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골로사이서(콜로새서)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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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5,003 | 추천수1 | |
파일첨부 골로사이서입문.hwp [976] | ||||
골로사이서 입문
1. 내용
단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어서 분량은 적지만 신학적 설명의 내용은 광대한 골로사이서는 전통적으로 에페소서, 필립비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으로 분류된다. 바오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골로사이 신자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골로사이서는 여느 서간의 도입부와 다름없는 형식으로 시작된다(1,1-20). 먼저 인사, 복음 전파에 대한 감사의 말(1,3-8), 신도들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1,9-14). 여기에 그리스도를 우주의 머리로 기리는 찬미가가 이어지는데, 이 노래가 서간 전체의 어조를 결정짓는다(1,15-20). 1,21-23에서는 서간의 필자가 수신인들에게 복음에 따라 살아가도록 권고를 하고 나서, 자기가 수행하는 사도직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이 사도직은 직전의 찬미가가 노래하는 바를 실현시키는 사명을 지닌다. 곧 바오로 사도는 이민족들 사이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고난을 완성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1,24-2,5).
2,6-3,4에는 경고가 나오는데, 이것이 골로사이서를 써 보내는 동기이기도 하다. 필자는 골로사이에 나타난 ‘이단’ 설교가들이 전파하는 교리와 그에 따른 준수 사항이 가져오는 위험을 경고한다. 이 논쟁적인 단락 한가운데에,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들을 쳐부수신 승리를 다시 기리는 말이 나온다. 신자들이 세례로 동참하게 되는 이 승리는(2,6-15), 다시 종살이로 몰고 가려는 모든 시도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의 바탕이 된다(2,16-3,4).
이제 3,5-4,6에서는 훈계가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도 세례가 훈계의 바탕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옷처럼 입은 사람이다. 새 인간의 새 삶은 공동체 안에서 실생활과 전례를 통하여 실현된다(3,5-17).
그 다음에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가지 권고가 나온다. 이는 “주님 안에” 통합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통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얻는 가정 생활과 사회 생활에 관한 전통적인 ‘지침표’이다(3,18-4,1). 이 서간은 이어서 조심하고 기도하라는 권고(4,2-4), 신자가 아닌 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지시(4,5-6),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긴 명단과 개인적인 소식을 말하고 나서(4,7-17), 사도가 손수 적은 인사로 끝을 맺는다(4,18).
2. 골로사이 교회의 위기
1) 서간 자체의 자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4,3.10.18) 이 서간을 써서 골로사이 신자들에게 보낸다(1,2). 사도 자신이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20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이 고을에 직접 간 적은 한 번도 없다(1,4; 2,1). 바오로가 에페소에 상당 기간 머무르는 동안(사도 19장), 그의 제자 에바프라가 자기의 고향 골로사이(4,12), 그리고 인근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이아에 공동체를 세운다(1,7; 4,13). 라오디게이아는 묵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데(묵시 1,11; 3,14), 더러 이 교회가 에페소서의 수신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골로 4,16과 에페소서 입문 69-70쪽 참조). 골로사이서에 따르면, 바오로는 자기와 함께 감옥에서 지내려고 온 에바프라 편에 골로사이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디키고와 오네시모를 그 곳으로 보낸다. 아마도 디키고가 이 서간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4,7-9. 그리고 에페 6,21 참조). 바오로는 비록 그 곳의 교회 공동체들을 직접 세우지는 않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까닭에 자기가 직접 가서 개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자기의 대변인으로 보내어, 시련을 겪고 있는 그 곳 신도들을 돕게 한 것이다.
2) 신학적 · 영적 논쟁
바오로는 신자들 자신이 야기하는 난관도 많이 거쳐 왔다. 그러나 과거에 고린토나 갈라디아에서 일어난 것과는 달리, 바오로와 경쟁을 벌인다거나 아예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인 문제가 골로사이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곳에서는 이단적인 사상이 문제인데, 지금까지 많이 연구해 왔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주로 골로사이서 자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가끔 명확하지 않은 암시에 그치고 또 어떤 전문 용어들은 아직도 불분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어떤 말들은 이단을 퍼뜨리는 새로운 설교가들이 한 것인지, 사도의 판단을 표현하는 것인지 가려 내기도 쉽지 않다(2,18.21.23 등). 아무튼 이 사람들의 근본 경향은 어떤 면에서 사도가 선포하는 복음을 넘어서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신들의 세계에 대한 갖가지 상상, 금욕주의, 계율 중시 등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완해 주고, 신도들에게 신비에 대한 더욱 고차원적인 지식을 가져다 주며, 그들의 희망에 더 잘 부합하는 신앙 생활에 대하여 더욱 높은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른바 유다교를 고집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복음’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볼 수가 있다. 이는 바로 바오로가 갈라디아에서 싸워야 했던 그릇된 ‘복음’이다. 그러나 이 이른바 유다교주의자들의 복음은 여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취할 뿐만 아니라, 밀의(密儀) 종교의 색채까지 띤다. 이들은 또한 2세기에 가서 영지주의(靈智主義)라는 확고한 체계를 갖추게 되는 사상으로 흘러가는 경향도 보인다. 아울러 새로운 어휘들도 등장하는데, 이는 가장 후대의 신약성서 문헌들과 신약성서 외의 문헌들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3. 서간의 성격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는 골로사이서는 그 이전에 바오로가 쓴 서간들과 비교해 보면 독창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 이 골로사이서에서는 문체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나중에 쓰인 에페소서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곧 동의어의 반복, 여러 보어(補語)의 배열, 전례적 어투(1,3-8.9-20),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부정확한 문장(2,18-19.20-23), 삽입구, 그리고 관계문과 분사 구문의 애용 등이다.
