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하느님이란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느님의 이름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여러 민족과 문화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저마다 달리 평가를 해왔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이름에 대해 무관심하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름이나 우리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이름은 관심 밖에 있다. 관심이 있다면 그 이름이 듣기에 좋으냐 하는 점일 뿐이다. 로마인들은 “이름이 전조가 되기를”(Nomen sit omen)이라는 라틴어 표현대로 이름을 존중했다. 로마인은 이름을 하나의 축복으로 간주했다. 성서의 세계에서는 이름이 더욱더 큰 가치를 지녔다. 이름을 축복으로 뿐만 아니라 그르침 없이 실현되어야 할 계획으로 여겼다. “그녀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21). 또한 이러한 표현도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태 16,18).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이 선택해야 할 지침과 수행할 과제를 가리켰다. 전인격, 성격, 부차적인 특성들이 이름과 관련되었고 그렇게 이해되었다. 어떤 이가 자신의 이름을 표명했을 때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알려졌다. 한편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일종의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경우는 우리의 사고 방식을 다소 벗어나는 것이나, 한 가지 예로 약간은 설명이 될 수 있다. 학교가 끝나 아이들이 한 무리가 되어 나의 창가를 지날 때 내게는 모두가 동일하다. 그러나 내가 그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그 애는 내 영역 내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애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러면 그 애는 동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묻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름을 알고 있음으로 해서 나는 그 애를 다소 나의 세력권 내에 두게 된다.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모세는 이름이 무엇이냐고 그분에게 물었다. 허브리인들의 눈에 이것은 대담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숨은 계시를 요청하는 것이었고 게다가 하느님과 그분의 보조적인 힘을 확실히 이용할 수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예외적인 질문을 허용하셨다. “나는 야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출애 6,2-3). 모세가 파라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거의 초인적인 사명을 띠고 에집트에 파견된 시점이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려 주신 때였다. 불꽃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장엄하게 다시 울려 나왔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일리라…….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 3,14-15). 이러한 설명에는 여기서 드러난 야훼라는 새로운 이름뿐만 아니라 “존재”라는 단어와의 그분의 내적 관계를 통한 그분의 선언도 내포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분의 제일 특성, 그분의 본질이 “존재”로 설명된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졌다. 팔레스티나 밖, 그리스 문화 한가운데서 산 히브리인들은 기원전 200년경에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기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이름을 “나는 있는 자다.”라는 표현으로 옮겼다. 이것은 참으로 하느님께 대한 훌륭한 묘사이긴 하나 라틴어역 성서에 받아들여지기는 불가능했다. 중세기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 하느님의 본성을 “순수 존재”로 묘사한 까닭에 “야훼”라는 이름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있는 분”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성서 해석은 그러므로 그리스 철학의 진술과 일치한다. 최근 십 년간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대한 어려움을 표출해 왔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과 “존재”와의 연관, 하물며 하느님 자신과 “존재”와의 관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리스어 번역에 있어서 이 표현이 지나치게 그리스적인 영향을 입지는 않았나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그리스인은 하느님을 “있는 분”으로, 침묵 속의 존재로 간주했다. 혹은 이른바 부동(不動)의 원동력으로 간주했다. “있는 분”으로서의 하느님은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그리스적인 표현일는지도 모른다.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과 인식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즉 역사의 과정 속에서의 하느님의 작용 안에서 이끌어 내고 있는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하느님 개념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평온히 계신 분”과는 정반대인 분이다. 