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고린토(코린토) 2서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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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5,911 | 추천수0 | |
파일첨부 고린토2서입문.hwp [885] | ||||
고린토 2서 입문
고린토 2서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 가운데에서 가장 논쟁적인 편지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자기가 없는 틈을 타서 고린토 교회에 들어간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또 신자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쓴다. 이러한 면에서, 예컨대 교리를 차분히 체계적으로 설명해 가는 로마서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사도는 매우 생생하고 열정 가득한 문체로, 적대자들에게 자기의 사도직을 옹호하고 또 자기가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속한 사람임을 밝힌다. 또 사랑이 넘치는 말과 가차없이 꾸짖는 말, 분노에 찬 말과 애정이 넘치는 말 등 여러 가지 말투를 능숙하게 뒤섞어 신자들을 효과적으로 권면한다.
이 고린토 2서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2세기에 쓴 여러 문헌에서 인용된다. 이로써 이 서신이 처음부터 바오로 사도의 서간집에 수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이 둘째 서신은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래서 4세기의 그리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모, 중세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데 아퀴노, 문예 부흥 운동의 선각자라고 불리는 15-16세기의 에라스무스, 16세기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칼뱅(칼빈) 등 유명한 인물들이 이 서간의 주석서를 남겼다.
1. 바오로 문체의 표본
로마서는 일종의 신학 논술과 같고, 고린토 1서는 고린토 신자들이 제기한 질의에 대답하는 응답서와 같다. 이러한 서간들과 달리 고린토 2서는 사도의 개인적인 문체라든가 그 표현의 힘을 잘 보여 준다. 사도는 여기에서 낱말이나 생각을 연이어 대립시켜 간다(1,5.17-22.24-2,1.16; 3,3.6.9.13; 4,10-11.18; 5,15.17; 8, 9; 9,5; 12,6-10). 그 가운데에는 후대에 유명하게 된 표현들도 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라든가(3,6), “그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8,9) 등이 그 예이다. 바오로는 또 때로 재미있는 말과 생기 넘치는 말을 능숙히 섞어 가면서, 고린토 신도들의 나약함을 논박하기도 하고 단호히 단죄하기도 한다. 그가 문학적으로도 재능이 얼마나 큰지는, 예컨대 걸작이라고 불리는 이 서간의 8장과 9장을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적대자들이 깎아 내리는 것처럼 바오로는 말재주가 없었던 것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솜씨는 적대자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글솜씨가 잘 드러나는 고린토 2서는 표현 양식의 다양성에서 가끔 다른 모든 서간을 뛰어넘는다(예컨대 4,7-10.16-17; 6,3-10 참조).
2. 수신인
고린토 2서의 수신인은 1서와 같다. 고린토 1서 입문에서 이 공동체에 관하여 말한 것이 2서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린토 1서 입문 135-136쪽 참조). 그러나 집필 동기는 1서와 다르다(고린토 1서 입문 137-139쪽 참조). 1서는 근본적으로 고린토 신자들이 질문을 해 온 것에 대답하는 편지이기 때문에, 이 신자들의 성격이라든가 영적 상태 같은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이 2서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명백해진다.
