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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잠언, 전도서, 지혜서, 집회서: 지혜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3 조회수6,304 추천수2

[성서의 세계 - 구약] 잠언, 전도서, 지혜서, 집회서: 지혜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

 

 

지혜서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하나만을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4개의 성서 즉 잠언, 전도서, 지혜서, 집회서가 모두 지혜서들이다. 역사서(율법)나 예언서(말씀)와 달리 지혜서들은 개인의 삶에 관한 권고로서 “현자’들이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이를 활용하였다.

 

지혜서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책이 잠언집이다. 잠언집의 저자는 솔로몬이라고 한다(1,1; 10,1; 23,1).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한없는 슬기와 지혜를 주시어, 어느 누구도 그 지혜를 따를 수 없었으며, 솔로몬은 삼천 가지 잠언을 지었다는 것이다(1열왕 5,9-12 참조). 솔로몬이 여러 가지 잠언을 지었을 것이지만, 잠언집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잠언과 솔로몬 후대의 잠언들까지 모아 집대성해 놓았다. 오래된 두 가지 수집 부분(10,1-22,16 및 25,1-29,27)만이 실제로 솔로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잠언집의 저자를 솔로몬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현자”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제 더 이상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현재의 전도서 형태는 오직 기원전 4-3세기까지 소급될 수밖에 없다. 그 언어 또한 히브리 문학 전성 시대의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람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지혜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 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지혜서는 기원전 200년 이전에는 쓰여질 수가 없었다. 집회서는 기원전 190년부터 170년 사이에 시라의 아들 예수가 쓴 것이지만, 현재의 집회서는 기원전 120년경에 그 후손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현자의 권고는 평생에 걸친 체험의 완숙한 결실이다. 그것은 수많은 탐색과 사색의 열매이다. 지혜는 현자의 가슴 속에 그 거처를 마련한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견고한 마음의 일치를 보장하고 대변하는 왕은 탁월한 현자이다. 왕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지혜에 참여한다. 지혜는 본질적으로 우주적이다. 왕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초자연적인 질서의 일부라고 믿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자기 민족의 관습과 전통에만 국한되지 않고 에집트와 바빌론 사람들의 전통에까지 뻗쳐 나가며, 온세상 모든 나라에서 발견되는 지혜를 통합시킨다. 솔로몬은 세상 만물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어 영광스럽게 다스리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전형(前型)이다.

 

성서의 경전에 통합된 지혜는 인간의 단순한 창작물일 수 없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여 슬기를 받았다. 지혜는 인격의 핵심에 있는 내적 성향으로서 영속적인 덕이라 할 수 있다. 구약 성서에 있어서 마음이란 단순한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바로 인격의 핵심으로서 지혜의 자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부어 주신 참 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이루는 하느님의 지혜를 반영한다. 참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지혜가 이 가시적인 세계에서 보여 주는 징표들을 해독하게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눈을 주셨다”(집회 17,8). 현자는 창조의 책에 있는 “행간”(行間)을 읽을 수 있으며 그 심오한 의미를 간파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현자는 커다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솔로몬처럼 세상의 덫에 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지혜가 자라나는 근본은 오직 하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언 l,7).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무서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충실하게 섬기는 것이다. “주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사람은 힘이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생명의 샘이다”(잠언 14,26-27). 주님께 대한 두려움에서 자라나는 지혜는 사람의 마음 곧 인간 정신의 발전적인 변모다. 그러므로 지혜는 교육의 문제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곧 지혜이며 교육이다”(집회 1,27). 교육은 마음의 문제이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잠언 23,26 참조)는 이 권유는 지혜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거듭하는 초대이다. 지혜는 명령이 아니라 초대이다. “지혜가 일곱 기둥을 세워 제 집을 짓고 소를 잡고 술을 따라 손수 잔치를 베푼다. 시녀들을 내보내어 마을 언덕에서 외치게 한다. ‘어리석은 이여, 이리 들어오시오!’ 그리고 속없는 사람을 이렇게 초대한다.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빚은 술을 받아 마시지 않겠소? 복되게 살려거든 철없는 짓을 버리고 슬기로운 길로 나서 보시오!’”(잠언 9,1-5).

 

지혜의 이러한 초대는 저잣거리의 철없는 군중들을 부르는 것이다. 지혜는 세상의 속사에 휩싸여 허둥대는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외친다. 사람들의 마음에 쟁쟁하게 울리는 호소를 하여, 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고 또는 경고들은 모든 지혜 문학의 핵심을 이룬다. 전도서가 바로 그러한 권고로 이루어져 있다. 잠언집은 세상을 평화로이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만나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이루어 주는 길잡이다. 전도서는 설교자(대중 연사)의 말이다. 설교자는 대중의 그릇된 무사 안일을 흔들어 일깨우는 연설을 하여, 군중의 마음을 회의와 문제로 가득 채워 놓는다. 설교자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기준이 얼마나 의심스러운 것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북적대는 시장터에서 사람들을 한적한 곳으로 이끌어내, 부질없는 세상 잡사에 귀를 틀어막아 현자의 발 앞에 앉혀 두려고 한다. 현자는 사람들을 빛과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지혜서들은 모든 영성 생활의 기본 구조인 정화, 조명, 합일의 길을 이루고 있다.

