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요엘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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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3,851 | 추천수0 | |
파일첨부 요엘입문.hwp [673] | ||||
요엘 입문
1. 자연 재앙과 예언자 요엘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지만, 아프리카 같은 데에서는 ‘메뚜기 재앙’이 종종 일어난다. 가끔 크게 번식한 메뚜기 떼가 하늘을 까맣게 덮을 정도로 큰 무리를 지어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지상에 있는 식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 없애 버리는 것이다(탈출 10,1-20 참조). 성서의 땅에서도 금세기 초까지 이러한 재난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곤 하였다.
언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땅에 유례 없는 메뚜기 재앙이 벌어진다. 사태를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 것은, 그 때에 이미 기근으로 땅이 황폐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식물마저 모조리 메뚜기 떼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생존이 온전히 땅에 매일 수밖에 없던 옛날에, 이러한 사태는 사람은 물론 짐승들에게조차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재앙의 때에, 요엘 예언자가 탄원 기도를 올리며 참회 예절을 거행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다. 우리는 이 예언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와 그의 아버지 이름만 확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1,1). “요엘”이라는 이름은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요”는 ‘야훼’의 준말이고, “엘”은 ‘하느님’을 뜻한다. 그래서 요엘은 ‘주님은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이 이름은 역대기 같은 데에 드물지 않게 나온다.
요엘서 전체를 볼 때, 그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활동 시기를 알아 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이 예언서의 주요 배경이 자연 재앙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난의 서술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9세기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원전 3세기로 잡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4,1-3은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유다 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함락을 오래 전의 일로 전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그리스인들까지 나오는 4,4-8은 일반적으로 후대에 보태진 첨가문으로 판단한다). 곧 요엘 예언자의 시기를 유배 이후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임금과 왕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 반면, 원로들과 사제들이 나라를 이끈다는 사실(1,2.13-14; 2,16-17 참조), 성전과 종교 의식의 거행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기원전 5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전제된다는 점, 그리고 이 책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다른 예언서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기원전 400년 전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진다. 이 때는 정치적 안정 속에 예루살렘 성전이 유일한 성소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제사가 어려움 없이 바쳐지고 있었다.
2. 메뚜기 재앙
요엘 시대에 일어난 메뚜기 재앙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재난이었다: “이러한 일이 너희 시대에 있었느냐? / 이러한 일이 너희 조상 시대에 있었느냐?”(1,2). 가뭄으로 “흙덩이 밑에서는 씨앗들이 오그라들었고”, 곳간은 빈 지 오래이다(1,17). 거기에다 이제 메뚜기 떼가 모여들었다.
“풀무치가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먹어 버렸다“(1,4).
땅의 파란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메뚜기 떼의 그 게걸스러운 식욕은, 마치 그들의 이가 사자의 이빨 같다는 강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남겼다. 그렇지 않고는, 그처럼 포도원을 짓밟고, 무화과 동산을 찍어내 버린 듯이 나무 껍질까지 하얗게 벗겨 버릴 수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1,6-7). 나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다른 곡식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밀과 보리를 생각하며 농부들아, 질겁하여라. 포도나무를 가꾸는 자들아, 울부짖어라. 들의 수확이 결딴났다“(1,11).
이 이중의 재앙 속에서, 가축들도 먹을 것이 없어 ‘타 버린 들판에서’ 울부짖다 죽어 간다(1,18-20). 이런 불행의 정점은 하느님께 바칠 제물까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처녀가 젊고 건강한 약혼자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1,8-9.13). 사는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제사를 드리는 기쁨이 없어져 버렸다(1,12.16). 죽어 버린 자연과 함께 삶의 끝이며 세상의 종말과 같은 상황이다.
