피파네스의 아들 안티오쿠스 5세의 통치 때에 리시아가 시도한 제2차 원정은 마카베오에게 이로운 쪽으로 결말이 난다(6,18-63). 그 뒤에 셀류코스 4세의 아들 데메드리오 1세는 자기 조카 안티오쿠스를 밀어 내고 왕위를 차지한 다음, 리시아를 바키데스로 교체한다. 그리고 데메드리오 1세와 바키데스는 유다의 대사제 알키모스의 사주를 받고, 유다 마카베오의 유격 부대를 추격하게 한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데메드리오 1세가 유다 지방 담당 장수로 임명한 니가노르에게 대승을 거둔다(7장). 바로 이 날에(기원전 160년 3월 28일) 니가노르가 죽는데, 하권은 이 사건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상권은 로마인들에 관한 특이한 찬사에 이어(8장), 바키데스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돌아와 전투를 벌이는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마카베오가 명예롭게 전사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9,1-22).
둘째 부분에는 요나단이(기원전 160-143년) 등장한다(9,23 - 12장). 요나단은 데메드리오 1세와 그의 아들 데메드리오 2세가 처음에는 에피파네스의 손자(?) 알렉산더 발라스와, 다음에는 트리폰과 싸우는 기회를 적절히 이용한다. 트리폰은 먼저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 안티오쿠스 6세의 이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직접 다스린다. 알렉산더가 기원전 152년에 대사제로 임명한 요나단은 트리폰과 동맹을 맺지만, 트리폰이 배신하는 바람에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만다.
그래서 시몬이 요나단의 뒤를 잇는다. 그러나 트리폰이 시리아로 돌아가기 직전에 요나단을 처형하는데(기원전 143년 말; 13,23-24) 시몬은 이 일을 막지 못한다. 이 불행한 사건을 빼면, 대사제이며 영주인 시몬의(기원전 143-134년) 업적을 다루는 셋째 부분의(13 - 16장) 시대는 평온한 때였다.
시몬은 유다의 성읍들을 튼튼하게 하고 요빠와 가자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채를 점령한다(기원전 141년 6월; 13,51). 기원전 142년 5월에 시몬이 데메드리오 2세와 다시 관계를 맺는데, 데메드리오 2세는 기원전 145년에 가서야 협약 내용을 인준한다(13,35; 11,30). 데메드리오 2세의 동기로서 파르티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안티오쿠스 7세도 기원전 139년에 유다인들에게 특전을 인정하지만(15,1), 트리폰을 제거한 다음에는 시몬에게 등을 돌린다(15,25-41). 시몬은 나이를 먹자 자기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에게 전권을 이양한다. 이 요한은 안티오쿠스 7세가 해안 지역 수장으로 임명한 켄데베우스를 패배시킨다(16,1-10). 얼마 뒤에 시몬은 사위 프톨레매오에게 살해되지만, 요한 히르카누스는 자기까지 죽이려는 프톨레매오의 흉계를 미리 알아차려 암살자들을 처단하고 정권을 장악한다(16,11-24). 그 전에 시몬은 스파르타와 로마와 맺은 계약을 갱신하고(14,16-24; 15,15-24), 지중해 동쪽 전 지역의 왕국들과 성읍들과 관계를 맺어 놓았다(15,22-23).