 

정화의 길로 들어서라는 초대 곧 회개의 촉구인 전도서의 가르침을 들을 때, 우리는 즉시 설교자의 “회의주의”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서의 신성한 영역에 부당하게 기어들어 온 염세주의가 아니다. 설교자가 비웃고 단죄하는 것은 바로 텅빈 “자아”(ego)로 속절없이 온갖 데를 떠돌기만 하는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부질없는 수고와 걱정, 그 헛된 땀과 노력이다. 온갖 형태의 아집은 끊임없이 돌고도는 헛바람일 뿐이다. 인생 만사가 오로지 우리 자신들에게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한 모든 것은 권태에 빠져 들고 만다. “어차피 지혜가 많으면 괴로운 일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아지는 법이다”(전도 1,18). 향락(2장)도 부요(4장)도 사람들의 화려한 욕망을 채워 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헛되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바람만 쫓고 마는 것이다.

 

전도서의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둘째 부분(7,2-12,7)에서 긍정적인 결론으로 나아간다. 지혜와 선을 찾아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결국엔 모를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 지혜는 “착한 일을 하며 사는 슬기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9,1)을 아는 마음의 지식에 있다. 설교자가 한마디로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 그의 분부를 지켜라. 이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다”(12,13).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분부를 지키는 것, 이 올바른 인생 길이 바로 다른 지혜서들 곧 잠언집, 지혜서, 집회서의 목표이다.

 

지혜서들은 초심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쓰여졌다. 옛날 교회에서는 성서를 읽을 때에 지혜서들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지혜서들은 그 내용이 이해하기가 쉬운 까닭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에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성서에도 적용하고 있다. 성서란 수많은 책들로 이루어진 도서관과 같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지혜서들은 초심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짤막한 말로 이루어져 있다. 그건 장황한 교리 설명이나 복잡한 역사 기술이 아니다. 지혜서들의 많은 부분은 소담과 비유다. 또한 의인과 악인의 길과 그 운명을 대비시키기도 한다(잠언 10,1-15,9). 지혜와 어리석음은 생명과 죽음처럼 정반대되는 것이다(잠언 8,25-36). 이 잠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지혜서들이 가르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시하고 있다.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야훼께 빚을 주는 셈. 야훼께서 그 은혜를 갚아 주신다”(잠언 19,17; 17,5; 23,10-11). ‘주의 기도’가 지닌 단순성 또한 잠언의 기도에서 빛나고 있다. “허황한 거짓말을 않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야훼가 다 뭐냐’고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30,7-9).

 

지혜서들은 그 안에 담긴 온갖 훌륭한 상식들을 넘어서 드높은 관상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지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땅이 생기기 전, 깊은 바다가 생기기 전에,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잠언 8,22-3l 참조). 그러므로 지혜는 이 가시적인 창조의 의미를 인간의 눈앞에 열어 보여 준다. 관상의 놀라운 영역은 하느님께서 역사의 변천을 통하여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을 이끌어 가신 그 길을 통찰하는 관조다. 지혜서(10-19장)는 물론 집회서(44-50장)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어 당신 백성을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찬미하게 한다.

 

지혜서들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길이 보여 주는 처음과 끝의 신비, 즉 하느님 말씀의 신적 위격이 지닌 신비와 의인의 영원한 생명이 지닌 신비를 밝히지 않는다면 불완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지혜는 한갓 정신적인 표상이나 추상적인 사고 또는 지도 원리가 아니다. 지혜는 곧 하느님의 인격이다. “나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뛰놀며 날마다 그를 기쁘시게 해드렸다.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 즐거워 그가 만드신 땅 위에서 뛰놀았다”(잠언 8,30-31). 지혜의 내적 본질은 하느님 영광의 참 표상이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찬란한 광채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는 형상이다. 지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새롭게 한다”(지혜 7,26-27).

 

지혜의 최후 승리는 의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최후의 심판이다. 우주의 시작에서부터 마침에 이르기까지 전우주를 다스리는 지혜가 서 있다. 지혜는 현자들에 대한 길잡이나 의인들의 영원한 생명 그 이상의 것이다. 지혜는 세상의 죄악을 짊어지고 그 죄악을 없이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된다. 솔로몬의 지혜는 의인에 대한 상급과 어리석은 자에 대한 죽음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여기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우리 죄인들을 위한 “지혜와 정의, 성화와 구원”(1고린 1,30)이 되셨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대인 편역)

 

[경향잡지, 1989년 4월호, 다마수스 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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