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예언자 예레미야 (1) - '말씀'의 예언자 예레미야 - 시대적 상황과 소명 “당신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15,16)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나이다.”(20,9)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있어 진정 ‘존재의 이유’요, ‘삶 바로 그 자체’였다. 처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말씀을 접했을 때 체험했던 충만한 기쁨, 그리하여 열정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의 냉담한 반응과 비웃음에 겪어야만 했던 좌절과 실망, 그로 인해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예언자 직분에 대한 갈등, 나아가 말씀에의 확신과 신앙 그 자체를 뿌리채 뒤흔들었던 혼란과 회의, 하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절망의 과정을 겪으면서 새롭게 체험하게 된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깨닫게 된 말씀의 심오한 의미! 이처럼 예레미야는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말씀과 함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예언자로서 성숙해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특별히 ‘말씀’의 예언자라 불리운다. 1.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6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아나돗’에서 사제인 힐키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은 요시야 임금(기원전 640-609년)이 다스리던 기원전 627/6년경으로 당시 예레미야는 20대의 젊은 나이였다. 그후 그는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기원전 587년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의 긴 기간동안 예언직을 수행하게 된다. 왕국의 멸망 후에는 감독관 게달리야를 살해한 일단의 주전파(主戰派)들에 의해 이집트로 잡혀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동족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생애와 선포말씀을 전하고 있는 예언서의 내용들은 그가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았던 ‘말씀의 예언자’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유명한 다섯 개의 예레미야 고백록을 통해 그가 예언자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겪었던 갈등과 회의를 만나면서 진솔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며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생수(生水,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마음이 갈라졌던 이스라엘에 대한 질책의 말씀은 우리의 충실치 못한 삶을 반성하게 하며, 영원한 계약에 대한 그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써 맺으시게 될 결정적인 새로운 계약을 향한 전망을 제시해주고 있다. 2. 활동시기와 시대적 상황 예언서의 내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이 선포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활동을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관련된 성서 텍스트와 각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소개하기로 한다. 1) 소명과 첫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627/6년-622년)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기원전 627/6년경의 남왕국 유다는 종교적인 타락과 사회,정치적 불안이 만연했던 때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요시야 임금이 아직 본격적인 통치를 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선대(先代) 므나쎄 임금(기원전 687-642년) 시대의 혼란했던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실상 므나쎄 임금 때 왕국이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 사회적인 혼란과 함께 강대국의 이방종교들이 유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도 참된 야훼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종교주의에 물들어 갔으며, 하느님께서 삶의 근본 규범으로 주셨던 사랑의 계명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부정과 불의에 빠져들게 된다. 바로 이러한 때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1장) 예언자 예레미야는 당시 혼합 종교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던 백성들을 질책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와 참된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2-6장) 한편 하느님께서 새롭게 맺으시고자 하는 새로운 계약을 통해 남왕국 유다 뿐 아니라 이미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던 북왕국 이스라엘도 함께 하나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구원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한다.(30-31장) 그후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에 의해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이 단행되자 예레미야는 약 10여 년간 활동을 멈추고 휴지기를 가지게 된다. 2) 두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609년 이후 몇 해) 기원전 609년 요시야 임금이 이집트 파라오 ‘느고’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새로운 임금으로 여호야킴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는 선대의 종교개혁과 자주적 독립을 위한 시도들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금 이스라엘을 혼란 속에 빠뜨린 악한 임금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재개토록 하게 된다. 이때 예언자는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의 박해 가운데 외로이 그러나 굳건하게 그들의 불의를 고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한다.(7-26장; 35-36장) 특히 성전에 대한 당시의 맹목적인 신뢰를 질책했던 선포(7장, 26장)와 함께 예언자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이 나온 것도 바로 이때이다. 한편 예레미야는 당시 혼란했던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있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기도 하였다.(46-51장) 3) 세 번째 활동시기(기원전 594년-587년) 예레미야의 세 번째 활동은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시드키야 제위 제4년부터 왕국이 멸망한 기원전 587년까지 펼쳐지게 된다. 이때 예언자는 임금의 무능함과 함께 당시 친 바빌론파와 친 이집트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왕국의 분열상을 고발하면서 이스라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죽음을 무릅쓰고 선포한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에 귀를 닫고 듣지 않았던 그들은 마침내 기원전 587년 예레미야가 경고한데로 멸망하게 된다. 한편 예언자는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던 이 시기에 미래에 다가올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와 관련된 내용은 27-29장, 32-34장, 37-39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4) 마지막 활동시기(기원전 587년 이후) 예레미야는 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론에 의해 감독관으로 내세워진 게달리야가 암살된 직후 그의 서기인 바룩과 함께 친 이집트파에 의해 이집트로 끌려가게 된다. 여기서도 그는 난을 피해 이주해 온 동족들을 격려하며, 우상숭배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그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이처럼 예언서는 예레미야가 마지막까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해 봉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3. 예언자의 소명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도구로서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예언서의 첫 부분에서 전해주고 있다.(1,4-19) 하느님의 소명은 예언자의 전 삶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체험으로서 여기에는 부름받은 이의 신앙과 예언자로서의 정체, 그리고 수행해야 할 사명 등이 묘사되고 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4절)는 표현은 예언자가 하느님 말씀의 사람임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의 체험은 이제 예레미야의 삶에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오게 되며, 그가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심화되고 성장해 나가게 된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를 원초적으로 선택하셨으며, 이스라엘을 넘어서 뭇 민족들도 포함하는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세우셨음을 밝히신다. 물론 예언자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에게로 파견된 이들이다. 그러나 “민족들의 예언자”란 표현을 통해 1) 당시 이스라엘의 운명이 주변의 강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었던 시대적 상황과 2)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참된 주인이시라는 신학적 사상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6절)라고 주저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의 사명에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부담스러워 하며, 회피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들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당신 도구로서의 선택은 인간 생명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전적인 권한이다. 이어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7절)고 이르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가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자세를 제시해준다. 즉 하느님의 사람은 자신이 선호하고, 자신에게 편한 이들만이 아니라, 비록 생각을 달리하고, 그를 미워하며 심지어 박해하는 이들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이나 자신이 판단하기에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말이 아니라, 비록 청중들이 듣기 싫어하고 외면하는 말일지라도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이면 무엇이나 충실히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을 전할 때 예레미야가 겪게 될 상황을 예견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8절)고 약속해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언자로서의 직무와 권한을 맡기신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10절) 그리고 예언자로서 수행할 사명이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 것임을 제시해주신다. 전반부의 네 개념은 예레미야가 선포해야 할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의미하며, 후반부의 두 개념은 구원의 메시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어 두 개의 환시가 제시되는데 첫 번째 환시(11-12절)는 ‘지켜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와 유사한 ‘편도나무’란 개념을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지를 지켜보고 계실 것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북쪽에서 쏟아질 듯 기울어져 있는 끓는 냄비의 환시(13-16절)는 이스라엘의 죄를 응징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강대국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소명이야기의 마지막 부분(17-19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당신께서 함께 해주실 것임을 약속하시면서 그를 백성들에게 파견하신다. 여기서 진정 예언자가 두려워 할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한 분뿐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언자 직분의 원천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월간 빛, 2002년 9월호, 송재준 마르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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