여기에서, 고린토 신자들이 바오로의 사도직에 반대하고 나서는 행위가 그들의 근본 성향에서 나오는 것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문제는 아래(4)에서 다루도록 한다. 아무튼 바오로 사도를 대적하는 자들은 여러 부류였던 것 같다. 사실 이 서신을 받는 고린토 신자들과 사도 자신도 서로의 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음을 안다. 고린토 신도들의 시기와 질투, 언쟁, 심지어 믿음을 버리려는 경향까지 이 서간 곳곳에 나타난다. 사도는 이미 1고린 16장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 다시 이 2서의 8장과 9장에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해서도, 고린토 신자들의 온정이 사실은 말로 그칠 뿐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 전체의 모금을 시작하고 조직하여 다른 교회의 신도들까지 참여시키면서도 자기들은 뒷짐만 쥐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사실 바오로 훨씬 이전부터, 그리스인들은 남이 말하는 것을 그저 듣기만 하고 또 (자기들이 즐겨 구경하는 운동 경기에서처럼) 남이 열심히 뛰는 것을 그저 보기만 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3. 사도의 적대자
고린토 2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오로 사도의 적대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이들도 고린토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서간의 수신인인지, 그래서 이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것이 고린토의 신자들뿐인지, 이들이 서로 같은 성격을 지닌 집단인지, 아니면 다양한 집단으로서 이들의 공통점은 바오로에 반대한다는 사실뿐인지, 그리고 이들이 사도가 고린토 1서에서 신도들의 질의에 응답하면서 언급하는 자들과 같은 사람인지 등이 문제가 된다. 고린토 2서 전체를 살펴 볼 때, 이와 같은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고린토 교회의 어떤 신자가 사도에게 심한 모욕이 되는 말을 한다. 이러한 모욕을 바오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신자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어쩌면 공동체 전체가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한 자는 고린토의 이른바 ‘영지주의자’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이들은 구원이 어디까지나 깨달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을 위하여 자기의 삶이나 존재 전체를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자는 바로 불륜을 저질렀다가 1고린 5,1-13에서 단죄받은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사람을 “그 더러운 짓과 불륜과 방탕을 회개하지 않는”(12,21) 오랜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바오로가 이미 고린토 1서에서 논박한 영지주의적 경향을 여기에서도 다시 보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을 전파하며(4,5), 이미 지금부터 미래의 구원을 확보해 놓았다고 믿는다(5,10-13).
2고린 10-13장을 읽어 보면 또 다른 적대 집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유다인들의 사고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다계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계속 유다교를 신봉하는 유다인인지 가려 내기가 어렵다. 11,21-23에서 사도는 자기도 이들처럼 “히브리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는 이들 역시 고린토 교회에 소속된 신자들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도는 자신만만하게 처신하는 이들이 사실은 거짓된 자들,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가짜 사도들이라고 단정한다(11,13).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에서, 비(非)유다인들은 유다교의 규정 가운데에서 최소한의 것만 지켜도 좋다고 결정하였다(사도 15장; 갈라 2장). 그런데 이들은 그 결정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지, 다른 민족과 다른 종교 출신자들도 유다교의 모든 규정과 관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바오로가 이 고린토 2서에서 그토록 질타하는 자들은, 그가 존경하는 베드로가 보낸 이들일 수 없다.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이들일 수도 없다. 그보다는 열혈당의 경향을 지닌 유다인일 가능성이 크다(사도 21,20-36 참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당에 소속되는 것 자체를 막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 당에 속한 채로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이다. 바오로는 바로 이들에게 새 계약이 옛 계약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우월함을 보여 준다(3,1-8).
4. 집필 동기와 연대
고린토 2서의 집필 동기와 발송 연대를 살펴보기 전에, 1고린 5,9뿐만 아니라 2고린 2,3과 7,8에도 지금은 따로 전해지지 않는 서신이 언급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 서신들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인가? 아니면, 일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들도 현재의 신약성서 서간들 안에 들어 있는 것인가?
질문은 또 계속된다. 고린토 2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간 한 통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10장에서 13장까지는 잃어버렸다는 서신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사실 고린토 2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7장; 8-9장; 10-13장), 그 가운데 마지막 부분이 하나의 독립된 단락처럼 되어 있다. 이 단락에서 바오로는 자기의 사도직을 아주 강력히 옹호한다. 그래서 이 2고린 10-13장이 2고린 2,4-9와 7,8-12에 언급된 대로, 고린토 신자들을 슬프게 한 바오로의 이른바 ‘눈물의 서간’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에 적어도 네 통의 서간을 보냈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이다.
