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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16: 전쟁 그 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5-25 조회수3,221 추천수1

[유대인 이야기] (16) 전쟁 그 후…


가나안에 휘몰아친 전쟁의 소용돌이

 

 

유대인들의 맹렬한 공격으로 가나안 토착민들은 맥없이 쓰러져 갔다. 이스라엘에서 취재 중 길에서 만난 쓰러진 고목에서 생활 터전을 빼앗긴 가나안인들의 비애가 느껴졌다. 유대인들은 왜 타민족에 대한 포용 정책에 인색했을까.

 

 

잔잔하던 찻잔이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이다. 가나안 중부 지방을 점령한 유대인들은 이제 가나안의 남부와 북부를 종횡무진 오가며 휘젓기 시작한다. 가나안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하초르의 왕, 야빈과의 전투다. 야빈은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평화 파괴자이자 침략자였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주변국들과 정치적 연합을 결성, 유대인들에게 공동 대응한다. 연합세력의 초반 기세는 대단했다.

 

“병사들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고 군마와 병거도 아주 많았다”(여호 11,4). 하지만 이미 상승세를 타고 있는 유대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초르를 점령하고 그 임금을 칼로 쳐 죽였다 … 또한 그 성읍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여 완전 봉헌물로 바쳤다. 이렇게 그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하초르는 불에 태워버렸다”(여호 11,10-11).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전쟁을 어떻게 수행하고 전후 처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추적해 보면, 전쟁을 치른 민족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가나안 침략 전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잔혹성이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북부의 하초르를 유린하는 것에 앞서, 남부에서도 비슷한 잔혹성을 보인 바 있다.

 

“여호수아는 온 땅, 곧 산악 지방, 네겝, 평원 지대, 비탈 지대, 그리고 그곳의 임금들을 모조리 쳐서 생존자를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여호 10,40).

 

이는 훗날 로마가 정복 전쟁을 하면서 타민족에 대한 포용정책을 취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os)는 자신의 저서 「영웅전」에서 이렇게 썼다.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이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 하지만 유대인은 달랐다. 대항하는 세력을 방화하고 파괴하고 약탈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부족 전체를 살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유대인들이 가나안 정착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경기술 등 생활 문화가 열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여호 24,13)

 

유대인들이 가나안 토착민보다 건축, 토기, 농경기술에 있어서 열등했다는 점은 지난 100년 동안 이뤄진 수많은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인류 역사적으로 볼 때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은 침략과 약탈을 통해 성장한다. 13세기의 몽골이 그랬고, 기원전 390년 북부 유럽의 켈트족(로마인들은 그들을 갈리안이라고 불렀다)이 그랬다. 켈트족은 당시 높은 수준의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문명국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도시 파괴 행위의 또 다른 원인은 정치체계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509년 이후의 로마가 법이 지배하는 공화정이었다면, 당시 그리스는 민의가 중요시되는 민주정이었다. 로마가 공익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면 그리스는 개개인의 이익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화정과 민주정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유대민족이 선택한 정치체계는 공화정도, 민주정도 아니었다. 유일신 하느님에 의한 신정체제였다. 신의 명령은 인간의 잔학성을 희석시킬 수 있다. 인간의 판단에 따른 살인은 불의하지만,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전쟁은 성전(聖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문화적 열등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신의 명령으로 정당화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평화롭게 살던 가나안 토착민들의 비참한 운명은 ▲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의 자부심 ▲ 오랜 광야 생활로 체득된 유대인들의 잡초같은 근성 ▲ 쇠퇴하는 이집트 등 당시 국제정세 등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바탕 전쟁의 참혹함이 휩쓸고 지나간 뒤, 가나안 땅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그대로 모든 땅을 정복하였다. 그러고 나서 지파별 구분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땅을 상속 재산으로 나누어 주었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이 땅은 평온해졌다”(여호 11,23).

 

하지만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죽을 때까지도 가나안땅의 정복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유대인들의 가나안 땅의 최종 정복은 통일 왕국이 성립하는 기원전 1000년대 말에 가서야 볼 수 있다.

 

이제 여호수아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유대 민족도 세계사에 ‘잘되는 민족’중 하나로 명함을 내밀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잘되는 민족’의 첫 번째 조건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는 점이다. 여호수아의 뒤를 잇는 지도자들이 그랬다.

 

성경은 그 여호수아의 후계자들을 ‘판관들’이라 부른다.

 

[가톨릭신문, 2009년 5월 24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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