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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우리는 모두 바르티매오가 아닌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3 조회수3,527 추천수0

신약성서의 인물 : 우리는 모두 바르티매오가 아닌가!

 

 

예수의 공생활 가운데 기적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직접적 체험과 목격을 갖도록 하는 기이현상으로 현대 과학의 발달을 통한 합리적 사고 구조를 가진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이 글에서 기적에 대한 이해를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도, 예수의 기적 행위이기에 믿어야 하는 권능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한 인간, 소경 바르티매오가 예수께 향한 절규의 외침과 믿음에 대한 애절함을 보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루가 1,37)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자 한다(마르 10, 46-52 참조).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이 세상의 눈은 떠 있으면서도 마음의 눈, 즉 믿음의 눈은 감겨져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소경 바르티매오를 통해 믿음의 눈으로 다시금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기에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단지 기적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의 이야기로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초점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어려운 운명을 극복한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의 굳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기에 바르티매오의 계속되는 삶은 모범적인 제자상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을 통해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예수와 깊이 결합시키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

 

바르티매오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소경이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구걸뿐이었기에 많은 순례객들이 지나가는 예루살렘의 초입에 위치한 예리고라는 곳에서 구걸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살아갔다. 그는 구걸하는 장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치료되고 죽은 이가 살았다는 소문의 인물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느 날처럼 에리고 성 입구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불현듯 '바로 지금이다. 내가 얼마나 기다린 시간이 아닌가? 지금이 아니면 끝장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는 그의 외침은 경건한 순례길을 방해한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10,48)라고 외쳤다. 바르티매오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메시아가 오시어 소경을 다시 보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온갖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메시아가 오신다는 길목에 있었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강하게 외쳤던 것이다.

 

삶의 희망이 없었던 바르티매오는 마음 속 깊이 간직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기대, 자신의 눈을 뜰 수 있게 하실 분인 예수를 만난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가까이 오라고 부르자, 소경은 자기 겉옷을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나 그 분께 다가선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직설적으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10,51)라고 물으신다. 소경이 바라는 것이란 무엇이겠는가? 그는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기만을 바랬다. 이런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소경은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고 말한다. 예수는 그의 말을 듣고 어떤 과정도 없이 즉각적으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10,52)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경은 눈을 띄게 되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의 말씀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바르티매오의 믿음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확신에 찬 기다림이라 생각된다. 그는 마음속으로 '나를 구해 주실 분, 지금은 절망뿐이지만 언젠가 나의 눈을 보게 하실 분'이라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구약에서 의인인 욥을 생각해 보면 아마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간절한 매달림은 자신의 고통이 하느님의 벌이나 버림이 아니라 다시금 일으켜 세우려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으로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1.5-6).

 

우리는 일상 중에 얼마나 주님께 간절히 매달려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간절함이란 한 순간에 누가 누구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던져 어떤 해결점을 찾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어둠 속에서 살았던 소경 바르티매오는 '혹시'라는 생각 없이 예수께 대한 절대적 신앙만을 갖고 있었기에 단순히 세상을 보게 된 것만이 아니라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서게 되었다.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모든 삶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그는 모든 것이 절망과 원망뿐인 삶에서 희망과 기쁨을 갖도록 하는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제자로서 예수를 따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작년 10월경에 신학생들과 함께 꽃동네를 갔다 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모습들 가운데 제일 인상에 깊이 남겨진 것은 휠체어를 탄 양팔과 다리가 없는 형제를 시각 장애자인 형제가 마당에서 큰 소리로 웃으면서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참 아름답게 보인 것은 서로 서로의 부족한 것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정상인이라고 생각되는 우리에게 얼마나 신선한 자극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두 형제는 모두 레지오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소리들 듣고 속으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자신의 것을 서로 서로 주는 것이라는 것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바르티매오를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면, 그와 우리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바르티매오는 불행한 처지에 있었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큰 힘이 있었다. 그는 오랜 기다림 속에서 예수를 만났고 확실하게 '다윗의 아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외침을 통해 그 분을 붙잡았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예수에 대한 감미로운 말씀과 교훈을 듣고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옆에 계신 그 분을 붙잡으려고 하기보다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자비를 구했고, 예수에게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 소경은 예수께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손짓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셨고 치유된 바르티매오는 자신에게 내민 그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삶을 다시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분 곁에 머물기 위해 그는 '혹시'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고, "그리고 그는 예수를 따라 나섰다"(10,52).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마치 바르티매오의 외침처럼 한다. 그런데 자비를 구하는 우리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면 정말 주님의 자비가 나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아니면 습관적 반복에서 나오는 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비를 구하는 바르티매오는 아주 단순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체험한 신앙의 확신을 우리도 가슴 안에서 느껴야 할 것이다. 신앙은 바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있기에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바르티매오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인천가톨릭대학교 김일회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성서신학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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