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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6 조회수4,719 추천수0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7.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

 

 

드디어 로마서다. 로마서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 결정판으로 불린다. 로마서는 동시에 지금까지 살펴본 바오로 사도가 쓴 편지 중 가장 마지막에 쓴 글이기도 하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티토에게 보낸 서간 등도 모두 바오로 사도의 이름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콜로새와 에페소, 티토 등의 서간도 모두 바오로 사도가 쓴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이 서간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름만 빌린 일명 가명 편지다. 친서가 아닌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저자가 자신을 낮추고 바오로 사도를 높이기 위해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온 서간들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바오로 서간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친서 중 가장 마지막에 작성된 만큼 바오로 사도가 모든 정열을 쏟아 부어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작성한 서간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이 서간을 단순한 서간이 아니라 신학 논문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부 성당과 개신교에서 성경 암송 대회를 열거나 성경 교육을 할 때 로마서에 가장 먼저 접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로마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서간들과는 내용상으로도 조금 성격이 다르다. 다른 서간은 그 교회에 문제가 발생해 문제에 대응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는 순전히 전교 목적으로 저술됐다.

 

바오로 사도의 1·2·3차 전도 여행은 45년부터 58년까지 총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 마지막 전도 여행인 3차 여행을 마칠 즈음인 57년 말부터 58년 초까지 약 3개월 동안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작성한 것이 바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다.

 

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일생을 바쳐 전교 여행을 한 바오로 사도. 이제 그도 늙었다. 몸도 많이 약해졌고, 이곳저곳 아픈 곳도 많다. 교통편이 제대로 없는 당시에 13년 동안 걸어서 전교 여행을 다녔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건장한 남성이라도 몸이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된 바오로 사도가 이제 마지막 열정을 모두 불사르며 로마인들에게 서간을 쓰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또 하나 발견된다. 바오로 사도는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로마를 방문한 일이 없다. 그런데 로마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물론 다른 사도들이 로마에 갔다는 흔적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을까.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강림 후(교회 창립 후) 베드로 사도 설교때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 때 로마에서 온 이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아가 신앙을 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당시 로마는 시리아와 마케도니아 등 근동 아시아 지역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당시로선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신자들이 다른 여러 아시아 교회와 교류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에 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왜 로마에 편지를 썼을까.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 꼭 한번 가려고 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필요로 없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를 복음화 시켜야 세계가 복음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여러 이유로 로마를 방문하지 못했다. 결국 지금에 와서야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편지로 전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바오로사도의 로마서 집필 목적 중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교 의지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의 서쪽 끝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전교하기 위해 로마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그 때를 대비해 로마교회의 도움을 요청하는 뜻이 로마서에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시 로마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는 이미 30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찾아오는 사도도 없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만, 과연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또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 소중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바오로 사도가 보낸 편지다. 이제 그 편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본다. [가톨릭신문, 2007년 7월 15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8.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

 

 

오늘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어려운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자체가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천천히 들여다 보면 다른 서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내적 성찰의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의로운 분이다.’

 

이것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전체에 흐르고 있는 큰 주제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의로움이 하느님 안에만 머무르면 의미가 없다. 인간의 의로움과 연관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그럼 이 의로움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1장 17절을 보자.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는 길이다. 그만큼 복음은 중요하다. 복음은 그리스도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되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 22)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만 되면 사람은 의롭게 된다.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왜 의롭지 못한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욕심과 자기 생각대로 살기 때문에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의로운 하느님은 인간도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복음(그리스도)이 우리에게 왔다. 복음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서 하느님처럼 우리도 의롭게 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의롭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원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의로우신 분이 우리의 의로움과 구원을 원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롭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한다. 하느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교만하게 살면 의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하느님의 의는 과연 무엇을 담고 있을까. 바로 자비와 용서다. 하느님은 무한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하느님의 용서는 인간적 차원(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을 넘어선 하느님 차원의 용서다. 무한대의 차원, 초월적 차원의 용서다.

 

초대 교회에 안셀무스라는 대학자가 있었다. 이 학자는 대리속죄 사상을 주장했다. 어느 날 아들이 잘못을 해서 법정에 섰다. 그래서 징역 12년 언도를 받았다. 법정에는 부모도 함께 있었는데 그 부모가 말한다.

 

“재판관님 제가 대신 옥살이를 할 테니 미래가 있는 제 아들에게는 기회를 한번 주십시오. 내가 대신 속죄를 할 테니, 아들 대신 고통을 받을 테니 너그럽게 재활의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이 대리속죄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고통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죄를 용서하신다. 우리의 구원은 이런 방법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이러한 구원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구약시대에도 ‘하느님은 의로움이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이사 46; 51, 8 참조)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지만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는 생활 속의 말과 행동은 모두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연결돼 있듯이 현재와 미래도 연결되어 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의’를 묵상함은 결국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의롭게 해주신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와 은총을 주시겠다는 말이다.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의로운 하느님의 은혜는 모두 종말로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생활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감옥에 대신 가는 부모님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은 거룩하시고, 한없이 의로우신 분이다.