이 네 통의 서신을 A, B, C, D라고 부르기로 한다. 1고린 5,9에 언급되는 A는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B는 신약성서에 수록된 고린토 1서이다. 2고린 10-13장을 ‘눈물의 서간’ 일부 또는 전부로 간주하지 않을 경우, 셋째 편지 C도 유실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마지막 D는 2고린 1-13장 또는 (10-13장을 C로 여길 경우) 2고린 1-9장이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에 잠깐 머무르면서, 57년이나 58년 초봄에 로마서를 집필한다. 이는 바오로와 고린토 교회의 서신 왕래가 모두 이 시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우선 바오로가 로마서라는 방대한 서간을 집필하는 데에 걸린 시일, 그가 고린토에 세 번째로 보낸 서간이 그 곳에 도착하여 원하던 결과가 나타나는 데에 걸린 기간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러면 고린토에 보낸 마지막 서간 D는 로마서가 집필되기 적어도 4-5개월 전에, 트로아스나 마케도니아에서 발송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뒤, 56년(또는, 57년) 말에 바오로는 고린토로 직접 가게 된다.
바오로는 50년에서 52년까지 적어도 열여덟 달 동안 고린토에서 지내다가, 52년 여름에 그 곳을 떠난다. 그리고 일년 뒤 53년에 에페소로 간다. 에페소에 도착하고 나서, 그는 몇 주나 몇 달 뒤에 고린토 교회의 걱정스러운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 때가 54년일 것이다. 그래서 이 54년과 56(57)년 말 사이에 바오로와 고린토 교회의 편지 왕래가 여러 차례 이루어진 것이다.
고린토 교회와 관련된 일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 머무를 때, 고린토 교회에 심각한 혼란 상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1고린 5,9에 언급되지만 유실된) 첫째 서간 A를 써 보내면서, 고린토 신자들에게 행실이 난잡한 자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서간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얼마 뒤에 디모테오를 급히 보내어(1고린 4,17) 그들에게 자기의 가르침과 교리를 상기시킨다.
이 때에 고린토 신도들이 몇 가지 질문을 적어 사도에게 보낸다(1고린 7,1). 그래서 그는 그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고린토 1서(B)를 보낸다. 이 때가 어느 해인지 정확하지 않아 학자들은 52-57년 사이의 한 해를 제시하는데, 55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 뒤에 디도가 에페소를 떠나 고린토로 간다. 바오로가 1고린 16,1-4에서 제안한 모금을 실시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고린토에 도착한 디도는 그 곳의 상황이 매우 실망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오로가 서간 A와 B를 보내고 또 디모테오를 파견하였지만, 기대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고린토를 직접 찾아간다. 이것이 교회를 설립한 첫 번째 방문에 이은 두 번째 고린토 방문이다(12,14와 13,1 참조). 이 방문 결정은 갑자기 내려졌음에 틀림없다. 2,1에 따르면, 바오로는 본디 고린토 방문을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바오로가 고린토로 가자 심각한 충돌이 빚어져, 그는 급히 에페소로 떠나간다. 에페소로 돌아간 바오로는 2,3-4가 말하는 대로 세 번째 서간 C, 곧 눈물을 흘리며 고린토 신자들을 통렬히 꾸짖는 서간을 쓴다.
바오로는 이 실패를 극복하려고, 교섭과 협상에 능숙한 디도를 고린토로 보내어 그 곳 신자들과 접촉하게 한다. 디도 자신이 이 셋째 서신을 가지고 갔는지, 아니면 디도가 출발한 바로 뒤에 이 서신을 써 보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오로는 고린토 신도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자기의 서간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또 디도가 자기 직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 매우 궁금해 한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에페소를 떠나야만 한다. 바오로는 트로아스로 갔다가 마케도니아로 이동하는데, 디도가 마침내 그 곳으로 가서 좋은 소식을 전한다(7,13).
