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그리스도를 가리킨 손가락 : 요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1947년 베두인족의 한 목자가 유다 광야의 한 동굴에서 다소의 두루마리를 발견한 순간부터, 그리고 이 두루마리가 몇몇 학자들의 손에 들어간 때부터 수세기 동안 침묵을 지켰던 광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발굴은 상대적으로 미소한 숫자의 두루마리로 제한되었으나 모두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고 거의 완전한 것이었다. 뒤이은 발굴들은 막대한 양의 기록들을 빛 보게 했으나 그 대부분이 내용을 확인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작은 단편들로 남아 있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완전한 상태로든 단편적인 상태로든 발견된 많은 기록들에 의해 일종의 수도원 도서관이 발굴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동굴의 주변에서 어쨌든 수도원 건물의 폐허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한 탐사를 하게 되었다. 꿈란의 가까운 언덕에서 발굴이 이루어졌고, 결국 건물 전체의 폐허가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보아 수도원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집회를 위한 큰 방, 공동 식당, 부엌, 도서관의 두루마리가 제작된 연구실, 몇 개의 작업장, 상당히 큰 다양한 목욕탕, 그리고 수도원 묘지가 확인되었다. 앞서 말한 건물의 일부는 기원전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비록 짧은 공백 기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기원후 1세기 혹은 2세기까지 전부가 거주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이전의 히브리 수도원 공동체로 간주했다. 발견된 두루마리들 가운데서 이른바 공동체의 ‘생활 규칙서’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수도자들의 이상과 생활 방식, 즉 히브리의 종교적 이상을 추론할 수 있다. 상황에 압박을 받은 이 이상주의자들은 요르단강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거의 정점에 있는, 유다의 황량한 광야의 고독과 침묵 가운데서 외적인 희생 없이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떨어져 있었다. 예리고만 빼고는 모든 생활이 불가능하고, 사해 연안에 있으면서 이미 수세기 전부터 음울한 침묵이 지배하는 이 광야에서 고대의 수도원적인 이상은 우리 현대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구약 성서로부터만 그들의 열정을 끌어내야 했던 이 고행자들의 냉엄하고 희생적인 삶은 오늘의 인간에게 낯설게 나타난다. 그것이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다. 그러나 그의 곁에서 이 수도원 공동체의 다양한 기록들이, 특히 외경과 고대의 성서 두루마리들이 다서 울리고 있다. 이 기록들 안에서 광야는 참으로 우리 시대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 동일한 광야에서 그리고 거의 같은 지점에서 대림의 목소리, 요한 세례자가 부각된다. 그의 인격 안에서 광야는 고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요르단강 주변의 모든 지방과 온 예루살렘이 그의 소리를 들으려고 달려왔다. 그들은 열광적이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하였으며 세례자가 바로 누구인지 알고 싶어했다. 그의 온 사명과 그의 전존재는 그의 독특한 응답으로 이렇게 설명되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요한 1,23). 유다 광야에서의 발굴은 세례자의 모습에 새로운 빛을 던졌다. 그가 꿈란과 접촉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는 사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출현한다. 또한 그의 삶은 꿈란의 이상과 유사성을 지닌다. 광야의 수도자들 역시 메뚜기를 먹었고 포도주를 삼갔다는 사실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도 베두인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비야(Abia)의 사제 계급의 아들이 성전에서의 봉사보다 광야를 선호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눈에 띈다. 그는 은둔생활을 하기 위하여 아직 어렸을 때에 광야에 갔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미 그보다 먼저 광야를 이상으로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인도되었는가? 다음의 가정이 더 그럴듯한 것으로 보인다. 꿈란의 이상과 처음으로 접촉한 뒤에 요한이 거기서 떨어져 나갔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사실 예수가 출현할 때 요한은 이미 자신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세례는 수도원 공동체에서 사용되던 것과 다른 내용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는 그에게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전한다. 그러나 그가 단지 작은 제자 집단만 데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몇은 후에 예수의 추종자로 넘어간다. 따라서 유사성과 차이점은 초기에 요한이 수도원적 이상과 접촉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 최초의 접촉 후에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려오고,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된다. 