2. 저작 시기와 문학 · 종교적 특성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이 책을 끝맺으면서, 요한 히르카누스의 나머지 행적과 업적은 대사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기원전 104년 히르카누스가 죽은 뒤에 이 사료를 이용하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도 그가 이 책을 쓴 때는 기원전 100년경일 것이다. 집필 시기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로마가 유다 땅을 지배하기 전이어야 한다.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는데, 마카베오 상권이 이 시점 이후에 저작되었다면, 8장의 로마인들에 대한 찬사가 괴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팔레스티나에 살던 유다인인 저자는 고대 역사 문헌들의 문체를 본뜬다. 그리스 말 본문은 셈족 말로 쓰인 원문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이 셈족 말은 거의 틀림없이 히브리 말이었을 것이다. 하스몬 시대에 일어난, 구약성서가 쓰인 히브리 말의 부흥은 쿰란 문학으로 여실히 입증된다. 아람 말도 쓰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미드라쉬 문학과 유언 문학으로 대표되는 대중 문학에 한정된다. 일종의 언어적 보수주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보수주의를, 유다 민족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사적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카베오 시대에 예언 운동은 끝났고 종말론적, 그리고 메시아적인 전망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이러한 전망들은 마카베오 시대에 대중적이고 묵시적인 문학에만 겨우 존속할 따름이다). 마카베오 하권이 무엇보다 성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 반하여, 상권은 계약과 분리될 수 없는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고심과 염려를 드러낸다. 유다인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고, 또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교 풍습을 거부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책에서는 경외심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지만, 승리가 오는 곳은 “하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스몬 가문의 지지자인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요구하면서도,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및 권력층 사이에 일어난 갈등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또 하시드인은 찬사의 말로 언급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에세네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유다인 저술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 에세네파는 요나단 시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광신주의와 거리를 두는 신심이야말로 옛 계약의 영구적 가치를 드러내는 진정한 증언 구실을 한다.
마카베오 하권 1. 저자
마카베오 하권은 상권의 연속이 아니다. 하권의 이야기가 안티오쿠스 4세의 즉위 전에 시작하여 유다 마카베오의 죽음 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권에서는 마카베오가 등장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 상권에서보다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이 하권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건들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곧 기원전 160년경에 키레네 출신 야손이 다섯 권으로 펴낸 것을 요약한 책이다. 야손은 1,7에 나오는 반역자 야손과는 다른 인물로서, 아프리카 북부에 있던 키레나이카의 수도 키레네에 살던 저술가였다. 그는 예루살렘, 셀류코스 왕국의 행정, 그 관리들과 그들의 칭호를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리스식 교육을 철저히 받았으면서도 믿음이 매우 깊은 유다인이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나, 특히 전투 전후의 기도에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유다교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격렬한 독설을 퍼붓는다.
야손과 마찬가지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무명의 사람이 두 가지 문학 기법을 동시에 이용하여 야손의 책을 요약한다. 먼저, 야손이 서술한 역사에서 나타나는 단절 부분들을 짧은 이야기를 덧붙여 잇는 기법을 쓴다. 그리고 야손이 서술한 사건들과 그 해석을 유지하면서도, 자기에게 매우 익숙한 그리스 말 구문법에서 이용되는 생략 방식들을 적용하여 이야기체의 흐름을 이를테면 압축한다. 그러나 이 요약 기법은 야손의 책이 지닌 근본적 특성, 곧 내용상으로는 종교적이고 문체상으로는 비장하다는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권의 본문에서 어느 것이 야손의 글이고 어느 것이 요약자의 손에서 나온 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 책 본문에 삽입된 일곱 편지 가운데 처음 두 편지도 이 요약자가 아람 말이나 히브리 말에서 그리스 말로 옮겼을 것이다. 마카베오 하권의 시작 부분에 배치된 이 두 편지는 책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성전 봉헌'을(10,1-8) 기리는 구실을 한다. 두 편지 가운데 더 나중에 쓰인 편지의 연대가 기원전 124년에 상응하기 때문에, 마카베오 하권은 이보다 조금 늦게 저술되었을 것이다.
2. 역사 개념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신들이 세상의 균형을 통시적(通時的)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도 역사를 목적론적 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모든 사건을 하느님 뜻의 결과로 해석한다. 박해자들과 배반자들에게 내리는 징벌과 사악한 원수들이 당하는 패배뿐 아니라, 유다인들을 올바른 길로 돌려 놓는 사건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저자에게 유다 마카베오의 승리는, 순교자들의 수난 공로로 하느님께서 다시 호의를 베푸신다는 징표이다. 사건들의 서술에 이어지는 설교에서는 유다교의 전통에서 가르침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새로운 교훈을 내놓기도 한다.