오히려 그분은 도처에 나타나시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시어 구원을 주시는 “활동적인”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오늘날의 해석학자들은 그리스역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활발하게 현존하시는 분”으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모세의 다소 불명확한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평온하게 대답하신다. “나는 활발하게 현존하는 이다.” 그리고 “활발하게 현존하시는 분이 나를 너에게 보내셨다.” 이러한 현존에 대한 신뢰 속에서 모세와 백성은 출애굽에 직면해야 했다. 이것이 실패할 기미가 있다면 하느님의 활동적인 현존은 그분의 탁월한 행동으로 드러날 것이다. 에집트의 재앙 현대 에집트는 내외 정세에 있어서 적어도 상당 부분 꽤 변덕스런 나일강의 영향을 받고 있다. 길이 6500킬로미터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이 강은 에집트에 삶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 강줄기를 따라서 비가 전혀 오지 않기 때문에(델타 지역은 별개로 치고), 땅의 소출은 강물의 수위(水位)에 달려 있다. 나일강이 적시에 잠에서 깨어나 경작하기에 알맞게 땅을 적실 때는 어디든지 비옥하게 만든다. 반면에 범람이 너무 빨리 혹은 지나치게 격렬하게 닥치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지나치게 낮은 수위도 국가적인 재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에집트는 나일 강물을 다스리고 국가 번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몹시 웅장한 장벽인 아스완 댐으로 영국인들이 실현했던 것을 능가하려고 애써 왔다. 인간이 오늘날처럼 자연에 대해 아직 막강한 힘을 떨치지 못했던 고대에 에집트 왕국은 나일강의 수위로부터 오늘날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기에 흉년이 잦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이를 종종 이용하셨다. 실제로 성서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에서 7년간의 흉년을 상기하고 있으며 출애굽기에서는 작은 항목별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5월이 되면 나일강의 수위는 가장 낮아진다. 6월 - 한때 이 달은 역년(歷年)의 시초였다 - 중순에는 불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강물은 흔히 운반된 진흙 때문에 빨갛게 되고, 어떤 때는 풀 찌꺼기나 쉽쓸려 온 초목 때문에 푸르게 된다. 그러나 강물은 대체로 언제나 마실 수 있다. 8월에 계속 불어나기 시작한 나일강은 9월에 가장 높은 수위에 이른다. 에집트의 저지대가 온통 범람하는 것은 이때다. 가을에는 강물이 아주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봄에 그 수위가 가장 낮아진다. 에집트의 재앙은 분명히 이 같은 수위와 관계 있다. 나일강과 에집트 전체의 물이 붉어지는 것으로 재앙은 시작된다. 개구리, 모기 등의 재앙은 범람을 가리킨다. 가축들의 질병과 피부병은 적어도 간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 분명하다. 메뚜기의 재앙과 온 나라를 뒤덮은 어둠은 이상 건조기를 암시한다. 한발에 곯은 메뚜기들은 봄에 먹이를 찾아 나서고 사막의 메마른 바람은 3월부터 모래 구름을 일으켜, 때로는 태양을 가릴 정도가 된다. 재앙은 나일강과 관련되고 분명히 에집트 땅의 전형적으로 고유한 특색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평가한다. 성서의 신적 기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재앙을 단지 에집트에 흔한 일이라고 본다. 반면에 믿음을 가진 해석학자들은 예컨대 나일의 무익한 붉은 강물과 거기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결과, 혹은 같은 해에 그 모든 재앙들이 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는 사실과 같은 확실한 현상들에서 예외적인 특징을 주목한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의 개입을 원인으로 지적하기 위하여 재앙의 시기, 기간 그리고 가혹함 등의 예외성에 관해 숙고한다. 재앙에 정통한 한 연구가 보여주듯이, 하느님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그분은 수많은 자연 현상을 안배하시어 누구에게나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셨다. 출애굽 이야기에 의하면, 실제로 재앙들은 에집트와 파라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충분치는 못했다. 파라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열 번째의 재앙이 필요했다. 그러나 재앙이 이스라엘에 마친 인상은 백성들의 기억 속에 정확하게 계속 살아 있었고, 오늘날도 성서를 읽고 시편을 노래하는 가운데 다시 반향되고 있다. 이러한 독서와 이러한 노래에서 오늘날의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께서 자연 현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과 보호하시는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동반하시는 아버지시라는 사실이 환기된다. 하느님의 권능과 섭리는 이러한 서사적인 기사가 모든 백성을 위하여 노래하는 영원한 진리다. 위에 말한 재앙들에는 이러한 것이 덧붙을 수 있다. 즉 그것들은 실현된 시기와 기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통상적인 재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불가사의한 사실” 혹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초자연적인 사실”이라고 부른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9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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