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 - 전통복장을 한 유다인, 1914년, 유화, 샤걀, 베스트팔렌 미술관, 뒤셀도르프, 독일. 자료제공=정웅모 신부. 사두가이파는 바리사이파와 함께 유다 종교의 중요한 두 축을 이루는 종파였다. 사두가이파는 예수님 탄생 전 2세기에는 바리사이파와 싸움에 여념이 없었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바리사이파보다 격한 증오를 나타냈다. 실제로 사두가이파는 예수님을 단죄하고 처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두가이파는 대부분 귀족이나 부호 출신이었고, 안정적이며 사회의 갖가지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었다. 신약성서 시대에 사두가이파는 바리사이파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 이유는 사두가이파가 천사나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고, 구전전승도 부정하여 바리사이파 가르침과 대립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출애굽 이후로 수세기 동안 전통들을 거부했다. 그들은 천사와 영, 악마 등과 관련된 전설에 대한 믿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부활 사상과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의 부활 및 천사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다(마르 12,18 ; 사도 23,18 참조). 사두가이파는 일반적으로 대사제와 사제들을 배출해온 특권층이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 권력에 해가 올까봐 두려워하던 무리였다. 그들은 외부적으로는 로마 권력을 무조건 존중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성직자 중심 국가를 수호하여 자기들 권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세력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율법에 의한 엄격한 제재를 주장했기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예수님 부활을 구체적 현실로 믿고 선포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과도 당연히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바리사이파는 구전 율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대립했다. 가장 주요한 의견 충돌은 부활에 관한 것이었다. 바리사이파들은 부활을 믿었으나, 사두가이파들은 부활을 부인했다(사도 23,6-10 참조). 그래서 어느날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했다. 일곱 형제와 혼인한 여인이 있었는데 죽은 뒤 부활한다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대를 이어주는 풍습, 즉 수혼법이 있었다. 예수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죽음 다음의 세계에서는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이 세상 방식과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셨다(마르 12,18-27 참조).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저승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사두가이파는 무식하고 몽매한 사람들이나 저승을 믿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지극히 현실적 사람들이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의 관심은 오로지 현세의 부유한 생활이었다. 실제로 사제 계급을 포함하는 사두가이파들은 귀족적이면서도 부유하고 높은 계급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사도 4,1 ; 5,17). 사두가이파는 로마의 지배도 평화와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여 환영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부활과 종말론에 관한 예수님 가르침은 사두가이파보다 바리사이파와 더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활과 내세의 삶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두가이파는 초자연주의 전반을 거부했기에 천사에 대한 신앙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비록 율법에 매달리기는 했지만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을 보다 더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두가이파보다 바리사이파를 더 존경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백성들과 함께 로마 제국을 증오했지만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굴욕적이고 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2004년 9월 2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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