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세계 - 신약]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 네 번째 복음서는 일곱 개의 상징적이고 기적적인 이야기말고도 비기적적인 다른 사실들을 담고 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자의 경우에서처럼 단순한 만남들은 그러나 뜻 깊은 대화와 풍부한 상징적 표현으로 끝난다.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이 여자는 거의 부수적으로 자신의 불충한 결혼에 대해 충고를 받게 된다.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다”(요한 4,17-18). 그러므로 네 번째 복음서 어느 곳에서나 마주치는 복합적인 상징적 자료들 가운데 간음한 여자에 대한 작은 단편(요한 7,53-8,11)은 이례적인 인상을 준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자에게 하신 말씀들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비난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담화가 다른 데서처럼 진지하고 고유하며 상징으로 풍부한 대화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네 번째 복음서를 읽어 보면, 이것은 다소 이례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러 세기가 지나오면서 이 이례적인 이야기는 그 진정성에 의심이 갈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깊이 있고 철저한 한 연구에 의하면 그 이야기 속에는 불확실하고 상당히 부정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더 더욱 의심이 가게 하는 동기는, 우리가 보기에,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있다. 즉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맞지 않고 뒤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야기는, 우리가 요한 복음 8장 12절을 7장 52절 바로 다음에 연결시켜 읽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부적당하게 단절된 내용이다. 7장에서 예수께서는 초막절을 맞이하여 성전 안에 계신다. 그리고 축제의 마지막 날, 장엄한 헌수(獻水) 의식 때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이 축제의 마지막 날이자 가장 중요한 날에는 헌수 의식뿐만 아니라 외부 행사인 횃불 행진도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의 축제 때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하신 예수의 말씀은 잘 짜맞추어진다. 그런데 이 이중적이고 이치에 맞는 의식의 흐름은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로 단절된다. 첫 번째 단절은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요한 7,53)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는(요한 8,1) 아무런 의미 없는 관측들에서 이미 잘 드러난다. 루가가 두 번씩이나 말하는 올리브 산에서의 하룻밤 숙박(루가 21,37; 22,39)을 말하는 것일까? 어쨌든 다음날 예수께서는 이른 아침에 다시 성전에 계신다(요한 8,2). 이 밤과 아침으로, 상당히 논리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헌수 의식과 불꽃 축제의 연결은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에 의해 분명하게 단절된다. 이 이야기의 끝에도 다른 중단이 관찰된다. 예수께서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시고 고개를 드신 뒤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청하셨으나, ‘모두’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렸다.”(요한 8,9)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여자와 홀로 남으셨고 또한 이 여자는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뒤에, 어떻게 언제라는 설명도 없이, 우리는 다시 한 번 군중 가운데 있게 된다. 복음서는 이렇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반면에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를 생략한다면 두 개의 장은 긴밀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논쟁을 유도한다. 이러한 단절 이외에도 눈에 띄는 언어와 문체의 차이점이 있다. 논란이 되는 이 단편은 요한이 흔히 사용하는 말과는 상당히 다른 말들을 지니고 있고, 나아가 네 번째 복음서나 요한의 다른 작품들의 어느 곳에서도 여기서 우리가 마주치는 표현, 이름 그리고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올라브 산”이라는 이름은 요한이 쓰지 않는 이름이며, 다른 어느 부분에도 “학자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네 번째 복음서에서는 잘못을 포착하여 예수를 괴롭히는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결코 읽을 수 없는 반면에 한층 오래 된 세 복음서에서는 종종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아주 오래 전부터 간음한 여자에 대한 이 짤막한 이야기가 원래 공관 복음서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 것이거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레 생겨난 단편으로, 후에 여러 이유 때문에 전전하다가 마침내 요한 복음서에 자리잡은 것이라고 추측되어 왔다. 아주 오래 된 복음서 본문판에서 이 편력의 흔적이 아직도 발견된다. 많은 수의 오래 된 수사본들은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고 요한 복음 7장 52절과 8장 12절을 곧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다른 훌륭한 수사본들은 이 단편을 본문 속에, 예컨대 요한 복음 결론 뒤에 삽입시키고 있다. 더 나중에 편집된 일곱 개의 수사본은, 권위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논쟁 다음에, 즉 루가 복음 21장 38절 뒤에 이 단편을 배치하고 있다. 루가 복음에서의 이러한 배치는 원래의 이야기가 루가 복음에 속하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그 편력이 시작되었다는 가정을 확인해 준다. 트리엔트 공의회 중에 교부들은 이 단편과 관련하여 있었던 의심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공의회 얼마 전에 이 이야기를 비성서적이고 감도받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의견이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 뒤, 원저자에 관한 선포는 없이, 공의회는 이 단편이 감도받은 것이며 복음의 참 부분이 된다는 것을 그르칠 수 없는 권위를 갖고 확언하였다. 이미 성 아우구스띠노는 그 당시에 이 이야기에 대한 의심을 알고 있었고, 그 가부(可否)에 관한 사색 가운데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간음을 지나치게 가볍게 판단할 유혹에 빠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자문하였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띠노는 그렇지 않다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명백한 금지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한 8,11).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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