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선과 악을 갈라놓으시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선과 악 늦여름에 우리는 밀 베기가 끝난 밭에 쌓아 올려진 밀단을 본다. 이 밭은 복음서의 전원적인 비유의 틀이 된다. 그러한 비유들은 흔히 추수하는 순간에 끝난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드러났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주인의 대답이 ‘원수가 그랬구나!’ 하였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을 뽑아 버릴까요? 하고 종들이 다시 묻자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 들이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마태 13,24-30) 오늘날의 이스라엘인은 가장 현대적인 농기계로 농작물을 수확하는 반면에, 팔레스티나의 요르단 지역의 아랍식 추수 방식은 여전히 그리스도 시대와 똑같은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적은 양을 수확하기 위해 여전히 낫질을 하고 손으로 밀에서 독보리를 쉽게 골라낼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아랍의 밭은 여전히 언급된 비유의 밭과 같다. 언젠가, 다른 성서에 관한 일들 가운데서 앞서 말한 비유를 설명하면서, 한 농학자가 위와 같은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에게 환기시키려고 한 적이 있다. 원시적인 농장에서는 추수기에 밀에서 독보리를 식별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농학자에 의하면, 독보리를 뿌리뽑는 이 방식은 그만큼 일이 더뎌지기 때문에 어느 농부에게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농업적인 면에서 볼 때 그러한 비유는 그에게 비현실적인 일로 보였다. 그 경우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물론 우리는 잡초를 제거할 수 있는 현대적인 화학적 수단을 잠시 제쳐놓아야 한다. 과거에는 모든 풀을 손으로 뽑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팔레스티나에는 ‘돌릭’(Lolium temulentum)이라는 일종의 나쁜 풀이 있다. 그것은 밀과 아주 흡사하여 싹이 틀 때는 밀에서 돌릭을 가려내기가 몹시 어렵다. 이삭이 나타나기 시작해야 조금씩 구분할 수 있으나, 돌릭의 뿌리가 밀의 뿌리보다 더 잘 뻗어 나기 때문에 밀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뽑아 버릴 수 없다. 이 비유를 이야기하는 이는 견문이 넓은 사람이었으며, 아마도 그러한 사실이 예수 시대의 농부들에게는 흔히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다. 한참 성장해서야 밀과 구별되는 독보리는 추수날이 아니면 근절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밀을 추수하는 같은 날, 밀이 창고로 옮겨지기 전에 불에 태워졌다. 복음서는 비유에 대한 설명을 전해준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이 끝나는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마태 13,37-39). 추수하는 날은 밀과 독보리를 분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분리요 마지막 심판이다. 그러나 그날까지 나라의 아들들은 하느님의 밭에서 악의 아들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비록 선과 악의 동거가 어려움과 스캔들을 가져올지라도 선한 사람들 때문에 악한 사람들은 제거될 것이나 나라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할 것이다. 같은 생각은 “바다에 쳐서 온갖 물고기들을 끌어올리는” 그물의 비유에서도 표현된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는 그것을 해안으로 끌어올려 자리잡고 앉아서 좋은 물고기들을 바구니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팽개친다. 그런 일이 세상의 끝날에 일어날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낼 것이다’(마태 13,47-49).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사려 깊은 처녀들은 준비성 없는 다른 처녀들과 함께 주인을 기다린다. 잔치가 시작될 때 신랑은 어리석은 다섯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마태 25,12). 이는 결정적인 거절을 뜻한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실제로 선과 악이 동거하는데, 어떤 이들은 나라에서 떨어져 나간다. 스캔들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멀리하고자 하나 동거는 필수적이다. 오직 마지막 날에야 천사들이나 주님 친히 선한 이들을 악한 이들로부터 갈라놓으실 것이다. “너는 베드로다”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의 대략 70미터 높이의 둥근 천장을 보면 금색의 모자이크로 된 마태오 복음의 본문(16,18)을 읽게 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베드로의 무덤 위 높은 곳에 쓰여 있는 이 말씀은 바티칸 대성전이 그 위엄 있는 둥근 천장과 함께 웅변적인 상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진 것처럼 보편 교회도 그의 후계자, 즉 로마에 그 자리를 두고 있는 교황 안에, 살아 있는 베드로의 권위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조금 전에 인용한 예수의 말씀이 고대 레바논의 산악 지대 맞은편에 위치한 도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선포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성지도 이곳처럼 그러한 말씀을 이해하기에 그만큼 의미 있는 자연적인 특색을 지닌 곳이 없다. 