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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천천히 드러나는 메시아의 표상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578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천천히 드러나는 메시아의 표상

 

 

예수의 금지령

 

예수의 선(善)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고, 누구에게나 상당히 설득력 있게 표현된다. 그분의 모범은 모방하고 싶은 열정과 바람을 자극한다. 따라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셨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입에서 금지령을 듣는 것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확한 금지들이 복음과 예수의 말씀 자체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예수의 금지령”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증인인 세 명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야이로와 그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소녀를 부활시켰을 때 스승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다”(마르 5,43). 그것으로 지극히 행복한 부모에게 진정한 금지령이 부과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웃들과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되었다.

 

유사한 금지령은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도 받았다. “예수께서 곧 그를 보내시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르 l,43-44). 그러 나 어떤 상황에서 말을 금하는 명령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예수께서는…… ‘에파타’ 즉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굳은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 그러나 엄명하실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마르 7,34-36).

 

예수께서 이러한 금지령을 악마들에게 부과하신 것은 쉽게 이해된다(마르 l,34; 3,12). 악마들은 메시아적 메시지의 적합한 예고자들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열두 사도에게 예수의 업적에 대한 감탄과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나아가 침묵을 지키라는 명이 내려질 때, 차라리 불가사의 하다고 말해야 할 만큼 금지령의 동기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 점에 관하여 처음의 세 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예수의 금지령이 어째서 마르코 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지 알게 된다. 거지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신중하게 결정한다. 그 결과 어떤 해석학자들은 그것이 철저하게 마르코의 개인적인 창작물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그의 특징으로 본다.

 

이러한 고려에서 곧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첫째는 예수 자신이 이러한 금지령을 분명하게 그리고 그토록 자주 부과하셨는가이고, 둘째는 예수께서 아니면 우연히 복음서 저자가 진정으로 지녔던 의향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톨릭적인 해석학에서는 첫번째 질문에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다. 사실 몇몇 믿지 않는 해석학자들만이 마르코가 이러한 생각을 품고 그것을 예수의 입에 담았으며, 그런 경우에 복음서 저자는 예수자신에 대한 올바른 묘사를 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게다가 믿는 이에게는 이러한 결론이 감도(感導)의 개념과 상충하고, 따라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세 복음서 저자를 고려해 보면,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군중의 열정을 분명히 잠재우고자 하셨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오히려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도 마르코가 이러한 자료를 강조했고 사실에 속하는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였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부과하신 비밀 엄수는 마르코의 특징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으로 두번째 질문은 상당히 중대한 문제가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비밀 엄수를 명하신 예수께서는 무엇을 의도하고 계실까?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은 그분의 메시아성에 대한 떠들썩한 입증이었고, 논리적으로 누구나 마음속으로 열정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역설(逆說)이 되지 않았는가?

 

이 명백한 역설에 대하여 우리는 단 하나의 설명을 할 수 있다.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은 오로지 기적을 행하는 데만 있지 않고 오로지 교리를 주는 데만 있지도 않다. 그분의 사명의 절정은 - 도처에서 “……야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 수난과 죽음이었다.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구세주는 고통받는 메시아였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때때로 히브리 백성의 정신과 대립되었고, 그것을 실제로 그 모든 충만함 안에서 제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것은 점차적으로 제시되었다. 오로지 메시아적 국면을 위해서는, 군중의 환호가 메시아에 대한 전적인 수락에 장애가 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예수의 엄한 금지령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실제로 그러한 금지령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엄명하실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마르 7,36). 어쩌면 이 역시 이스라엘의 맹목에 이바지했을까?

 

마지막으로 어째서 바로 마르코가 이러한 금지령에 관해 그렇게 명백하게 기록했느냐 하고 여전히 질문한다면 이렇게 답변해야 한다. 마르코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역사적인 예수, 아직 부활하시지 않은 메시아, 즉 점차적으로 드러나시는 메시아의 표상을 주고자 하였지 때문이라고.