이 소식에 위안을 받은 바오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의 사도직을 옹호하는 서간을 쓰면서, 모금을 위한 호소도 덧붙인다(이 호소가 8장과 9장에 나오는데, 9장은 8장과는 독립된 글로 여겨진다). 이것이 고린토 2서이다(D). 디도는 다시 고린토로 가서 바오로의 방문을 준비한다. 얼마 되지 않아 바오로가 고린토에 도착하는데, 때는 56(57)년 말이다. 이 셋째 방문 중에 바오로는 더 이상 이런 일 저런 일로 산만해지는 일 없이 아주 명료한 정신으로 로마서를 집필한다.
5. 구성
이미 말한 대로 고린토 2서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1,1-7,16 : 바오로와 고린토 공동체의 관계. 아시아에서 죽음의 위험에까지 빠졌던 바오로는(1,8) 이미 예고한 고린토 방문을 미룬다. 별다른 이유 없이 차일피일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토 신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조건이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것이다(1,12-2,13). 2,14에서 7,4까지, 바오로는 사도직의 위대함을 상기시킨다. 먼저 새 계약의 이 직무가 옛 계약의 직무보다 우월함을 강조한다(2,14-4,6). 이어서 이 직무가 가져오는 여러 가지 곤경,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4,7-5,10). 이 직무를 수행하는 이는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사절”이며 세상과 화해를 이루는 사람이다(5,11-21).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오히려 바오로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마음을 열도록 자극을 준다(6,1-7,4). 7,4에서 7,16까지,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의 위기가 잘 풀렸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디도가 자기에게 돌아왔음을 상기한다.
(2) 8장과 9장 :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과 관련된 두 가지 지시.
(3) 10장에서 13장까지는 하나의 긴 단락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바오로는 열정적이고 때로는 신랄하면서도 항상 진리와 신앙을 추구하는 열의로 가득한 문체를 사용하면서, 자기 사도직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변론을 펼친다. 예컨대 11,22-31과 12,1-10만 읽어 보아도, 이 사도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복음의 힘을 깊이 느낄 수 있게 된다.
6. 고린토 2서의 신학
여기에서는 바오로의 사도직, 새 계약과 옛 계약, 교회의 일치, 그리고 현실성이라는 네 가지 주제만 살펴보기로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고린토 2서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과 늘 활동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직결시키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설명과 삶에 대한 숙고가 따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 서간에서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께서 지금도 펼치시는 활동을, 당시 고린토 교회 신자들의 삶, 특히 사도의 삶과 밀접히 일치시키는 강력한 움직임, 깊은 역동성을 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성령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활동이 자주 결합된다(1,21; 3,18). 때로는 1,21-22에서처럼 하느님의 활동까지 더해진다. 그래서 3,3과 13,13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느님께서는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계신다. 이러한 구절에 나오는 표현들은 장차 교회에서 ‘삼위일체’라고 부르게 되는 진리의 윤곽을 잡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윤곽이 여기에서는 세 분의 다양성과 함께 세 분께서 하시는 행동의 일치성을 강조하는 데에서만 드러난다.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과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분이시면서도 똑같이 신자들과 교회의 삶 속으로 개입하시어 구원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이 특별히 관심을 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부각시킨다. 자주 되풀이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는 현재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표현은 죽음과 부활 너머에서 더욱 밀접히 이루어지게 되는 미래의 일치를 확인해 준다.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풍부한 내용으로 표현해 내는 방식을 찾아 낸다. 4,4에 나오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라는 말이 그것이다. 사도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특이성을 밝혀 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아담처럼 참 인간이시다. 그분께서는 동시에 이 세상에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시다. 곧 하느님의 모상이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 효과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이, 사도와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고린토 2서는 ‘사도직 서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개선식에 함께 행진하면서, 그분을 알리는 “향기” 곧 생명의 향기를 곳곳에 퍼뜨린다(2,14-17). 이렇게 하여 바오로 자신도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도 지고 감으로써 바오로의 몸에서도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된다. 그가 사도로서 전파하는 메시지는 하나의 살아 있는 서간 곧 고린토 공동체이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토 신자들에게 “우리의 추천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라고 선포한다(3,2). 바오로는 또 자기가 수행하는 직무의 위대함과 나약함을 정확히 드러내는 표현을 구사한다. 곧 자기의 직무는 보물을 질그릇에 담아 나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4,7). 또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어투로 6,4-10에 나열하는 내용은, 그가 수행하는 사도직의 위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 준다. 사도가 그리스도를 섬겨 온 지금까지의 삶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의 인간적 성격도 여실히 드러난다(11,22-31). 이로써 우리는 또한 그가 개인적으로 무릅써야 했던 위험과 고통과 곤궁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바오로라는 인간은 주님께서,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라고 말씀하신 사람이다(12,9). 그는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절”이다(5,20). 그는 또 자기가 화해의 직무를 부여받았다고 여긴다(5,18). 그가 새 계약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고(3,6) 또 그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도 받았기 때문이다.
