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구약] 하느님의 충실한 사절 호세아와 이사야 하느님의 명령을 통한 실패 추방된 아모스가 기록을 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북왕국에 부친 반면에, 다른 예언자 하나가 같은 왕국에서 그 사명을 시작했다. 바로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다. 이 예언자의 소명은 몹시 이상한 과정을 지니고 있고, 그 이야기를 읽는 현대의 많은 독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서를 덮어 버리고 싶어한다. 호세아와 주님의 최초의 만남(호세 1,2)은 그의 소명에 대한 환시를, 즉 호세아가 하느님께 당신의 백성을 위한 예언자가 되라는 임무를 받은 신현을 암시하는 듯하다. “야훼께서 호세아를 시켜 하신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 나라가 야훼를 저버리고 음란을 피우고 있구나.’ 호세아는 야훼께 이 말씀을 받고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았다”(호세 1,2-3). 자연스럽게 나오는 독자의 첫 번째 반응은, 예언자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면, 그에게 주어진 명령에 대한 일종의 반감이다. 즉 하느님이 그와 같은 일을 명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다. 그처럼 “거의 절망적인” 질문에 대해 아주 다양한 설명들이 서로 충돌하며, 모든 설명들이 하느님에 의해 의도된 동기, 즉 인내와 동정에 간신히 이른다. 이처럼 어려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한데 이 설명으로 호세아의 예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몹시 냉혹한 표현으로 (그리고 라틴어 번역은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에 대한 확실한 원인이 되었는데)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읽을 때 그 명령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으로 들린다. 즉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남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그 경우 호세아는 부정한 여인에게서 사생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임무는 모든 히브리적인 가르침과 모순이 되고, 나아가 그러한 일을 행할 경우 예언지는 죽음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레위 20,10; 신명 22,22). 따라서 이 이야기는 보다 관대한 설명을 요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진술 자체를 조사하는 일이 될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그것을 주의 깊게 살펴볼 때, 호세아가 결혼해야 하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고 불리지 않고 바람기 있는, 즉 음란한 여자라고 불렸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그녀는 행실이 방탕하기는 하였어도 결혼한 여자는 아니었다. 이 여자의 변덕스러움은, 비록 지극히 위험하기는 해도, 결혼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이는 슬픈 장래의 전조이다.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했다. 사실 음란한 욕망 속에서 고멜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고 그들에게서 구애를 받았다. 그러한 낙담 뒤에 호세아는 하느님께 자기의 아내를 새로운 사랑으로 다시 차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 - 즉 바알의 우상 식탁 - 나 좋아하는 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 주어라’”(호세 3,1). 이러한 비교에서 예언자와 예언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발견된다. 호세아는 그의 파멸적인 결혼으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표지요 상징이 된다. 예언자가 방종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듯, 하느님께서는 고멜처럼 변덕스럽고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일치를 이루신다. 그러한 슬픈 결혼은 백성을 위해 생생한 설교가 된다.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지속되면서, 모든 히브리인으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불안하게 여기고 반성하게 해야 할 설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이 모든 설교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 이상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여러 해 전에 호세아와 고멜에서 출발한 설교는 새로운 긴장을 받아들여야 했고 절정에 이르러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탄생과 아이들에게 붙여진 낯설지만 의미 있는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아들은 하느님의 명을 통해 “이즈르엘”이라 불리었다. “…… 오래지 않아 예후가 이즈르엘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죽인 죄값을 예후 왕조에 갚아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킬 것”(호세 1,4)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이는 “천더기”라고 불리었다. 왜냐하면 “다시는 이스라엘 가문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지 않을 것”(1,6)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버린 자식”이라 불리었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미 나의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아니다.”(1,9)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 이름이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과 질책이 된 것은 분명하다. 호세아의 메시지의 절정은 도망간 여인으로 인한 고통, 그녀를 다시 얻기 위해 참아 내야 할 벌 그리고 마지막 화해에 있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그의 사랑은 변절자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반영이다. 