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베드로 2서 입문 |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3,922 | 추천수0 | |
파일첨부 베드로2서입문.hwp [759] | ||||
베드로 2서 입문
1. 문학 유형과 신학
필자는 먼저 관습에 따른 인사말을 한 다음(1,1-2),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소명의 성격을 상기시킨다(1,3-11). 신자들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생활을 하면서(1,4)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이 성성(聖性)에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일이 전제된다(1,12-21). 사실 그리스도교의 설교는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1,16) 사도들의 증언과 성령의 감도를 받은 예언자들의 말씀에(1,21) 바탕을 둔다.
필자는 이어서 “거짓 교사들”을 신랄히 공박한다. 그들이 문란한 교리와 도덕을 조장하고 퍼뜨린다는 것이다(2,1-22). 그리하여 옛날의 타락한 천사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처럼(2,6) 이 이단자들 역시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단에 관하여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길게 한 다음, 필자는 1장에서 시작한 교리 설명을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는 데에 따른 문제와 함께 다시 전개한다(3,3-13). 주님께서는 참고 기다리고 계실 뿐, 그분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3,9). 마지막으로 이 서간은 깨어 있으라는 권고의 말로 끝을 맺는다(3,14-18).
이러한 내용을 담은 베드로 2서는 엄밀한 의미의 서간 유형보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언’ 유형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곧 이 서신은 위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 공동체 신자들에게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여러 교리를 재삼 강조하는 유언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매우 특이한 베드로 2서가 어떠한 연유로 신약성서에 들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특히 대화라든가 타협 같은 것을 중시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2장에서 이단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거침없이 퍼붓는 격한 언사를 보면서 그러한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서간은 성서의 해석과 성령의 감도(感導), 그리고 경전의 형성에 관하여 새로운 사항들을 보여 준다. 곧 구약성서의 예언과 사도들의 증언이 같은 수준의 것으로 취급되고 둘 다 똑같이 확고한 신앙의 바탕으로 이용된다(1,19; 3,2). 신약성서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성서의 영감성(靈感性)이 여기에서처럼 명백히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없다: “성서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1,20-21).
이 서간에서는 또한 바오로의 서간집이 처음으로 언급됨을 볼 수 있다(3,15-16). 물론 이 서간집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오로의 서신이 모두 들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성서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 서간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왜 늦어지는가 하는 문제를 과감히 제기하는 것에 대한 관심도 보여 준다. 곧 “그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 조상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창조 이래 모든 것이 그대로 있지 않소?”라는 문제 제기이다(3,4). 필자는 이러한 신앙의 결핍을 단호히 단죄하고 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애쓴다. 곧 노아 시대의 홍수가 (물론 당시의 사고 방식에 따른 서술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마지막 심판의 예형이라는 것이다(3,6). 현재의 세상은 불로 파멸되고 그 자리에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 들어서게 된다(3,10-15). 그리고 주님께는 무엇보다도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3,8). 그분의 재림이 지체된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오는 인내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각 사람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모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 가르침으로, 필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중요한 한 면을 상기시킨다.
2. 적대자와 수신인
필자는 교회에 잠입한 ‘불경한 자들’을 단죄한다(2,1).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게 된 자들이다. 그리고 이제 거짓 자유를 퍼뜨려 공동체를 타락시키려고 한다(2,19). 이 “거짓 교사들”은 이중으로 이단에 빠져 있다. 첫째,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주님을 부정하고 천사들을 멸시하기 때문에 신학적 이단자들이다(2,10-11). 둘째,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도덕적 이단자들이다(2,14).
베드로 2서가 이렇게 단죄하는 이단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었으리라는 견해가 제시된다. 이들은 자기들이 뛰어난 지식과 완전한 자유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하고 육체를 멸시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적 배경에서, 그들이 드러내는 도덕적신학적 오류를 이해할 수 있고, 또 필자가 이 이단자들의 잘못된 지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참 ‘앎’을 강조하는 사실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1,2.3.5.8.12.16; 2,20.21; 3,17-18). 이들이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독한다는 말이(2,10)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알 수가 없다. 먼저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이들이 천사들의 이름을 부르는 죄를 저질렀다는 뜻일 수 있다. 사실 유다교,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에세네파에서 천사들을 거명하지 말라는 금령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사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마술에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또는 이와 반대로, 천사들과 관련해서는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하급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는 바오로계 서간의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에페 1,21; 골로 2,15), 천사들의 우월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죄를 저지른 천사들을 심판할 권리를 홀로 지니신 주님 자리에 자기들이 앉아 있는 양 거만스레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이상으로 더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필자가 2장에서 그들을 길게 질책하면서도 관례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데다가, 이를테면 불경한 자의 개괄적인 모습만을 그려 내기 때문이다.
이 서간의 수신인들은 성서뿐만 아니라 유다교 묵시 문학 전통과도 친숙한 사람들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 문헌을 자주 시사하기는 하지만, (1,17만 빼고) 한 번도 명백하게 인용하지는 않는다. 곧 타락한 천사(2,4), 노아의 홍수(2,5), 소돔과 고모라(2,6-7), 보소르의 아들 발람(2,15), 그리고 이 세상이 물에서 비롯되었고 또 불로 멸망한다는 전통 등이다.