나. 어휘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루어진다. 바오로가 전에 사용하던 용어들이 채택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굳어진다. 예컨대 머리, 몸, 권세와 권력의 천신, 세상의 정령, 신비, 하느님의 구원 계획, 충만함, 풍부함, 지혜, 지식, 깨달음 등이 그러하다(여기에서 지혜 문학의 강한 영향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데에는 주로 “성도”라는 용어가 쓰인다.
다. 이 서간의 사상 자체 역시 때로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전망을 알리는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강조와 변화가 두드러진다.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좌정하신 사실은 이제 전 우주적 차원으로 빛을 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천상 세력들의 으뜸으로, 또 교회의 머리로 기려진다.
- 교회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1고린 12장에서는 몸이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표현하는데, 여기에서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리고 이 교회(= 몸)는 고린토 1서에서보다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 머리)와 구분된다.
- (높은 곳, 낮은 곳과 같은) 장소적 범주가 이제는 시간적이나 종말론적인 범주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더 이상 시간적으로 우리 앞에 있는 실체, 곧 우리에게 다가오는 실체가 아니다(마르 1,15 참조).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으로서 우리 위에 자리잡은 실체이다(1,13; 3,1-4).
- 이러한 변환의 여파로 세례성사 신학도 현저한 변화를 겪게 된다. 바오로는 로마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이루는 일치는 과거로,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은 미래로 표현한다. 그런데 골로사이서는 세례를 받은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분과 함께 부활하였다고 확언한다(2,12와 각주; 3,1 참조).
- 바오로가 성령의 활동과 연계지었던 법적 개념들 대신에 “충만함”이라는 개념, 지혜와 영감이라는 주제들이 들어선다. 복음은 이제 “신비”로 간주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사항들은 에페소서에도 모두 나타난다.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가 문체와 사상에서 비슷하다는 사실은 또 그 나름대로 특수한 문제가 된다(에페소서 입문 69-72쪽 참조).
4. 친저성(親著性)
골로사이서를 바오로가 썼느냐 아니냐 하는 친저성과 관련된 주요 요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바로 전에 요약한 문학적, 신학적 기준이다. 이 기준에 어떠한 중요성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바오로의 다른 서간들과 대조할 때에 드러나는 유사성과 상이성 가운데 어느 것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이 서간의 필자가 달라진다. 곧 말년의 바오로가 될 수도 있고, 그의 비서나 직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바오로 학파’라고 불리는 훨씬 후대의 바오로 제자단이 이 서간의 필자가 될 수도 있다.
둘째, 골로사이서와 다른 서간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성격이 복합적이다. 골로사이서가 서로 상당히 다른 시대에 집필된 서간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세상의 정령” 같은 주제라든가 어떤 어법들과 관련해서는, 이 서간이 갈라디아서와 가깝다(갈라 4,1-11과 골로 2,6-23 참조). 또 한편으로 감옥이라는 같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면에서 골로사이서는 필레몬서, 그리고 에페소서와 한 가지로 분류된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가(에페 3,1; 4,1; 6,20; 필레 9.10. 13.23) 디키고와 오네시모에게 비슷한 사명을 맡긴다(에페 6,21-22; 필레 12). 다른 한편, 골로사이서는 같은 옥중 서간인 필립비서와 관련이 없다. 그러나 친저성과 관련하여 이러한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떤 서간이 그 이전에 쓰인 다른 서간의 본을 따라 작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셋째, 골로사이에서 벌어지는 위기의 구체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도 정확한 연대를 잡기가 쉽지 않다. 교리와 그 실천 사항에 관한 이 서간의 말이 우리에게는 분명하지 않아, 골로사이에서 정확히 언제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는지 단언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 교리가, 나중에 영지주의로 발전하게 되는 이설(異說)에 얼마 동안이나 감염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면서, 지금까지 크게 세 가지 해결 방식이 제기되었다.