3. 창조
셈족의 우주관과 신학을 그리스의 우주관과 갈라 놓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창조이다. 그리스 사상은 이와 관련하여 질량 보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시인이며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가 ‘무에서 무가 나올 수 없다.’고 표현해 낸 이 원칙은, 탈레스 이래 스토아 학파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체계에 관한 생각을 지배하였다. 이는 원자론자들처럼 무와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상가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카베오 하권 이전의 유다인들은 우주 생성론과 관련하여, 하느님께서 세상을 ‘무에서’ 창조하셨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이 창조는 “한처음”에(창세 1,1) 완전한 무, 곧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혼돈에서 존재를 불러 내시는 첫째 행위와, “빛이 생겨라”와(창세 1,3) 같은 명령으로 원초적 혼돈을 체계화하시는 둘째 행위를 포함한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전에 이미 창조된 혼돈을 정돈하는 이 둘째 단계의 창조를 이야기한다. 마카베오 하권보다 상당히 늦게 저술된 지혜서는, 애초의 혼돈의 창조에 관한 언급 없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무형의 물질”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지혜 11,17-18).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는 일곱 순교자 어머니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에서 만드셨다고 밝힌다(2마카 7,28). 이로써 저자는 창세 1,1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 창조의 근본 문제를 더욱 명확히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에 관한 신약성서의 말씀을 예고한다(골로 1,15-20; 요한 1,3 참조).
4. 의인들의 부활
마카베오 하권의 저자는 다니엘서의 종말론을 발전시킨다. 이 종말론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의인들의 영혼이 누리는 영원한 행복만을 말하는 지혜서보다,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까지 포함한 의인들의 부활을 가르치는 바리사이들의 종말론에 더 가깝다. 엘르아잘 노인의 경우에는,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전망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6,23), 죽은 다음 죄인이 받게 될 징벌을 배제하지 않는다(6,26).
5. 중개 기도
마카베오 하권은 또 다른 신학의 발전을 보여 준다. 곧 죽은 이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 이들이 바치는 기도와 제사가 효력을 지니고(2마카 12,40-45), 또 반대로 오니아스와 예레미야처럼 죽은 의인들이 산 이들을 위하여 중개 기도를 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15,11-16). 이 교리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도 이어받아 자기의 저술에서 성조들도 중개자로 거명한다. 히브 7,25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약성서의 저자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개자이시다(그러나 묵시 5,8도 참조). 나중에 개신교에서는 죽은 이들의 운명은 오로지 하느님의 결정 사항이라고 하면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통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성인들의 중개 기도는 큰 역할을 해 왔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성인들의 중개 역할을 인정한다. 죽은 이들을 위한 산 이들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루터는 2마카 12,44에 나오는 유다 마카베오의 견해를 원칙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와 관련하여 개신교에서는 마카베오 상?하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6. 둘째 편지와 축제
마카베오 하권의 일부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한데 모아 놓으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 앞부분에 자리잡은 둘째 편지가(1,10 - 2,18) 특히 중요하다. 이 편지는 틀림없이 유다 마카베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옛 문헌에 정통한 한 사제가 이집트에 사는 유다인 공동체의 학자 아리스토불로에게 쓴 것이다. 이 편지의 구체적인 목적은 마카베오와 팔레스티나 유다인들의 이름으로, 이집트의 유다교인들에게 자기들과 함께 성전 정결 예식을 거행하라고 권면하면서, 제148년 기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로(기원전 164년 12월 15일) 확정된 이 축제의 거행 방식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이다. 편지의 저자는 이 축제의 일반 예식으로 초막절 예식을 제시한다(1,18). 이 예식은 이미 솔로몬이 첫 성전을 봉헌할 때에 채택한 것이다(2,12. 그리고 1열왕 8,65; 2역대 7 참조). 그러면서 이 기슬레우 달의 봉헌식에 특별한 강조점을 덧붙이고 또 그동안 잊혀져 왔던 옛 전통과 연결짓기 위하여, 저자는 봉헌식이 거룩한 불로 거행되기를 바란다. 그는 자기의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여 느헤미야와 예레미야의 외경 문헌에 나오는 이 두 예언자들의 기록, 곧 이른바 제2성전의 제단 봉헌식 때에 느헤미야가 보인 본보기와(2마카 2,13과 1,18-36), 유배자들에게 거룩한 불을 가져가라고 한 예레미야의 예를 듦으로써(2,1), 거룩한 불의 이용을 정당화한다.
