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풍속] '성서의 풍속'을 마치며 마지막 원고로 무엇을 쓸까 한동안 고민하다가 독자들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그동안 '성서의 인물'과 '성서의 풍속'을 애독해주신 모든 분께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원고라고 생각하니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 아쉽기도 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분들께 너무나 고마워 큰절이라도 넙죽 드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평화신문에 2000년 5월부터 '성서의 인물'을 연재하면서 매주 독자들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제 평생에 큰 기쁨이고 축복이었습니다. 만 5년 동안 매주 성서 속 인물과 풍속을 찾아 헤매는 작업은 제게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성서 속 인물들을 만나는 건 과거 역사를 단순히 돌아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서 속에 실존했던 인물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것 같은 흥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더구나 성서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간적 매력과 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서의 풍속은 성서를 더 넓고 깊이있게 이해시키기보다는 가깝고 친근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제 자신이 성서시대 한가운데 있는 신비로움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저의 필력으로 독자들과 온전히 이 체험을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성서의 인물'을 집필하면서 성서 주변 환경이나 풍습에 관해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서의 풍속을 이어서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대한 지속적 호기심이 글을 쓰게 했던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업은 기쁨만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스런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을 요구받았으며, 특히 제 자신으로부터 질책이 가장 인내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자주 한계에 부딪쳐 힘들어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어떤 단어와 만나 생명력을 가지게 될 때 일종의 창조작업이 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창조 역사는 글을 쓰는 것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창한(?) 의미를 붙여봅니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성서 여행은 저에겐 그야말로 은총의 시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글을 통해 좋은 분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성서 구석구석을 찾아보고 때로는 조용히 묵상하면서 성서의 인물들을 만나고 풍속을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인적 능력의 한계로 답답한 시간도 많았습니다. 또한 시간에 쫓겨 최선을 다하지 못한 때도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하며 용서를 청합니다. 성서의 인물을 만나고 성서의 풍속을 그리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냥 한번 지나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삶과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세상 그 어느 것도 은총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서의 인물과 풍속을 집필하면서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서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결코 놓지 않은 마지막 희망의 끈인 하느님께 대한 믿음 말입니다. 다시 한번 '성서의 인물'과 '성서의 풍속'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더 좋은 글을 쓰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지만 늘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께 감사의 정을 느낍니다. 또한 글에 꼭 맞는 그림을 찾아주신 정웅모 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직접 전화나 전자우편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저 멀리 외국에 살고 계신 동포 여러분들 사랑이 듬뿍 담긴 격려 편지들을 받았던 기억에 다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감사합니다. [평화신문, 2004년 12월 2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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