이 서간 특히 2,1-3,3은 유다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양쪽에서 매우 비슷한 개념들이 사용되는데, 그것들은 가끔 똑같은 용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드물게만 나오기 때문에 이러한 유사성이 더욱 돋보인다. 게다가 이 두 서간은 같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 같다. 두 곳에서 다, ‘빈정거리는 회의론자’로(2베드 3,3; 유다 18) 허무맹랑한 큰소리를 쳐대며(2베드 2,18; 유다 16) 파렴치하게 잔치판을 벌여 가는(2베드 2,13; 유다 12) “거짓 교사들”을 논박한다. 이렇게 하여 이 이단자들의 죄가 타락한 천사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 그리고 발람의 죄에 비유된다.
베드로 2서와 유다서의 두 필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기존의 문헌에서 영감을 받아 서간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베드로 2서가 유다서를 이용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 2서는 여러 곳에서 그 본문이 부차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필자는 유다서의 병행구보다 자세히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묵시 문학 전통에 능통하지 못한 독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몇몇 요소는 삭제한다. 곧 모세의 주검을 놓고 미가엘 대천사가 사탄과 벌이는 논쟁(유다 9), 천사들이 지상 여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전설(유다 6), 에녹의 예언(유다 14)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베드로 2서의 필자가 외경의 묵시 문학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없다.
그리고 베드로 2서는 재림이 지체되는 것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이의를 부각시키지만, 유다서에서는 이 문제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표지는 베드로 2서가 유다교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유다서보다 후대의 집단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공동체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유다인들의 고유한 전설을 생략하는 것 외에도, 그리스 말의 여러 가지 합성어에다 희귀한 낱말까지 사용하면서 솜씨를 부리는 문체가 드러내는 것처럼, 헬레니즘에 대해서도 더욱 개방적인 자세를 보인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신약성서에서 이 짧은 서간에서만 쓰이는 낱말이 쉰여섯이나 된다. 이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래서 이 서간은 유다서에서 나타나는 배타적 경향과 바오로계 서간에서 볼 수 있는 개방적 경향을 조화시키려는 사목적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곧 초대 교회의 여러 성향을 종합하려고 애쓴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베드로 2서는 초기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는 성서로 받아들여지는 반면에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교회에서는 그 경전성이 부정된다. 이로 미루어, 이 서간이 헬레니즘 세계의 디아스포라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 집단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3. 필자와 집필 연대
필자는 자신을 시몬 베드로 사도라고 밝힌다(1,1). 그리고 3,1에서 언급하는 첫째 서간은 자연히 베드로 1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필자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때에 그 곁에 있었다고 말한다(1,16). 끝으로 자기 죽음이 가까웠다고도 이야기한다(1,14).
필자의 이러한 말은 줄곧 논란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필자가 자신을 사도와 동일화하는 이 자서전적 이야기를, 이와 관련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너무 몰고 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언’이라는 문학 양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베드로 1서와 2서는 상당히 다른 문체를 보여 준다. 양쪽에 같은 낱말은 100개뿐인데 다른 낱말은 599개나 된다. 종말론과 관련된 문제도 서로 다르다. 이러한 상이성은 이 두 서간 사이에 꽤 긴 시간이 흘렀음을 시사한다.
필자는 교회의 첫 세대 사람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밝힌다(3,4). 이는 자기가 그 세대에 속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서간은 일반적으로 1세기 말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유다서보다 후대의 것이다. 무엇보다도 베드로 2서는 위에서 본 대로 성서의 경전을 명백히 언급한다. 아직은 완성된 꼴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도들이나 예언자들의 글과 마찬가지로 “성서”로 헤아려지는 바오로의 서간집이 이미 신자들에게 읽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이 짙게 배어 있는 이 서간의 집필 연대를 너무 뒤로 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125년경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이 서간이 직접 베드로 사도에게서 유래하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전통권에서 사도의 가르침에 이어 참 신앙을 보존해야 하는 필요성을 상기시키려고 이 서간을 ‘영적 유언’의 형태로 집필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 가지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곧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가 밝히는 한 전통에 따르면(「교회사」 II,16,1), 한때 베드로의 협력자였던 마르코가(1베드 5,13 참조) 이 서간이 가장 먼저 성서로 받아들여진 알렉산드리아에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4. 경전성
베드로 2서는 묵시록과 함께, 신약성서의 책들 가운데에서 경전으로 인정받는 데에 가장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문헌이다. 이 서간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출발점으로 해서 천천히 교회 전체로 퍼져 나갔다. 200년이 되기 조금 전에 작성된 이른바 ‘무라토리 경전’에는 들어 있지 않은 이 글월은 오리게네스가(185/6-254년) 처음으로 인용하는데, 그 경전성을 많은 사람이 부정한다고 밝힌다. 340년에 세상을 떠난 에우세비우스는 이 서간을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헌에 포함시킨다. 5세기에 가서야 대부분의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6세기에 마침내 시리아에서도 경전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이 서간은 200년경의 이집트 말 신약성서 번역본과 3세기 말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사본(파피루스 72)에도 들어가 있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