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창세기 1-11장 : 오늘도 반복되는 창조 창세기는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 가운데서 첫 번째로 등장한다. 모세 오경이라 불리는 이 책들은 유다인들에게 널리 읽히던 율법서로서 신약성서로 치면 4복음서에 해당된다. 이 다섯 권의 책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70인역]할 때 역자들이 각 책의 중심 주제를 선택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시작, 기원을 나타낸 창세기, 탈출을 뜻하는 출애굽기, 사제 부족인 레위 지파의 법을 기록한 레위기, 군대의 수효 등을 밝힌 민수기, 율법을 요약한 신명기로 불리어졌다. 창세기 1-11장은 나머지 장(12-50장)과 완전히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태고사”라 불리는, 창조 때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인류의 탄생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저자는 이 사실들을 연대순으로 구분하지 않고 “세대”순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전체는 열 개의 “혈통”들(2,4; 5,l;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로 나뉘어 있고, 이 태고사에는 다섯 혈통이 들어있다. 즉 하늘과 땅의 창조(2,4-4,26), 아담의 혈통(5,1-6,8), 노아의 혈통(6,9-9,29), 노아의 아들들의 혈통(10,1-11,9), 셈의 혈통(11,10-26)이 그것이다. 여기서 “혈통”이라는 단어는 창세기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생명이라는 ‘씨앗’을 전해주는 것 말하자면 자손이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나무의 뿌리와 같다. 아담은 한 가계의 시조일 뿐 아니라 인류라는 나무 전체를 자라게 하는 뿌리인 셈이다. 그의 생애는 모든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잘못은 인류에게 “원죄”가 되고 있는 것이다. 라삐들은 “조상들의 삶이 후손들의 역사를 예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삶이 유다인들의 모든 역사를 앞서 표현하고 있으며, 후에 그리스도의 삶에서 모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조상에 있어 그 시조는 오직 창조 활동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으며, 하느님은 그 혈통이 계속되도록 확고한 기초를 놓으셨다. 창조가 혈통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지질학이나 고고학으로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다른 부분에도 드러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될 선택받은 백성의 역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역사는 학자들이 얘기하는 개념과 분명히 다르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1장을 보자. 만물은 태초(1,1)에 하느님의 말씀 즉 아들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 1,16-17). 그러므로 창조는 나중에 구원 활동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무한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20). 역사의 마지막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묵시 13,8)으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은 성서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그 영원한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장엄한 문장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말은 세상을 뒤엎거나 부족한 상태로 방치해 두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한다. 그것은 자기 완성이라는 맹목적인 충동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하느님 사랑에 기대게 한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히브리어로 위에 있는 것 - 영적 세계)뿐 아니라 “땅”(아래에 있는 것 - 물질 세계)도 하느님 사랑이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땅은 “모양도 없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아”(1,2)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하느님의 기운”은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물을 덮고 있는 어둠 속에서 어미새처럼 휘돌고 있다. 어둠에서 빛을 부를 때까지 휘도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인내 - 회개의 기회를 주는 - 를 보여주는 것이다(1,3). 어둠으로부터 떠오르는 모든 새 날은, “빛이 생겨라” 하실 때 나타난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을 반복하는 것이다. 역시 하느님 사랑에 장소를 제공하는 어둠은 낮의 빛을 계속 다시 태어나도록 해주는 “어머니”를 뜻하는 “밤”이라 불렸다(1,5). 하느님의 사랑이 이제 물을 변화시켜 위와 아래로 가르고(1,6-7), 아래에 있는 물을 모음으로써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한다(1,9). 사랑은 분리를 계속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1,27). 여자는 두 번째이지만, 남자가 그녀와 어울려 결합하기 위하여 어버이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2,24). 여기서 아들이 그의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죽으면서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을 포기한다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그 여자는 뱀의 꾐(3,4-7)에 빠진 첫 인간이 되는 한편 구원의 약속을 받는 첫 사람(3,15)도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담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4장)을 통해 그 높고 낮음의 분리를 계속한다. 아벨은 히브리 표현으로 “약한 자”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약한 자 안에서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카인은 아우를 죽여 망명자가 되고, 그의 아들들은 “재치있는 사람들”로서 세상에 문명을 가져온다(4,17. 20-22). 그러면서 치우침 없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들 사이에 육욕과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카인의 후손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한 첫 번째 사람으로서 그의 손에 복수의 칼이 들려 있음을 뽐내었다(4,23-24). “장사들, 하느님의 아들들”(6,1-4)이라 불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담의 그루터기에서 올라온 셋에게서 하느님의 은총은 새 가지가 시작된다(4,23). 이 후손들은 인간 문명의 진보에는 별 기여를 하지 못한다. 첫 후손은 에노스이며 약골이라는 의미이다(5,6). 이 이름은 약하디 약한 인간의 무력함을 가리킨다. “에노스(공동번역에는 ‘사람’)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공동번역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시편 8,4) 그는 야훼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며 예배한 사람이다. 셋의 후손 중 가장 두드러진 이는 아담의 7대 후손인 에녹이다. 그의 이름은 새벽에 신비스럽게 떠오르는 새 날을 가리킨다. 그는 “하느님과 함께”(5,22) 살았으며, “후대를 위하여 회개의 모범이 되었다”(집회 44,16). 셋의 가계의 맨 마지막은 노아이다. 그 당시 “거인들” 중에서 노아만은 유일하게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6,4.8). 이 표현은 예수가 세례받을 때 울려퍼진 소리와 같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이 표현은 노아의 사건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가리킨다. 그건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분명히 홍수와 관련된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홍수가 최초의 무질서(혼돈)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깨달아야 한다. 위에 있는 물과 아래에 있는 물이 마른 땅을 다시 덮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홍해가 갈라지고 모아지는 것도 바로 창조와 홍수의 재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기원전 8세기의 아시리아의 침공도 또 하나의 홍수이다(이사 8,7). 하지만 홍수(혼돈)가 결코 이기지는 못한다. 노아가 살아 남고, 모세가 홍해를 가르며, 아시리아의 침공과 바빌론 유배 때도 “남은 자들”이 약속된 땅을 찾게 된다. 구원 역사에서 혼돈이 유일하게 승리한 것처럼 보인 때가 있기는 하다.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구세주가 외치던 순간이 있었지만 혼돈이 결코 승리하지는 못했다. 창조의 첫 날 어둠에서 불러낸 빛처럼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서 세례와 견진으로 사실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11장은 우리에게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의 행적 즉 창조는 첫 번째 구원 행위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동성 편역) [경향잡지, 1988년 1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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