호세아의 치욕과 실패는 하느님의 분명하고 강한 질책을 담고 있으나 또한 위안을 주는 약속도 담고 있다. 그의 삶은 이스라엘이 전부는 아니라도 언제나 선택된 백성, 하느님의 신부(新婦)였다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드러내고 환기시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정력적이고 왕다운 웅변가 이사야라는 이름은 가장 중요한 성서 가운데 하나, 일련의 예언서들 가운데 첫째요 가장 중요한 책을 당연히 생각나게 하나,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예언적 인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이사야는 성서에서 유일하게 하느님의 예언자요 사절로 묘사된다. 우리는 그의 성소와 그의 예언적 활동을 분명히 읽을 수 있으나, 그의 탄생과 혈통 그리고 그의 숨겨진 삶과 그의 죽음에 대해선 아무것도 읽지 못한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왕가의 자손이고 나아가 다윗 가문의 왕자라고 한다. 훨씬 후대의 어떤 유다 전승은 그를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796년부터 768년까지 다스렸던 아마지야 왕의 동생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빛나는 기원에 대한 입증은 예언 자체에서, 즉 언어의 형태와 고상함 그리고 표현의 장중함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사야가 예루살렘의 귀족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의 예언을 읽는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도시의 삶에서 얻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집과 거리, 성벽과 탑에 대하여 말한다. 그의 관심사는 거의 대도시의 삶에 집약된다. 게다가 그는 상류 계급의 관습을 알고 있고, 예루살렘 귀족들의 집, 의복, 장식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나라 전체를 마치 예루살렘을 보고 묘사하듯 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예루살렘의 운명, 영광, 악습은 전국가 생활의 종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가 혈통이 의심스럽다면, 적어도 그가 예루살렘 궁전과 성전의 그늘에서 살았다고 결론내릴 필요는 있다. 어쨌든 그는 성전의 홀에서 예언적 소명의 환시를 받는다.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이사 6,1-4). 예루살렘의 귀족 계급은 수도의 성소에서 하느님과 만났다. 이사야는 단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부름을 받은 유일한 예언자일 뿐 아니라 또한 자발적으로 자신을 바친 유일한 예언자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부르셨을 때 구실을 대고 빠져 나가려고 애썼다(예레 1,6). 모세는 그의 형 아론이 자기 대신 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출애 4,10). 오로지 이사야만이 임무를 열망 속에 받아들였다. “그때 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다”(이사 6,8). 그는 자기가 불리는 순간에 망설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태연하게 임무를 받아들였고, 태연하게 백성과 왕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그들의 경고와 위협에 얼굴을 내밀었으며, 나아가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한 재난이 일어난다 하여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기원전 735년에 아람과 북왕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고 아하즈 왕을 위협했을 때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은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렸다”(7,2).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이사야는 “표백물 건조장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 수로 끝에서 검열을 하고 있던 왕 앞에 용기 있게 나타났다. 이 물은 중대한 관심사였다. 거기에는 군대와 시민의 생명이 달려 있었다. 오로지 이사야만이 이 일을 하찮고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했고, 아하즈에게 차분하게 있으라면서 “연기 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에 불과한 것”에 놀라지 말고 정신을 잃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포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이사 7,4). 훨씬 뒤의 세대, 정확하게는 히즈키야 치세 때 예루살렘은 아시리아인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이사야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왔고, 다시 한 번 그의 태연 자약함이 드러났다. 히즈키야가 상당히 허약해져서 죽어 갈 때 이사야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태연하게 그의 말이 올려 나왔다. “너의 왕실에 마지막 유시를 내려 기강을 바로잡아라. 너는 곧 죽게 될 것이며 다시 회복되지 못하리라”(이사38,1). 그리고 하느님께서 히즈키야의 기도를 수락하셨을 때,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절로서 선포하게 된다. “네 기도를 내가 들었고,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내가 너의 수명을 십오 년 더 연장시켜 주리라”(이사 38,5). 백성들 앞에서의 그려한 태연함과 그러한 초월적 힘이 단지 그의 혈통 때문일 수 있겠는가? 그에게 그러한 귀족적 우월감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신적인 접촉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차분한 확실함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이사야는 단지 왕가의 연설가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의 지각있는 예언자였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l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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