이 때 요엘 예언자가 금식과 참회를 외치며 등장한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신의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뒤로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2,13-14)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슬픔이나 재난을 당하였을 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뿌리고 금식하였다. 그런데 이 의식은 자칫 외형적인 것으로 흐를 수 있다. 예언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2,16), ‘진심으로 뉘우쳐 금식하며 가슴을 치고 우는’ 참회(2,12), 금식과 참회가 하나인 탄원의 기도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바치라고 촉구한다. 그러한 속마음을 보시고 하느님도 ‘마음’을 움직이시어, 이 재난을 멈추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신다(2,18). 그리고 기적적으로 죽음과 불행의 땅에 생명과 기쁨을 내려 주신다. 이제 사람과 땅과 짐승이 모두 즐거워하며 되찾은 생명을 구가하게 된다(2,21-24).
3. “주님의 날”
그런데 요엘은 하느님의 백성을 멸망의 문턱까지 몰고 간 이 재앙이, 한 번으로 그냥 끝나 버린 사건이 아니라고 외친다. 이 재난은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건, 이스라엘인들이 늘 생각하면서 두려움 속에 기다리는 사건,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킨다(1,15 참조). 이것은 아모스서와 이사야서를 거쳐, 스바니야서와 에제 30장, 그리고 오바디야서와 말라 3장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예언자가 오래 전부터 예고해 온 날이다. 그래서 요엘이 이 날을 거론할 때, 청중들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종말의 날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는 날,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 날이다. 그래서 단순한 끝 날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기근이나 메뚜기 재앙이 아니라, 바로 이 “주님의 날”이 요엘 예언자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예언서의 명확하면서 독특한 구조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요엘서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1,2-2,17과 2,18-4,21이다. 첫째 부분에서 예언자는 금식하고 참회하며 탄원 기도를 올리라고 촉구한다. 그 배경은 1장에서는 이미 닥친 기근과 메뚜기 재앙이고, 2,1-11에서는 이제 막 시작하는 “주님의 날”이다. 그런데 요엘서의 관심사인 “주님의 날”은 이미 1장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1,15). 그리고 메뚜기 떼를 “주님의 날”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게 될 “셀 수 없이 많고 힘센 족속”으로 표현하기도 한다(1,6).
첫째 부분에서 둘째 부분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은 2,12-17이다. 12-14절에서는 가뭄과 메뚜기 재앙, 그리고 15-17절에서는 “주님의 날”과 관련된 참회 예절을 말한다. 이 참회 예절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 둘째 부분에 나온다. 2,18-27은 참회 예절에 대한 첫째 응답이고(그러면서도 19ㄴ-20절은 “주님의 날”과 관련된다.), 4,1-3.9-17은 참회 예절에 대한 둘째 응답이다. 이렇게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과 관련해서 계속 둘씩 대칭을 이루면서 배열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과 관련된 말들도 비슷하게 표현된다. 예컨대 참회 예절의 모임을 소집하는 1,14와 2,15,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개입이 지향하는 백성의 참다운 앎도 서로 거의 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진다(2,27과 4,17).
이렇게 볼 때, 메뚜기 재앙과 “주님의 날”이라는 두 주제가 병행을 이루면서 전개되지만, 중요하고 유일한 관심사는 “주님의 날”임이 분명해진다. 사실 요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고통 중에 겪어야 했던 재앙을, 예전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종말의 날이 시작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로써 요엘이 선포하는 메시지에는 “주님의 날”과 관련해서 두 가지 새로운 점이 첨가된다. 첫째는, 이 날이 단순히 미래의 어느 날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날”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둘째는, 이 종말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멸망과 함께(특히 2,3.11 참조)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3-4장). “주님의 날”은 이렇게 이중의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주님의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느님의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율법이나 경신례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보장받지 못한다. 이는 특히 요엘서의 분기점을 이루는 2,12-17에서 잘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찢는 참회’를 해야,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준비를 순전히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사람”에게, 곧 아들과 딸, 늙은이와 젊은이,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 없이, 모든 이에게 당신의 영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예언자가 된다. 저마다 예언자처럼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그분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3,1-2).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을 참된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3,5).
요엘이 선포한 “주님의 날”은 아직도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참회, 그리고 이 날이 지닌 현재성은 지금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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