 

 

예수의 친척들

 

복음서 저자 마르코는, 이미 여러 차례 암시했듯이, 마태오나 루가와는 조금은 다른 수법으로 예수에 대해 기록했다. 그는 예수의 현현(顯現)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확실히 선호한다. 게다가 그는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할 때 훨씬 더 생생한 양식을 지닌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서 예수의 친척들에 관한, 특히 메시아의 공생활, 그 성공과 명백한 패배에 대한 그들의 반응들에 관한 짧고 치밀한 소식들을 발견한다 해도 놀라운 일일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소식들 가운데 하나는 마르코 복음 3장 20-21절에서 발견된다. “(예수께서)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그분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서 그분을 붙들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가 정신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짤막한 묘사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상한 인상을 준다. 복음서들에서는 도처에서 예수에 대한 조용한 묘사가 발견되고, 그분의 현존으로부터 고요함과 평온함이 나오는 것을 보는 반면에 여기서는 정반대가 확인된다. 그리고 이 소식의 진실성에 대해 거의 의심이 갈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체면을 짝아 내릴 수도 있는 예가치 많은 이상한 일은 바로 진실성에 대한 보증이 된다. 아주 후대의 저자가 -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에 상응하는 비전을 지녔던 - 비슷한 사실을 꾸며 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 때문에 바로 그가 그런 일을 꾸며 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동정심을 일으키는 그러한 자료는 바로 예수의 공생활에서 나오는 가혹한 실재의 비화(秘話)이다.

 

수많은 번역들은 예수를 “붙잡고자” 하였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두고 있지만, 본문은 그 이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붙잡음”에 대해 사용되는 그리스어는 세례자 요한의 체포(마르 6,17), 예수를 잡으려는 대사제들과 학자들의 시도(마르 12,12) 그러고 같은 예수를 그분의 수난 전날에 체포하여 끌고 갈 때(마르 14,44.46)에도 채택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구절의 경우에도 예수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고 폭력적으로 끌고 가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 용어를 이해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상한 것은 앞에서 지적된 행동하는 방식의 동기다. 즉 예수는 당선의 활동에 대해 더 이상 책임질 수도 없었고 그리스 말의 올바른 의미에 따라, 미친 사람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묘사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놀라게 하는 것은 체포의 시도와 책임이 바로 예수의 친척들에게로 돌려진다는 점이다. 이 친척들은 총칭적인 방식으로 지적되었으나, 확실히 그것으로 마르코 복음 3장 31절에 언급되어 있는 사람들 집단 이외에 다른 이들이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거기서 그들은 그들 가운데 있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군중들 사이를 뚫고 그분에게로 접근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복음서들 안에는 우리가 예수의 친척들의 부정적이고 거슬리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다른 본문도 있다. 그것은 네번째 복음서의 본문으로,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요한 7,5)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손한 태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민 눈에 띄지 않는 의심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의심 없이 예수와 직면해서 극렬한 태도를 표현하는 마르코의 본문을 다소 완화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복수 3인칭으로 사용된 동사의 표현을 주목해 보자. “그들은 예수가 정신나갔다고 말했던 것이다.” 곧 그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 즉 다만 의심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죄를 뒤집어씌울 준비가 되어 있는 중상자들이요 적들로 지적될 수도 있는 친척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다른 이들에게 돌릴 필요가 있다. 그리스어에서 - 그리고 다른 언어들에서도 - “그들이 말했다”는 “그가 말했다”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결과적으로, 예수의 광기(狂氣)에 대한 고발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 유포시켰던 ‘그의 정신이 이상하다고 하더라.’는 뜬소문이었다.

 

어쩌면 친척들은 이러한 소리에 대해 불안해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가족 문제로 간주하고 사실을 자세하게 알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을 보호하고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아마도 그분의 의지와 반대될지라도 예수를 붙잡는 것이 최상의 도리라고 보았다. 이러한 행동에서 확실히 의심은 드러난 반면에 예수에 대해 적대심의 표는 없었다.

 

예수의 친척들의 - 눈에 띄지 않는 - 의심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같은 복음에서, 아직 공생활 중에 그들이 그분에게 가담했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막달레나는 임무를 받았다.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요한 20,17). 그리고 오순절 축제를 준비하는 중에 친척들은 사도들과 기도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부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사도 1,14). 지금도 마리아는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계신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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