(2) 옛 계약과 새 계약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신자들이 자기의 직무 수행에 맡겨진 ‘그리스도의 서간’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가운데,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고한 새 계약이(예레 31,31-33) 실현되었다고 여긴다. 이 새 계약은 단순히 옛 계약을 보충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계약을 새겨 넣으시는 분이나 새겨 넣는 일은 같다 하여도, 이제는 돌로 된 판에서 살로 된 판으로, 또 책에서 마음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 계약은 이스라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바오로는 이 계약이 어떻게 해서 참으로 새 계약이 되는지를 보여 주려고, 예전에 모세와 함께 맺은 계약과 새 계약을 매우 인상적으로 비교해 낸다.
바오로가 처음으로 모세의 계약을 “옛 계약(= 구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성서에도 똑같이 “옛 계약” 또는 “구약”이라는 명칭을 붙인다(3,14; 라틴 말을 비롯한 서양의 언어들도 바오로의 이 어법을 그대로 이어받는데, 한자권에서만은 “옛 계약” 곧 “구약”에다 “성서”라는 낱말을 덧붙인다). 새 계약의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작용하신다. 성령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새 계약은 옛 계약처럼 더 이상 문자로 굳어질 수 없다(3,6). 성령께서 계속 생명을 불어넣으시기 때문이다(3,6).
(3) 교회는 하나
55년경,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뒤 대략 한 세대가 지났을 때, 지역 교회마다 자기의 특수성만 강조하는 바람에 모든 교회의 일치가 깨질 위험이 커진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메시아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이사 60-62장 참조). 그래서 그는 더러 ‘공동 모금’이라고도 불리는 것을 제안한다. 이 모금이 선교로 태어난 모든 교회와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의 ‘모교회(母敎會)’를 하나로 묶어 주는 연대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고린토 신자들은 이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이 처음으로 이 모금을 다른 교회들에도 확대시키는 조직을 제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선행에 동참하라고 제안하기는 쉬워도, 자기들이 직접 실천하기는 어렵다. 고린토 신도들은 모금을 미룬다(9,4). 서로 돕는 것이 바오로 사도에게는 깊은 일치의 표지가 된다.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는 다른 곳에 있는 교회와 똑같다. 모금은 지역 교회들이 다르면서도 하나임을 드러내고, 유다인들과 비유다인들로 이루어진 새 백성의 일치를 부각시켜야 한다.
(4) 현실성
현대인들은 정확한 정보와 전기적인 자료를 좋아한다. 고린토 2서는 이러한 기대에 부합하여 바오로 사도의 생애에 관해서 많은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 서간은 심리분석학자, 성서 주석가, 신학자, 역사가, 그리고 모든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서간은 교회 초창기에 새롭고 어려운 여러 문제에 봉착한 한 인간, 한 사목자, 그리고 한 사도를 생생히 보여 준다. 이러한 면에서, 고린토 2서는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충실성을 찾는 여러 교회에 문제 해결의 단서와 초안을 제공할 수 있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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