(1)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골로사이서는 필레몬서와 에페소서, 그리고 필립비서와 함께 바오로가 사도직을 수행하는 마지막 시기에 쓴 서간이다. 곧 그가 로마에서 이른바 첫 번째 수인 생활을 하던 때이다(61-63년). 이 때에 사도는 자기의 신학을 종합하는데, 먼저 골로사이서에서 초안을 잡고 에페소서에서 본격적으로 전개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분께서 하늘에 좌정하신 사실의 우주적 의미를 보여 주려고, 또 교회 안에서 펼쳐지는 구원의 신비가 지니는 마지막 결과를 드러내고자, 사도의 생각은 더욱 높이, 그리고 더욱 멀리 펼쳐진다. 이로써 이 서간의 문체가 왜 바뀌었으며, 바오로의 사상이 새롭게 종합되는 그 전망이 왜 변화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오로가 로마가 아니라 가이사리아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58-60년)에 골로사이서를 집필하였다는 가설의 역사적 틀도 이와 비슷하다.
(2) 골로사이서가 바오로의 친서임을 주장하는 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서간을 필립비서와 필레몬서와 함께 바오로의 선교 및 집필 활동의 끝이 아니라 중간 부분에 배치한다. 곧 사도가 에페소에 상당 기간 머무르는 동안(54-57년)에 쓴 서간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이 기간에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잠시 투옥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사도가 이 고을에서 겪은 어려움에 관해서는 1고린 15,32; 2고린 1,8-10 참조). 이 가설에서는 사도와 그 지방의 여러 교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서간들과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골로사이서를 작업하는 데에 소요되었을 기간은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다. 아울러 에페소서가 일반적으로 바오로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를 떼어 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3) 이 두 견해에 반대하는 쪽에는, 골로사이 교회의 상황이라든가 이 서간의 내용과 형식을 볼 때에 이를 사도 이후의 세대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전에 생생하였던 종말에 관한 관심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교회는 영지주의적인 공격에 맞서 사도의 권위를 내세운다. 이는 특히 바오로의 이름으로 수행된 에바프라의 사도직과 설교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설에 따르면, 골로사이서는 1세기 말엽, 곧 바오로가 사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잘 보여 준다는 것이다(2베드 3,15-16 참조).
5. 서간의 의미
골로사이서의 집필 시기와 필자에 관해서는 이렇게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지만, 이 서간이 근본적으로는 바오로가 다른 계기에 표명한 메시지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완전히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전부이시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인정을 받는 데에서도 그렇고(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우리의 운명, 우리의 죽음과 우리의 영원한 삶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체제의 아주 조그마한 톱니바퀴에도 손가락 하나 닿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예전의 종살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골로사이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 곁이든 위든 밑이든 다른 어떠한 세력도 첨가시키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강조한다. 이 역시 다시 노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간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율법 같은 데에서 구원의 방도를 찾을 필요가 없고(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스도 아닌 다른 존재에서 구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골로사이서). 물론 바오로 서간들의 언어가 전에는 주님의 재림 시기와 그에 대한 고대로 특징을 이루다가, 골로사이서에서는 우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좌정하신 사실과 또 그와 관련된 공간이 지배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둘 다 똑같은 사실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단 한 번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하셨으므로, 우리 역시 그분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삶과 연결되어, 악의 세력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우리의 해방을 방해하던 그 ‘천상 세계’에 승리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현실을 도외시하는 도피 생활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이 서간 끝 부분이 보여 주는 것처럼, 우리가 참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천상 세계에서 사는 천신들, 곧 행성들의 운행과 운명을 지배하는 천사들과 세력들에 관한 이야기가 언뜻 보기에는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다. 골로사이 신자들이 따르고 싶은 유혹을 느꼈던 음식 규정이라든가 종교 의식 같은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제기하는 질문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고 사도에게서 유래하는 대답을 깊이 생각하면, 이 서간이 일으키는 메아리를 알아듣게 된다. 이제 악의 세력들도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한 것들과 다시 타협하려는 우리의 시도나 그러한 것들에게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노력도 이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골로사이 신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믿음의 형제들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21세기의 인간으로서, 골로사이인들과 비슷하게 자기에게 책임이 있음을 깨닫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지구와 다른 행성들을 되돌릴 수 없는 진화의 길로 이끌어 가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구원은 이제 더 이상 배척을 받기도 하는 법이라든가 도덕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를 위협하고 소외시키는 속박을 벗어나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와 우주의 관계라는 결정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이 우주에서 바라보는 것과 온 세상에 선포되어 우리도 받아들인 복음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골로사이서의 본보기에 따라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 그 해답에 따라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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