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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질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294 추천수1

성서의 세계 : 질투

 

 

이사악의 아들 야곱은 젊은 나이에 오랜 타향살이를 하게 된다(창세 27, 30). 꾀를 부려 형에게서 맏아들 권리와 장자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가로챈 그는, 복수의 기회만 엿보는 에사오 형을 피해 달아나야 할 지경에 이른다. 마침내 그는 멀리 있는 외가로 피신한다. 거기에서 야곱은 아름다운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빈털터리인 그는 일곱 해 동안 일해 주고 라헬을 얻기로 한다. 그런데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니 옆에 누워있는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가 아닌가! 영악한 야곱이 오히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는 다시 일곱 해를 일해 주기로 약속한 뒤에야 라헬을 얻게 된다.

 

야곱은 뜻하지 않게 두 자매를 아내로 얻기는 하였지만, 이제 두 아내의 ’질투 싸움’에 끼이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신다(29,31). 사랑받는 아내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는 몸으로 드러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레아는 연이어 아들을 넷이나 낳는다. 질투로 몸이 달아오른 라헬은 남편과 한바탕 언쟁을 벌인 끝에, 편법을 써서 자기의 몸종 빌하를 씨받이로 남편에게 준다. 그렇게 해서 아들을 둘 얻는다. 이제 다급하게 된 것은 레아이다.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음을 안 레아도 자기의 몸종 질바를 이용하여 아들 둘을 더 보탠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레아는 큰아들이 들에서 발견한 임신촉진제를 라헬에게 주는 조건으로 남편과 다시 동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서 아들 둘을 더 낳는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라헬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신다"(30,22). 결국 라헬도 아들 요셉을 낳게 된다. 그리고 또 훨씬 뒤에는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까지 낳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야곱은 아들 열둘을 얻는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이다. 하느님께서는 두 여인의 질투를 통하여, 곧 인간적인 약점까지 이용하셔서 당신의 백성이 될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질투하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으로 질투심에 불타오른 남편은, 아내를 사제에게 데리고 가서 일정한 의식을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민수 5,14-30).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만 그 옛날의 사정으로는 비정상적이지 않은 이러한 법규는, 남자의 질투가 횟수나 정도에서 여자의 질투보다 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불레셋인들은 이사악의 재산이 많아지자 그를 질투한다(창세 26,14).

 

이 몇 가지 예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질투라는 현상이 성서의 사람들에게서도 전혀 다르지 않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질투’라는 개념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언어적 특색이다. 그들은 예컨대 철학의 나라 그리스 사람들처럼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으로, 분석적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여러 면이나 여러 과정을 지닌 한 현상을 세분하여 각 부분이나 과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지 않고, 그 전체를 곧잘 한 낱말로 나타낸다. 히브리말의 ’질투’도 강렬한 미움을 동반한 시기에서부터 정열적 사랑을 드러내는 열정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번역할 때에는 문맥에 따라 달리 옮겨야 한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열성을 다하여,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질투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없애버리지 않았다"(민수 25,11). 여기에서 "열성"과 "질투"는 히브리말에서 같은 말이다. ’하느님을 위한 열성’은 본디 ’하느님을 위한 질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질투하다’를 경우에 따라서는 ’흥분하다’(시편 37,1), ’부러워하다’(잠언 24,1), ’시기하다’(창세 26,14) 등으로 옮겨야 한다.

 

구약성서의 질투가 지니는 둘째 특징은 하느님과 관련된 신학적 특색이다. 여기에는 먼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을 위한 질투’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 열정은(시편 69,10; 119,139 참조) 옛날 사람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파괴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민수 25,7; 2열왕 10,16.18-27).

 

구약성서에 나오는 질투의 가장 큰 특성은 ’하느님의 질투’에 있다. 구약성서에서 ’질투’가 동사나 형용사나 명사로 쓰이는 전체 용도의 절반 가량이 하느님과 관련되는 데에서도, 하느님의 질투가 지닌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너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탈출 34,14. 또 20,4-5와 신명 4,24; 5,9; 6,15도 참조). 성서에서 ’이름’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나 존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 이름으로 직접 불리지는 않으셨지만, 주님의 이름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은, 그분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투’라는 것이다.

 

질투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질투의 근본 구조는 사람에게서나 하느님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질투는 먼저 삼각관계에서 생긴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둘만의 관계를 이룬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주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시나이 계약이,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의 존립과 존속의 근본이 된다. 주님께는 이스라엘 외에 또 다른 당신의 백성이 있을 수 없고, 이스라엘에게는 주님 외에 또 다른 하느님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둘만의 관계가 끊임없이 위협받는 상황, 곧 다신주의의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우상들을 좇음으로써, 자기들의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유일성을 훼손시켜 그분을 질투하시게 한다. 이 질투는 이스라엘에게 징벌을 가져온다. 결국 하느님의 질투는 호세아서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배신당한 뜨거운 사랑의 아픔이며 분노이고, 또 그러한 분노를 일게 한 자를 사르는 불길이다(신명 4,24; 에제 16,38).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특별히 신명기가 부단히 강조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한마음으로 하느님만 섬기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제삼자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끼여드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훼손시킬 때에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똑같은 질투의 열화를 퍼부으신다(에제 35,11; 36,5). 그래서 이 제삼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또는 그런 존재의 유무 여부에 따라 같은 히브리말을 때로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탈출 20,5), 때로는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예컨대 나훔 1,2).

 

질투는 왜 나는가? 상대방에게 정이 있고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질투하게 된다. 그런데 정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화만 난다. 그 화는 질투가 아니라 상처입은 자존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서는 인간 세상을 초월하셔서, 저 높은 하늘에서 당신 혼자 만족스럽게 살아가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다. 당신께서 선택하신 백성,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정과 사랑을 품고 계신다.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 열정을 지니시고 그 정열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감정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질투하시는 하느님’은 정적(靜的)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분이시다.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인간에게 가까이 와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성서는 이러한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이 바로 자기 곁에서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는 분으로 느끼는 그런 분이시다. ’하느님의 질투’는 결국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그분의 깊은 관심과 큰 열정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질투보다는 사랑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랑을 구약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를 가로막는 것을 ’질투’라는 불로 살라버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생명을 목표로 한다. 그분의 질투는 이 생명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것을 없애버리는 뜨거운 정열을 뜻한다. 질투는 하느님의 사랑이 이러한 열정을 지닌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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