 

십자가에 무릎 꿇을 때 이점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내려다 보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그 의로움을 묵상할 때 진정 구원의 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믿음’이다. 다음 주에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강조하고 있는 ‘믿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가톨릭신문, 2007년 7월 22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29.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

 

 

지난 주 ‘하느님의 의(義)’에 대해 배웠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의를 처벌 · 심판이 아닌 자비 · 용서, 거룩하심, 지엄하심으로 설명한다. 하느님은 의로우시기에 믿음을 가지면 우리도 의롭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면 자비로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을 닮아간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구약시대부터 지켜왔던 유다인들의 율법이 초기 교회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기 때문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율법을 강조했고,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이 우리를 의화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의화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문장 하나 하나를 읽으며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본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 강조한 첫 내용은 1장 16절에 나온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 16)

 

여기서 바오로사도는 믿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능력이 복음이라고 선언한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율법을 가진 자신들만 구원받는다는 선민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바오로사도는 이제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믿으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의로운 관계가 된다. 그래서 구원이 이뤄진다.

 

인간은 원래 불의하다. 하지만 예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면 이 불의한 것이 의롭게 변화된다.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처벌의 심판이 아닌 모든 이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심판이다.

 

바오로 사도는 더 앞으로 나아간다.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 율법을 배워 하느님의 뜻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할 줄 안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눈먼 이들의 인도자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빛이라고 확신하며, 율법에서 지식과 진리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며 철없는 자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로마 2, 17~20)

 

바오로 사도가 한 유다인에게 말하고 있다. 그 유다인은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고, 하느님 뜻을 알고, 율법을 배워 분별할 줄 알고, 눈 먼 사람의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빛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율법에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여 무식한 사람에게 지도자가 되고 철없는 자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율법으로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고, 율법을 통해서 완덕으로 도달할 수 있고,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일침을 놓는다.

 

“그렇다면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로마 2, 21~23)

 

오늘날 우리들이 두고두고 새겨들을 말이다. 아집과 독선, 교만, 정형화된 사고, 영적 게으름을 경계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우리들에게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없고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음, 믿음, 믿음…. 바오로 사도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계속 이어진다. 3장 9~20절(사람은 모두 죄인), 3장 21~31절(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에서 믿음은 나약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4장 1~12절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4장 13~25절도 믿음을 통해 실현된 하느님 약속에 대한 이야기다. 이 믿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에 대한 강조로 넘어간다.

 

믿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 해답이 있다. [가톨릭신문, 2007년 7월 29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30.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4)

 

 

로마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은 총 16장으로 되어 있다. 오늘은 5장부터 보도록 하자.

 

5장과 6장은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닮아 의롭게 되기 위해선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중심은 그리스도다. 율법, 겉치레가 중심이 아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화해에 이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로마 6, 8 참조)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다.”(로마 6, 18 참조)

 

이어 바오로는 성령이 주시는 생명(8장)에 대해 말하고 중요한 내용인, 구원의 보편성(10장)을 언급한다.

 

하느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만민을 위한 것이다.

 

구원은 대충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당신의 은총을 계속 주기 때문에, 더 나아가 인간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계속해서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언젠가는 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결국 ‘믿고 따를 때’구원받을 것이라는 선언이다.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을 완전히 닮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제 그리스도 이후에는 믿음으로 그것이 가능해진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 9)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 말씀을 듣는 순간, 바로 내 내면과 내 입에 있고, 내 귀와 내 눈에 있고, 바로 내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예수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가르침 안에 율법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까, 예수님 생애 모습을 마음에 담고 생활하며 늘 기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함께 하는 삶이다.

 

이어 11장은 이방인 구원, 12장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생활, 13장은 사랑은 율법 완성, 14장 15장은 공동체에서의 생활을 말한다. 모두 중요한 내용인 만큼 꼭 묵상해 보기를 권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16장 ‘끝인사와 권고’다. 많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나는 특별히 이 대목이 와 닿는다. 여기서 바오로사도는 신자 이름 하나하나를 열거하며 안부를 전하는 인사를 한다. 그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 내가 사랑하는 에패네토스, 여러분을 위하여 애를 많이 쓴 마리아,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코스와 유니아, 내가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암플리아투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협력자인 우르바노와 내가 사랑하는 스타키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펠레스, 나의 동포 헤로디온, 주님 안에 있는 나르키소스의 집안 식구들, 주님 안에서 애쓴 트리패나와 트리포사, 주님 안에서 애를 많이 쓴 사랑하는 페르시스, 주님 안에서 선택을 받은 루포스와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그의 어머니, 아싱크리토스, 플레곤, 헤르메스, 파트로바스, 헤르마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필롤로고스와 율리아, 네레우스와 그의 누이, 올림파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들….

 

이 많은 이름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는가. 난 바오로 사도의 영과 마음, 정신이 얼마나 맑고 투명한지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일일이 안부를 전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의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고 순수함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의 특징은 정신이 혼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잡다한 생각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다.

 

우린 세례 받고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신앙 안에서 감사하며 축복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진심으로 기도를 바쳐 주고 싶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우리는 과연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가. 바오로처럼 맑고 순수하게 살고 있는가. 신앙인이 된 후 나의 삶에 큰 도움을 준 분들을 다시 기억해 보자.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쳐 보자.

 

로마서가 끝났다. 방대한 바오로 사도 신학을 담은 로마서를 짧은 지면에 담는것이 쉽지 않았다. 로마서에 대한 깊은 영성적 해설을 해보려 했지만, 지면상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로마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새롭게 다가오는 서간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로마서를 통해 신앙의 참 의미를 내면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톨릭신문, 2007년 8월 12일,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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