7. 일곱 형제의 순교와 그들에 대한 공경
이 이야기의 비장한 문체는 일곱 형제에 대한 야손과 요약자의 감동에 찬 관심을 드러낸다. 이 가정의 고난은 역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다(1마카 1,62-63 참조).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마카베오 하권에 자리잡기 이전에, 일곱이라는 상징적 수라든가, 임금이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라든가, 형벌의 잔혹성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설화의 특징적 표지와 더불어 이미 하나의 민간 전승이 되어 있었다. 저자는 순교의 장소와 일곱 형제의 이름에 관하여 어떠한 구체적 단서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와 요세푸스도 침묵을 지킨다. 마카베오 하권을 바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형벌의 장소가 유다 땅에 있었으리라는 것이 전부이다(2마카 6,8-11 참조). 하권보다 한 세기 반이 지난 다음에 나온 제4마카베오서의 저자도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유다인들을 박해하기로 임금이 결정을 내린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4마카 4,23; 5,1; 8,1 참조). 이와는 달리 이른바 ‘안티오키아 전승’은 순교 장소를 유다로 보는 전통에 반대하여, ‘일곱 형제와 엘르아잘의 전설’과 함께 오랫동안 전해 온 안티오키아를 그들의 순교지로 내세운다. 안티오키아가 순교지라는 가설은 마카베오서 자체에서 추론해 낸 것이다. 유다 땅에서 박해가 벌어질 때에 에피파네스 임금이 안티오키아에 있었기 때문에, 일곱 형제를 처형하기 위하여 안티오키아로 이송하였으리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안티오키아 전승은 기원후 390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바로 안티오키아에서 이 일곱 순교자들에 관하여 설교하면서, 이 도시 부근의 성소에 보전된 그들의 유해를 언급한 것이다. 이보다 조금 뒤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어떤 설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세운 …… 마카베오 성인들의 대성당”을 상기시킨다. 기원후 6세기 어떤 연대기의 저자인 안티오키아의 요한네스 말랄라스는 야손이 주도한 유다인들의 봉기와 안티오쿠스 4세의 진압을 이야기한 다음(2마카 5,5-10), 안티오쿠스가 엘르아잘과 마카베오 집안 사람들을 안티오키아에 끌고 가, 그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처형하였다고 덧붙인다. 말랄라스는 자기의 연대기 조금 뒤쪽에서, 유다라는 이가 데메드리오 임금의 허락을 받고 마카베오 집안 사람들의 시신을 가져다가 안티오키아의 케라테온이라는 곳에 장사지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10세기 안티오키아의 한 아랍인 안내자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언급한 대성당, 곧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이 옛 유다교 회당을 개조하여 만든 대성당이 실피우스 산 비탈, 그 지하 경당에는 에스라와(= 엘르아잘)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무덤이 들어 있는 곳에 지어졌다고 말한다.
이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은 안티오키아에서 서방으로 전해졌다. 이미 4세기부터 갈리아에서는 「마카베오 성인들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제4마카베오서의 라틴 말 의역본(意譯本)이 나와 널리 유포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밀라노와 쾰른으로 옮겨지고, 로마와 리옹과 빈에는 그들의 기념 성당들이 들어섰으며, 축일은 8월 1일로 정해졌다.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생기기 전의 그리스도인으로 여겼던 교부들은 이들에 관하여 많은 설교를 하였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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