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성서는 처음에 어디에 쓰여졌을까? - 성서 두루마리, 예루살렘. 자료제공=정웅모 신부(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 성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 1,1)는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세상이 창조되던 그 날부터 바로 속기록처럼 기록되지는 않았다. 성서도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인간의 글로 써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기록이 되려면 최소한 글자와 필기용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인쇄, 출판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그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종이는 기원후 105년 중국의 채윤(蔡倫)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인쇄기술과 종이가 없던 고대에는 어디에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했을까? 종이가 없던 고대 시대의 글은 대부분 파피루스에 손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성서도 처음에 대부분 파피루스와 짐승 가죽을 부드럽게 하여 만든 양피지에 기록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에서 자라는 갈대 이름이다. 또한 파피루스는 갈대로 만든 종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집트에서 생산된 파피루스는 페니키아의 항구 비블로스(Biblos)를 통해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비블로스란 말에서 성서(Bible)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이집트인들은 약 4-5m 정도까지 자라는 이 갈대로 상자나 배를 만들기도 했다. 이 파피루스는 기원전 4000년말 이래 종이를 사용하기 전까지 일반적으로 필사 용구로 사용되었다. 파피루스 재료로 쓰이는 갈대의 굵기는 보통 어른 손목 정도여서 우리나라 갈대와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파피루스를 만드는 방법은 오늘날에도 이집트에 가게 되면 관광 상품으로 볼 수 있다. 파피루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갈대 껍질을 대나무처럼 세로로 얇게 벗겨낸다. 그리고 나서 벗겨낸 껍질을 납작한 곳에 나란히 놓은 뒤 그 위에 또 한번 적신 껍질을 겹쳐서 꽉 눌러서 햇볕에 말린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쓰는 16절지 크기의 파피루스가 된다. 이 파피루스를 서로 꿰매거나 풀로 계속 붙여 나가면 족자처럼 기다란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만들어진다. 보통 파피루스 20장 이상을 붙이면 길이 4m가량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만들어진다. 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메말랐을 때 쉽게 부서지는 성향이 있어 다루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루마리 끝에 나무 봉을 부착시켜 사용했다. 요즈음에도 유다인 회당에 가면 봉에 말린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서가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건조한 기후 때문이었다. 당시에 파피루스를 만드는 기술자는 큰 존경을 받았는데, 보통 서기관들이 이 일을 맡아 했다. 그리고 짐승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는 파피루스와 더불어서 기원전 17세기부터 기록매체로 쓰이기는 했지만 널리 애용되지는 않았다. 양피지가 기록매체로 본격 등장한 시기는 양피지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한 후대 일이다. 고대 사람들은 양피지를 파피루스처럼 두루마리로 만들어 보존하려고 했다. 보통 양피지는 겹겹이 놓고 한쪽을 묶는 책 형태로 제본되었다. 양피지는 기원후 8세기 중엽 아라비아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점령한 후 거기서 배운 종이제조법을 유럽에 보급시킬 때까지 널리 쓰였다. 양피지는 파피루스나 초기의 종이에 비해 견고하고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점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양피지의 결점은 값이 비싸고 부피가 크며 무거운 점이었다. 양피지는 주름이 잡히거나 닳아 없어져 버리는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피루스보다는 상태가 좋았다. 그리고 필기구는 때로 금속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주로 갈대의 한쪽 끝을 뾰쪽하게 깍은 다음 부드럽게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대 시대 글을 쓰는 일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보통 파피루스 한장에는 약 140단어를 담을 수 있었으며, 필사하는 데 약 2시간 정도가 걸린다. 만약 신약의 로마서를 필사한다면 파피루스 종이 50장과 100시간 이상이 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쉽게 볼 수 있는 성서가 선배 신앙인의 엄청난 열성과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의 한 글자도 소홀히 볼 수 없는 이유라 하겠다. [평화신문, 2003년 10월 1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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