사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렇듯이, 높은 산이 발견되지 않고 바위가 많으나 어떤 풍경도 그렇게 거칠지 않다. 팔레스티나에 살든지 이곳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암석 지역을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적 나약함과 큰 대조를 이루는 웅대한 자연에 인상을 받는다. 예수께서 교회의 변할 수 없는 기초로 세우는 바위가 되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베드로는 얼마나 전율했을까! 예수의 말씀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의 환경과 놀랍게도 들어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의 많은 해석학자들은 로마를 거슬러 싸우면서 이 구절의 참 모습에 대해 의심을 품어 왔다. 그들의 의견에 의하면 그 본문이 마르코 복음(8,27-30)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라는 것이다. 거기에서도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로 향하는 여행과 베드로의 고백이 언급되고 있고, 마찬가지로 예수의 약속이 따라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약속의 속행, 열쇠의 양도 그리고 매고 푸는 권한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와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다. 적어도 결론은 그것이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선포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 대한 과거의 공격에서는, 후대에 로마 교회가 베드로에 대한 약속을 스스로 구성했고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권위의 이름을 빌려 다른 교회 위에 자신의 주도권을 설정하기 위하여 마태오 복음에 교활하게 그 구절을 끼워 넣었다는 비난이 지배적이었다. 베드로에 대한 약속은 따라서 예수의 말씀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교활한 위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 비판의 발전 덕분에 후대에 만들어진 모든 삽입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신약 성서 전체의 본문을 과학적으로 보증할 수 있게 되자 이른바 ‘반석’(마태 16,17-19) 본문은 신빙성 있고 참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게다가 개념들, 특히 매고 푸는 개념들, 기간의 구조 - 병행하여 배치된 구절들을 주목해야 한다 - 그리고 특히 ‘반석’에 관한 말씀의 유희 - 예수와 사도들의 언어에서만 이해되는 유희 - 가 모두 팔레스티나적인 기원을 드러내는 요소들이다. 본문이 로마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추정된 삽입이라는 논증이 퇴색하자 로마의 수위권에 대한 투쟁에서 전략을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본문의 진정성이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공격의 방향은, 예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신앙 때문에 베드로를 칭찬하셨다는 전통적인 해석으로 돌려졌다. 이러한 신앙이 동기가 되어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반석’이고, 신앙의 반석 위에 - 베드로의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 교회가 세워진다. 반석은 따라서 신앙이고 베드로는 다만 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공격을 ‘너는 반석이다.”라는 본문 혹은 시몬의 새로운 이름에 호소하여 반격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시도도 바로 프로테스탄트측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1952년에 바젤 대학교의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교수는 “성 베드로”라는 인상적인 책을 냈다. 그는 우선 마태오의 본문(16,17-19)이 진정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반석’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해석이 부적절하고 베드로라는 인물이 틀림없이 교회의 기초라는 것을 보게 한다. 교회의 조직과 존속을 보살펴야 하는 것은 베드로의 권위다. 애석하게도 쿨만은 이 수위권이 영속적으로 베드로에게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도주한 순간부터 - “그 뒤 그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사도 12,17) - 수위권은 묵계적으로 야고보에게로 넘어갔다. 게다가 그것은 야고보의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치의 방향으로 여운을 남긴 진보 때문에 쿨만에게 감사하는 반면에, 성서에 나타난 수위권에 대한 인식이 또한 베드로가 죽은 도시 로마에서 현존하는 수위권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1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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