요한의 세례 요한의 모습이 엄격하게 유다적인 공동체와 그리스도 공동체 사이의 통로 역할을 하듯이 - 요한은 그리스도를 환기시키고 가리킨 소리요 손가락이었다. - 그의 세례는 구약의 세례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세례에 길을 마련하는 과도기의 현상이다. 꿈란 공동체에서도, 수도원의 폐허 주변과 또한 그 내부에서 아직도 눈에 띄는 다양한 크기의 많은 목욕탕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듯이, 세례를 알고 있었다. 건조하고 무더운 나라에서 우기(雨期)에 고원의 “와디”(wadi)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여러 개의 우물에 모으려고 애쓰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모든 저장소가 커다란 돌 계단으로 마련되어 있어 그곳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그 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 물로 “내려가는 것”은, 우리 손에까지 들어온 “생활 규칙서”가 확실히 드러내고 있듯이,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것은 영혼의 정화를 의미했다. “생활 규칙서”는 죄로부터의 세정(洗淨), 정화수를 통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에 대해서 말한다. 이 외적인 정화는 그러나 내적인 정리를 요구했다. “그 죄악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화되지 못하리라.” 나아가, 회개하지 않으면 물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다. 그러한 의도에서 의식적인 세정은 꿈란 공동체에서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가깝고 먼 전(全)중동에서는 이미 먼 옛날부터 목욕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전례적인 정화에 대한 그리스적인 표현들이 기원전 5세기부터 있었고, 이집트적인 표현은 기원전 7세기부터, 바빌론적인 표현은 기원전 2500년부터 있었다. 나일, 유프라테스, 갠지스처럼 큰 강들은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그러한 인간적인 경향을 표현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내적으로 납득하는 모든 인간은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원의를 마음속에 갖고 있다. 그러한 원의는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표현되며, 옛날에 대한 정화를 잘 표현하고 쇄신의 기회를 주는 이러한 행동들 가운데 하나는 다소 완전한 세정이다. 잘못에 대한 확인이 더욱 잦을 경우, 쉽게 자주 정화에로 나아간다. 구약 성서는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인 세정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그러한 것들은 불순한 사람을 깨끗한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 그런데 상징주의에로 상당히 기울어 있는 중동인들은 쉽게 그러한 행위로 표현한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꿈란의 종교 공동체에서 새로운 생활의 초기에 세정이 시작의 - 그리스도교가 인식하는 것처럼 세례의 - 의미를 가졌는지 밝혀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당시의 다른 공동체들이나 유다 종파의 경우에도 그러한 “결정적인 세례”를 확실히 단언할 수 없다. 세례자 요한이 죄에 대한 용서로 회개의 세례를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유다인은 곧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아마도 점령군의 비(非)유다 군인들은 세례자에게 생활을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베풀도록 맡긴 사람은 누구나가, 분명히 과거와 함께 그것을 끊을 작정이었다. 위선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례자에게 거절당했다. 세례자는 바로 꿈란의 생활 규범과 마찬가지로 의향의 청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세례에 관한 그의 설교에 의거해 요한이 꿈란의 수도원 생활을 알고 있었거나 참여했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세례는 널리 퍼져 있었고,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자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세례 의식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에 있어서 새롭고 독특한 것은 그의 결정적인 성격이었다. 즉 요한이 원한 침례로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첫인상에 세례자의 세례는 단 한번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맞다면 그의 세례는 그리스도교 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와 같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비롯했느냐? 하늘에서 비롯했느냐, 사람들에게서 비롯했느냐?’(마태 21,25)는 예수의 질문에 하늘에서 비롯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보편적으로 인간다운 표명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그리스도교 세례에 대한 준비가 된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6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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